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55.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오체투지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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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자세는 양손, 이마 혹은 턱, 두 무릎, 두 발, 가슴 등 몸의 여덟 군데가 바닥에 닿는 경배 자세이다. 다리와 팔의 근육을 강화시키며 가슴을 확장시켜 폐기능의 활성화를 돕는다. 시연 배수진. 오체투지 자세는 양손, 이마 혹은 턱, 두 무릎, 두 발, 가슴 등 몸의 여덟 군데가 바닥에 닿는 경배 자세이다. 다리와 팔의 근육을 강화시키며 가슴을 확장시켜 폐기능의 활성화를 돕는다. 시연 배수진.

“여의주보다 더 귀한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지극한 행복 이루길 다짐하며 항상 그들을 소중히 섬기리, 어느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스스로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가슴 깊은 곳에서 그들을 가장 높은 사람으로 소중히 섬기리.” 티베트 현자 랑띠 땅빠의 ‘마음공부를 위한 여덟 가지 노래’ 중의 한 구절이다.

예의를 갖추고 공경하는 방법에는 통상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인 오체투지(五體投地)가 바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지향하는 그 자체가 아닐까.

경배 자세로는 양손을 마주하며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무릎을 꿇고 합장을 더해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는 형태가 있고, 마지막으로는 머리를 땅에 닿도록 완전히 엎드리는 자세가 있다.

오체투지는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어로 ‘단다와드 뿌라남’이라고 한다. 인사하는 법이 나무 막대기 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대에는 전쟁에서 패한 왕이 상대편 왕에게 항복을 선언하며 완전 복종을 하겠다는 의미로 실행되기도 했다. 이것이 티베트 고원으로 넘어가 ‘예경제불(禮敬諸佛)’의 하나로 굳어졌다. 현재 힌두교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오체투지는 두 손, 두 다리 그리고 이마가 바닥에 닿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 문(門)의 시작과 마지막을 이 오체투지로 열고 닫는다.

오체투지가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큰 장점 중의 하나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확실하게 하심(下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내 자신의 이미지의 반영인 상대 안에 있는 신에게 나를 낮추어 온몸과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다.

오체투지는 온몸으로 올리는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변하게 만든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를 변화시키지, 기도의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쇼 라즈니쉬의 말이다.

“기도할 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이기적인 나를 낮추는 작업이다. 기도를 할 때 자신의 무지와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기도는 자기 내면과의 대화이며, 진리의 말씀과 하나 되는 것이다. 기도는 마음의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고 놓음·버림·비움·바라봄의 철학을 완성하는 길이다. 기도는 마음의 평안을 찾는 영적호흡이며 내면을 밝히는 빛의 축제이다. 절대에 대한 완전한 몰입과 전념, 상념, 헌신, 신애(信愛)할 때만이 현상적인 나를 놓을 수 있다. 그것이 박티 요가(Bhakti Yoga)이다.”-(이형록)

‘기도’에 대해 법정 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행자는 기도로써 영혼의 양식을 삼는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 기도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한 소망이다. 따라서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담겨야 한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 없다. 오로지 간절한 소망을 담은 진지한 기도가 당신의 영혼을 다스려 줄 것이다. 그리고 기도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말은 생각을 일으키고 정신을 흩뜨려 놓는다. 우주의 언어인 거룩한 그 침묵은 안과 밖이 하나가 되게 한다. 어느 인도의 스승은 말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영혼에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하루를 여는 아침의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빗장이다”라고.

