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57. 균형감·집중력을 키워 주는, 파당구쉬타 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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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균형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파당구쉬타 아사나’는 발가락과 발목 관절, 아킬레스건을 자극하며 종아리 근육을 튼튼하게 한다. 시연 박미희. 상당한 균형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파당구쉬타 아사나’는 발가락과 발목 관절, 아킬레스건을 자극하며 종아리 근육을 튼튼하게 한다. 시연 박미희.

쪼그리고 앉아서 한 발을 반대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합장하며 집중하여 균형을 잡는 자세를 파당구쉬타 아사나(padangushta asana), ‘발끝으로 선 자세’라고 한다. 여기서 발은 흔히 제2의 심장이라 불리는데, 발은 신체의 축소판 그 자체다.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지탱해 주며 전체 균형을 잡아 주기도 한다. 또한 발은 신체의 각 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발은 몸 건강상태를 나타내 주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성경(고전: 12)에서도 몸의 지체(肢體)에 대해 비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요,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하면서 발 또한 몸의 중요한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

발은 체중의 80%를 지탱하고 있고, 항상 딱딱한 지면에 매일 약 1만 번을 부딪치고, 그것과 함께 자기 체중을 1만 번 정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성인 기준 약 70만kg(700t)을 들어 올리며, 연간 보행 수는 약 300만 보(2000km 이상)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일을 하고 있다.

발은 20여 개의 뼈와 30여 개의 관절, 100개 이상의 인대로 이루어져 있다. 발에는 신경혈관 등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만큼 발은 어느 신체부위에 뒤지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이 이렇듯 수고하는데도, 고작 잠들기 전에 비누로 한번 쓱 씻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형제 같은 손과 비교할 때 , 손은 금이야 옥이야 씻기고 닦기고 게다가 보습 케어 등 향기로운 고급 크림 등을 잔뜩 바르며 호사를 누리고 있는 현실이 발에게는 참 불공평하게 느껴질 듯하다.

제대로 잘 씻기지도 않으면서, 종종 고린내 난다고 업신여기고 하대를 받으니 발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 법하다. 그러나 발은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함에 불평·불만·섭섭함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치다 싶으면 때로는 발도 한 번씩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발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항상 조용하기만 하던 조강지처께서 한번 토라지면 더 무섭다는 경험이 있는 분들은 공감이 가려나.

그때서야 발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발이 없으면 어찌 우리가 자유롭게 온 천하를 누비고 다닐 수 있으랴.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손의 해방을 의미하며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사람), 호모 에렉투스(서서 걷는 사람),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등의 별칭을 얻으며 인류는 점점 더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인류가 이런 성장과 진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두 발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발을 활용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두 손도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끔씩 잊을 때가 있는 듯하다. 실로 발은 우리 인체를 떠받치는 터전인데 말이다.

시니어들이 고관절 골절이나 질환 등 기타 사유로 자리에 눕게 되면 급격히 의식이 흐려지고 살아갈 기력을 잃는 일이 많다. 이것은 발이 뇌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리의 대퇴부부터 발끝까지에는 온몸의 근육의 3분의 2가 모여 있다. 그런데 뇌는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뇌자체도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다리와 발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뇌의 활동도 당연히 둔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발을 사용하고 온몸을 움직이는 것은 뇌의 발달이나 활동에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발에는 우리 몸의 모든 신경이 다 모여 있기 때문에, 발을 제대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뇌의 활동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 기술할 걷기 등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발에 관련된 많은 예화 중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맨발의 댄서 이사도라 던컨은 미국의 무용수로서 자유무용을 창시하여 현대무용의 혁명가라 일컬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를 위해 인형의 집에서 탈출한 노라였다. 그는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섬으로써 주체적으로 춤을 추었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다”라는 던커니즘(duncanism)을 유행시켰다.

“나의 춤은 내가 창조해 낸 게 아니다.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깨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춤은 개인에게 집중된 우주의 움직임이다” 등의 춤에 대한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1968년 개봉된 영화 ‘이사도라 던컨’의 ost곡이 ‘맨발의 이사도라’이다. 폴모리 악단이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차트에 5주간 정상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곡이다.

상처투성이의 두툴두툴 굳은살이 박여 기형적으로 변해 버린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을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 피겨 여왕 김연아의 발 역시 최고가 되기 위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피와 땀과 노력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위안부 소녀상도 맨발이다. 이는 소녀상 원작가가 일본군이 위안부 소녀들을 타국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신발을 빼앗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맨발로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인도의 뉴델리 간디 기념관에서 2018년 7월 문 대통령이 현지 관례에 따라 모디 인도 총리와 함께 맨발로 기념행사에 참가한 사진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1932년 1월 주요한이 발행하던 월간지 ‘동광’에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를 김동인이 발표했다. 이 소설은 횡보 염상섭을 모델로 삼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모델소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곽시쌍부(槨示雙趺)란 용어가 있다. 붓다가 열반에 들었을 때 6일 늦게 도착한 마하가섭이 붓다의 법구도 보지 못한 채, 관을 붙잡고 슬피 울자 붓다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사건을 말한다.

