[오션 뷰] 해양대순환과 축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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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민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

“최근 해류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 곧 혹독한 추위가 닥칠 것이다.” 2004년 상영된 영화 ‘투모로우(Tomorrow)’의 도입부에 나오는 해양학자의 경고이다. 이 영화는 그의 예언대로 지구촌에 찾아온 급격한 추위, 즉 해류 약화로 인한 극한 추위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의 노력과 가족애를 담고 있다. 이 해양학자가 언급한 해류는 ‘해양대순환(The great ocean conveyor)’이다. 북대서양의 차갑고 염도(鹽度)가 높은 해수는 밀도가 높아지면 수심 4000m까지 침강한 뒤 심층수가 되어 남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흐르다가 북서 태평양에서 표층으로 상승한다. 추운 지방의 냉각된 열에너지를 적도 지방으로 옮긴 심층수는 표층수가 된 후 다시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필리핀 근방, 인도양을 거쳐 북대서양으로 흐른다. 즉, 대순환을 통해 열에너지를 지구촌 곳곳에 잘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이 거대한 해류 흐름 자체가 기후변화 조절자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만 년 전, 최종빙기에는 이 해류가 약화되는 바람에 북반구는 물론 전 지구가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다. 덧붙이면, 당시 해수면이 120m 이상 내려갔기 때문에 중국에 살던 사람이 육지로 드러난 서해를 걸어서 한반도로 이동했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도 걸어서 일본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며 인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해류 약화 최종빙기 찾아왔지만

변화에 순응한 결과 인류가 발전

‘위드 코로나’ 적응할 필요 절실

전환에 동참하는 지혜 보여야

과학 영역에서 새로운 이론이 입증되면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는다. 16세기 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좋은 예다. 1400년간 지속된 이론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었다. 교황청은 지구 중심적 사고인 천동설을 우선시하여 지동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교황청이 천동설만을 강조한 결과, 인식이 전환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 앞에, 종교계도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종교개혁이란 아픔을 겪으면서 인식의 대전환에 동참해야 했다.

30여 년 전 지구촌의 파란을 불러낸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미래 세계에 대한 예견이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의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제3의 물결인 정보통신의 세계에 살고 있다. 전환된 인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또한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과학기술의 발전은 지구사적 변화인 동시에 축의 전환, 즉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축의 전환이지만, 최근에는 이에 더해 기후변화를 필두로 한 환경변화에 의한 축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갈등, 인구감소 등 가공할 만한 전환의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다.

해양대순환이 약해지고 북반구에 급격한 추위가 닥쳤을 때 인류는 기존의 정착지를 떠나 새로운 환경을 찾아야 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식생변화, 농작물 수확 등 인간의 삶과 관련해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특산물 ‘대구 사과’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기후변화로 대구는 더 이상 사과 재배지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축의 전환, 동서양 역사와 인류 발전의 과정에서도 유사한 사례는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축의 전환에 순응하지 못하거나 전환되지 않은 의식은 그 어떤 발전으로도 귀결되지 못한 채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영화 ‘투모로우’에 예시된 것처럼 환경변화로 야기된 축의 전환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적응과 순응이 절실하다. 해양대순환과 같은 환경적 축에는 기후변화, 대기오염, 바이러스 등이 있다.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위드 코로나’를 내세우며 순응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투쟁만을 강조하는 일부 노동단체나 굳이 대면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일부 종교단체는 변화의 축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16세기의 교황청처럼 전환에 동참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는 격렬한 반작용이 동반된다는 것도 역사의 교훈으로 알고 있다. 이미 그에 익숙해진 기득권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득권 속에 있다 하더라도, 축의 전환에 순응하고 동참해야 하는 것이 인류의 지혜이다.

오대양을 누비는 해양대순환을 깊이 참고할 만하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이질성과 조화를 이루며 순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모로우’는 우리말로 내일이다. 전환기인 ‘오늘’의 갈등을 봉합하고, 순응하고 절제하는 ‘내일’로 축이 전환돼도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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