오체투지의 목적 네 가지를 든다면 첫째는 존경의 의미로, 둘째는 오염된 의식을 정화하기 위하여, 셋째는 명상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마지막으로는 공덕을 쌓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체투지로 마치 풀보다 더 낮은 자세를 취한 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내려놓고 인간의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恥心)까지도 여의면서, 자존심(自尊心), 아만심(我慢心), 집착(執着)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소욕지족(少欲之足)함으로써 비로소 수행인의 참된 도리인 ‘하심(下心)’을 실천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간절한 절은 무릇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한다. 아만(我慢)이 사라지게 만들면 이마가 스스로 땅을 찾아 내려가니 오체투지가 확실하다. 이때가 되어서야 내 마음 안에 있는 순례자가 밖으로 나와 그동안 갈망하던 신성함과 만난다.”-(임현담)

오체투지 전에 먼저 두 손을 모은 후 시작한다. 제반 종교에서도 두 손을 모으는 것으로 기도나 의식을 시작한다. 두 손을 모으는 것을 합장(合掌)이라 한다. 음과 양, 하늘과 땅, 나와 우주, 아뜨만과 브라흐마의 만남이다. 요가에서는 이를 일러 ‘아뜨만잘리 무드라’라고 한다. ‘나’라는 의미의 아뜨만과 ‘경배하다’는 뜻의 안잘리(anjali)가 합쳐진 말이다. 합장 자세는 경배와 축복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요가 수련에서 합장 자세는 나무 자세(타다 아사나)나 태양경배 자세(수리야 나마스카라 아사나) 등의 두 손을 맞대는 모든 자세에 수반된다. ‘기도하는 소녀’의 사진은 일찍부터 택시나 버스 운전석 옆에 놓여 있던 눈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합장 자세는 평온함을 의미하며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몸짓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세를 통해 수행자는 자신에게 집중하여 명상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된다.

‘합장 자세는 영적 깨달음을 향한 의지의 발전 가능성을 상징한다.’-(크리슈나마차리야)

‘내려온 축복’이라는 뜻의 ‘파타-안잘리(pata-anjali)’는 ‘파탄잘리’로 음독된다. 그러고 보니 요가경전인 요가수트라를 저술한 저술가의 이름도 ‘파탄잘리’이다.

티베트인이라면 평생의 소원이 라사에 있는 조캉사원까지의 오체투지 순례라고 한다. 지방에서 출발하여 몇 년 동안 조캉사원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단다. 이들은 출발 때부터 오체투지를 하면서 가기 때문에 조캉사원에 닿을 때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가는 도중에 죽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하나, 이들은 아무런 후회 없이 오히려 편안히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놀라운 신심(信心)이다.

이 조캉사원에서 전해진다는 슬픈 이야기로, 아득한 시절에 집이 너무 가난했던 어린 소녀가 이 사원에 제례의식의 하나인 인신공양을 하기 위해 자신을 판다. ‘티베트판 효녀 심청이’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소녀의 몸은 독수리들에게 바쳐지고 남은 어깨나 다리뼈를 추슬러 사찰에서는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사원에서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는 이 피리를 불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그러니 어찌 이 순결한 어린 소녀의 영혼이 깃든 피리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토록 처절하고도 비장한 피리 소리를 들으며, 희로애락 애·오욕의 삶,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 인간의 원초적 존재 이유 등을 되묻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순간엔 그저 털퍼덕 오체투지로 대지에 온몸을 눕히며 자연과 만물에 대한 경배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 오체투지 / 곽효환 ]

“물의 기억을 품은 조캉사(大昭寺)를 둘러싼 직사각형 바코르거리/ 고원의 짧은 여름볕 아래 밀려든 사람들 틈새에서/ 한 사내가 몸을 던진다/ 얼기설기 얽은 목발에 휘청거리는 몸을 기대어/ 옆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두 무릎을 꿇고 오른 손으로 땅을 짚고/ 왼 손과 이마를 땅에 대고/ 두 손으로 공손히 빈 하늘을 받든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하나 둘 세 걸음…

푸른 그늘이 설핏 드리운다

너더너덜한 가죽 앞치마/ 땟물에 젖은 바짓단 아래/ 발목없는 다리를 허옇게 드러내고/ 위태롭게 그리고 끝없이 몸을 던지는/ 지친 검은 얼굴의 사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원에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두손으로 들어 올린다/ 세상도 사내의 표정도 흔들림이 없다

한계점을 넘을 때마다 흩날리던 타르초가 어른 거린다/ 티베트 고원을 가르지르는/ 얄룽창포강을 거슬러 동남쪽 체탕에서 왔다는/ 그는 안다/ 하늘 가까이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걸 버려야 한다는 것을/ 키작은 관목은 커녕 들풀조차 볼 수 없는/ 수목 한계점을 넘어 가장 높은 곳의/ 고독과 쓸쓸함과 위태로움과 고뇌를

얼마나 더 낮은 자세로 그는/얼마나 더 버려야 할까”.

