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다뉴브 강에 세운 헝가리 첫 다리 “아버지 영정에 바칩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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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인 브리지


1820년 12월 1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하늘에는 두께를 알 수 없는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 금세라도 폭우를 퍼부을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었다. 평소 잠잠하던 다뉴브 강에도 거친 물살이 일고 있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이런 날씨는 드문데….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벌어지려는 것인가?’

페스트의 주거지역에 있는 큰 저택 창문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창을 통해 바깥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의 이름은 세체니 이슈트반이었다.


세체니 체인 브리지. 세체니 체인 브리지.

■부친의 임종을 놓치다

세체니는 며칠 전 영국에 여행을 다녀온 뒤 그리스로 다시 떠나기에 앞서 집에서 잠시 휴식하는 중이었다. 그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 오늘날 동지중해 지역인 레반테 등을 수년에 걸쳐 여행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보다 근대 기술 문명에서 뒤처진 조국 헝가리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외국에서 무엇을 배울지를 공부하자는 게 여행의 목적이었다.

세체니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인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영국에서 선물 받은 달콤한 홍차였다. 헝가리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인상적인 차였다. 산업혁명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던 영국에서의 여행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특히 런던에서 만난 한 귀족이 설파한 도로, 다리 같은 간접자본의 중요성은 그에게 큰 이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똑~똑~똑.”

세체니가 영국에서 본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누군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렇게 사나운 날씨에 누가 찾아온 것이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인이 서둘러 달려가 문을 열었다. 창틀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다리에는 쪽지가 달려 있었다. 하인은 비둘기를 팔에 앉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리, 부다에 계신 어르신께서 보내신 비둘기 같습니다. 다리에 종이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소식을 전하려는 모양입니다.”

하인이 말하는 ‘부다에 계신 어르신’이란 바로 세체니의 부친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세체니 페렝이었다. 헝가리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그는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재산을 국가 발전에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큰 인물이었다. 헝가리 국립박물관, 국립도서관 같은 큰 건물을 지어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다뉴브 강. 다뉴브 강.

세체니는 영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부친을 찾아뵙지 못하고 있었다. 날씨가 궂어 다뉴브 강에 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좋아지면 인사를 드리고 다시 그리스로 떠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비둘기 다리에서 편지를 풀어 읽어 보았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너라. 어머니.’

세체니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찻잔이 깨지는 바람에 홍차가 흘러내려 마룻바닥에 깔려있던 양탄자를 핏빛처럼 벌겋게 물들였다.

“다뉴브 강 선착장으로 당장 가야겠네. 어서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게.”

세체니는 곧바로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갑자기 빗방울이 툭~툭 하면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급기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졌다. 그는 아버지 걱정에 사로잡혀 비를 피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인이 서둘러 마차를 끌고 나와 세체니를 태워 선착장으로 급히 말을 달렸다.

“돈을 원하는 대로 다 줄 테니 제발 배를 띄워주게나.”

“나리, 날씨를 보십시오. 이렇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데 어떻게 배를 띄우겠습니까? 저도 살다 살다 다뉴브 강 물살이 저렇게 거센 경우는 오늘 처음 봅니다요. 돈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배를 띄웠다가는 오늘 당장 황천의 객이 될 처지인뎁쇼.”

황급히 다뉴브 강 선착장에 달려갔지만 세체니는 배를 탈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선착장에 큰 배라고는 한 척도 없었다. 기껏해야 4~5명을 태워 노를 저어 가는 작은 나룻배가 전부였다. 그는 속이 답답해졌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바다는 물론 강에도 증기선을 띄워 사람을 실어 나르는 시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나룻배 따위에 의존하고 있다니….’

세체니는 여러 사공에게 후한 사례를 하겠노라고 거듭 제안했지만, 배를 띄우겠다고 나서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대담한 자라도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에 폭이 350m를 넘은 다뉴브 강을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체니는 다뉴브 강 건너편 부다에서 부친이 서서히 눈을 감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발만 동동 구를 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비둘기 다리에 편지를 적어 날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세체니는 페스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혹시 갑자기 날씨가 개거나, 사공 중에서 용감한 자가 나타나 배를 태워주겠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공들이 모두 하루 일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간 뒤에도 그는 좁고 지저분한 선착장 바닥에 앉아 다뉴브 강 건너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뉴브 강 유람선. 다뉴브 강 유람선.

“나리, 어서 일어나세요.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비바람이 제법 잦아들었답니다. 한 사공이 배를 태워주겠다고 합니다.”

세체니는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선착장 바닥이었다. 밤새 아버지 걱정만 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에 누워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내가 강변에 올려놓았던 나룻배를 꺼내 강에 띄우고 있었다. 세체니는 서둘러 배에 올랐다. 비바람이 조금 약해졌다고 하지만 강물은 여전히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룻배는 물살에 따라 일엽편주처럼 여기로 기우뚱, 저기로 기우뚱 흔들렸다.