‘오체투지 자세’를 ‘아스탕가 나마스카라 아사나(ashtanga namaskara asana)’라고 한다. 아스타는 8을 의미한다. 몸의 여덟 군데가 땅이나 바닥에 닿게 하는 경배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양손, 이마 혹은 턱, 두 무릎, 두 발, 가슴을 합하여 인체 여덟 군데가 땅이나 바닥에 닿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앞서 언급했던 사찰이나 티베트 등지에서 행해지는 실제 오체투지 자세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형태는 거의 비슷하다.

먼저 팔꿈치를 구부려 무릎이 닿게 하고 그다음 엉덩이를 약간 위로 든 채 상체를 낮추어 가슴과 이마, 또는 턱을 바닥에 붙인다. 자신을 가장 낮춘 자세를 취함과 함께 겸손함으로 모든 만물들의 존귀함에 경배를 취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생명에 힘을 주는 존재와 교감하는 만트라(mantra) 등도 겸하여 실행할 수 있다. 이 자세는 다리와 팔의 근육을 강화시키며 가슴을 확장시켜 폐기능의 활성화를 돕는다. 견갑골 사이의 척추 부위를 자극한다. 고관절에 자극을 주어 좌골신경통 등에 도움이 된다.

“전통적으로 귀의(歸依)를 상징하는 행위로서 오체투지가 행해진다. 귀의하는 것의 의사표시로서 바닥에 몸을 던지는 행위를 반복한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자신을 두고 자신 속에 있는 미숙하고 조잡한 요소를 솔직히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자기를 열어 두고, 완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가장 낮은 곳에 몸을 던지면 무엇을 잃어버릴 두려움도 사라진다. 그러한 행위에 의해 우리들은 자신을 텅 빈 그릇으로 준비해 두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초감 트룽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의 길 ‘비아 도로사’에는 지금도 그 돌길을 전신 포복으로 기어 ‘성분묘 교회’까지 가는 성직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 왕자는 말하고 있다. 사막은 우리 자신을 발가벗긴다. 오아시스가 있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발가벗겨진 우리 내면의 자연스런 본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아닐까?

‘오체투지 자세(아스탕가 나마스카라 아사나)’ 수련을 통해 깊고도 깊은 내 본연의 내면세계와 조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오체투지 / 최진태 ]

티벳성지 카일라스 한바퀴는 오십키로/ 떠남부터 십년 세월 왕복으론 이십년을/ 기어서 단 한번 순례로 마감하는 인생도

물질과 현세만에 가치 둔 사람들은/ 죽다가 깨어나도 이해못할 행위일걸/ 그러한 반 문명자세 존재자체 불가사의

무릎꿇고 온몸던져 대지에 이마댄다/ 언젠가 돌아갈 곳 흙속에 바람속에/ 낮아져 적멸의 눈에 하고 싶은 입맞춤

설산을 오르는 야크 숨결만큼 숨가빠도/ 다시 또 엎드렸다 일어서기 반복한다/ 어느덧 번지는 미소 온 몸으로 스며든다

하늘 땅 소리일랑 들어보리 다짐한 채/ 옮기는 일보궁배(一步弓拜) 멀고 먼 순례의 길/ 꽃피는 모든 것들도 납작업딘 봄날 장엄(莊嚴)

온 몸던져 하늘 문에 닿고자 하였으랴/ 마음이 가난해져 모든게 화엄(華嚴)세계/ 훨훨훨 날아오르리 하얀 날개 펼치면서

숙일수록 낮출수록 평온하고 맑아온다/ 세상이 더 순하고 세상이 더 깊어져/ 법열(法悅)에 잠기인 채로 영원 속에 침잠한다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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