세체니는 다뉴브 강 건너편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밤새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부친 집으로 달려갔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처럼 그의 마음도 매우 심하게,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 멀리 집이 보였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집 안팎을 오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마차가 집 근처에 이르자 마침 집에서 큰형 야노스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 형을 쳐다보았다. 형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눈 주변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버지가 밤새 너를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세체니는 문을 오가던 사람들을 밀치고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지의 침실이 있던 2층으로 관이 하나 올라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 다리에 힘이 쏙 빠져 그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세체니는 계단 난간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들어 올려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침대 앞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막내아들이 이제야 왔다는 아내의 절규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세체니 체인 브리지. 세체니 체인 브리지.

■다뉴브 강에 철교를 세우다

“다뉴브 강에 철교를 만듭시다. 페스트와 부다를 연결하는 튼튼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언제라도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합시다.”

세체니가 부친을 임종하지 못한 한을 가슴에 묻은 지도 벌써 19년이 지난 1839년 봄이었다. 그는 페스트의 한 식당에서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는 영국의 다리전문가인 윌리엄 클라크였다.

세체니는 부친 별세 이후 여행을 다녀온 뒤 정계에 뛰어들어 유명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말 한마디는 여러 정치인은 물론 많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뉴브 강의 교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썼다. 1830년대 초에는 ‘다뉴브 항행 위원회’의 위원장 자리를 맡아 부다에서 흑해까지 배를 운행하는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다뉴브 강과 티자 강, 바탈론 호수에 증기선을 띄우기도 했다.

세체니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배가 아니라 다리였다. 그는 다뉴브 강에 다리가 없어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식당에서 클라크를 만난 것은 다리 건설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세체니 체인 브리지. 세체니 체인 브리지.

“다리 설계 작업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설계를 한 뒤 건설도 그렇게 힘들지 않고요. 그런데,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금입니다. 무슨 돈으로 다리 건설비를 마련하겠습니까? 정부에서 내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클라크는 돈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건설 공사를 설계해본 경험이 많아 기술적 애로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세체니는 빙긋이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먼저 내가 상당한 금액을 희사할 거요. 그리고 부다페스트 시민을 포함해 국민을 상대로 모금 운동도 벌이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건설비가 턱없이 부족하겠지요? 내게 다른 방법도 있소. 엄청난 기부금을 낼 기업인을 물색하겠소.”

세체니는 클라크와 함께 헝가리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던 그리스 출신 기업가 게오르기오스 시나스를 만났다. 세체니는 헝가리 최고 정치지도자였고, 시나스는 헝가리뿐만 아니라 유럽 최고 기업인이었느니 평소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시나스 씨, 저는 다뉴브 강에 다리가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곁을 지키지 못한 한을 갖고 있습니다. 눈을 감으신 아버지께 다뉴브 강에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지요. 이번에 클라크 씨와 함께 다리 건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나스 씨께서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나스는 일곱 살 때 사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갔고, 20대 초반에는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금융가가 됐다.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도움으로 헝가리 귀족 작위를 받으면서 헝가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업의 상당 부분을 헝가리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소유한 땅도 적지 않았다.

부다와 페스트를 다리로 연결해 교통을 원활하게 만들면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세체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시나스는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세체니와 악수를 나눴다.

“그렇게 하지요. 세체니 씨. 헝가리의 이익이 바로 저의 이익이니까요.”

다뉴브 강 다리 건설 사업은 1839년 시작됐다. 클라크가 다리를 설계하고, 스코틀랜드 출신인 애덤 클라크가 공사를 담당했다. 공사는 10년이 걸려 1849년에야 끝났다. 하지만 세체니는 다리 완공식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우울증에 걸렸고, 결국 다리 완공 한 해 전인 1848년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하고 말았다.

헝가리 역사상 다뉴브 강에 세워진 첫 ‘영구적 다리’라는 기록을 가진 이 교량을 헝가리 사람들은 ‘체인 브리지’라고 부른다. 외국인에게는 ‘세체니 다리’, ‘세체니 체인 브리지’라고 알려져 있다. 세체니 다리에는 다리 건설의 두 주역인 세체니와 시나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체니 체인 브리지. 세체니 체인 브리지.

세체니 다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5년 1월 18일 이른바 ‘부다페스트 포위’ 작전 때 후퇴하던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고 말았다. 탑 두 개만 겨우 붕괴를 모면했다. 헝가리 정부는 4년 뒤인 1949년 다리를 재건했다.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을 가면 볼 수 있는 세체니 다리는 이때 새로 만든 것이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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