인도자이나교 사원을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입장해야 하는데 그나마 양말은 신어도 된다. 자이나교의 불살생·무소유 교리에 따른 나체 수행자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벌거벗은 채 맨발로 공작 깃털로 만든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를 쓸고 다닌다. 혹시 작은 곤충이라도 밟아 죽일지 몰라서란다. 그만큼 철저히 불살생과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을 맞아 교도소를 찾아 미사를 주관하고 재소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도 가졌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이 있다. 씻어준 발에 입을 맞추면서 축복했는데 이런 세족식(洗足式)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 준 데서 유래했다.

마라톤의 기원으로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디스가 페르시아 군단을 격파했다는 승전 소식을 빨리 알리려고 42km를 쉬지 않고 달려간 병사가 소식을 알리고 쓰러져 죽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발아래 앉는 것은 배우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임의로 발아래 앉게 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시사한다. 원수를 발아래 둔다는 것은 원수를 정복하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것을 뜻한다. 이는 고대에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발아래 놓고 그 목을 밟았던 풍습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발가락 역시 힘의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 블레셋 장수 가운데 여섯 발가락을 가진 장대한 자가 등장한다. 따라서 전쟁 포로의 발가락을 절단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대사회에서는 환대의 뜻으로 손님들에게 발 씻을 물을 주었고, 노예나 종들이 주인이나 귀인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상례였다. 샌들의 들메끈을 풀고 묶는 것도 동등한 일이었다. 여하튼 이 같은 일은 종들이 하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권리·자존심 등 모든 인간적인 것을 내려놓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했다. 상대방의 가장 불결한 곳, 부끄러운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감싸는 자기희생적 헌신과 봉사·섬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라고들 한다.

역시 성경(눅 7)에는 눈물과 자신의 머리털로써 예수의 발을 씻은 한 죄 많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 당시 여인의 머리털은 자존과 자긍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석가여래의 발자국을 형상화한 그림이 유적도(遺跡圖)이다. 본래는 마가다국의 큰 돌에 새겨진 불족적(佛足跡)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그려서 중국에 전하였다 하며 누구나 이 여래의 발자국을 보면 존경심을 가지며,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것을 만들어 승계하고 공경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발바닥에 두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것으로 족하이륜상(足下二輪相)이라고 말한다. 부처가 열반에 들 적에 가섭존자에게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기록 등에서 불족(佛足)에 대한 경배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태국 사라부리 왓 프라 풋타밧에는 불족적을 모시는 성스러운 왕실 사원이 있다. 1623년 아유타아의 쏭탐왕이 상처 입은 사슴이 수풀로 들어가더니 몸이 치유된 상태로 다시 수풀에서 나온 걸 본 후 사냥꾼이 숲속으로 들어가 물에 고인 큰 발자국을 발견하여 피부병을 바로 치료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인 이곳에 사원을 건축한 것이다.

불족적은 부처의 상징으로 중생을 보살피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부처를 상징하기도 한다. 주로 무불상(無佛像) 시대에 부처를 상징하기 위해 보리수·법륜·연화 등과 함께 많이 표현된 도상(圖像)이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로 시작하는 최희준이 부른 ‘맨발의 청춘’ 곡이 있다. 신성일과 엄앵란 주연으로 1964년 개봉된 영화의 주제곡이기도하다. 두 배우는 이 영화 후 부부가 되었다. 연배 있는 분들에게는 아득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곡이다. 한국 고전영화 중에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이다.

그 뒤에 2006년 4월 개봉한 신현준·김수미 주연의 코미디 영화 ‘맨발의 기봉이’도 있다. 맨발의 마라토너 기봉이의 독특한 캐릭터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유년기 때는 건강한 발이었는데 성인이 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발의 변형이 나타난다는 자료가 있다. 이것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등장한 신발이 기능성보다 패션성이 강해지면서, 갈수록 발의 기능을 무시한 형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좀이나 티눈, 굳은살 등도 모두 잘못된 신발로 인해 생긴다. 발에 너무 꽉 끼는 신발은 좋지 않으며, 특히 볼이 너무 좁은 하이힐, 너무 가는 끈으로 만든 샌들, 지나치게 발가락 부분이 헐렁한 신발을 신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특히 하이힐은 체중이 앞으로 들리기 때문에 척추의 균형을 잃게 됨으로써 요통과 골반통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이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땅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충전받아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땅의 생명력 때문이다. 현대의 생활방식은 우리를 땅과의 접촉으로부터 차단하였다. 땅과 접촉의 차단이 우리의 생리적 기능 장애 및 건강상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학계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땅과의 접지(earthing)를 통한 지구의 전자(electron)와의 재연결은 흥미로운 생리적 변화와 웰빙을 촉진한다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신체의 모든 장기나 조직 및 세포의 전기적 환경을 안정화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근래에는 그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황토길· 바다 모랫길·뻘밭길·시골 흙길·숲길 등의 맨발 걷기를 통해 면역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각종 질환 등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시대에는 오히려 ‘생태 문해력(ecoliteracy)’이 ‘컴퓨터 문해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려면 자연과 친하고 자연과 만나야 한다. 하늘에는 공기(空氣)가 있고 땅에는 지기(地氣)가 있다. 공기와 하나 되어 하늘의 에너지인 천기(天氣)를 받고 싶으면 자연을 찾아야 한다.

“양념을 전혀 쓰지 않고 간도 하지 않는 맨밥은 매일 먹어도 오히려 싫증나지 않는 맛을 품고 있다. 맨밥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보면 참으로 달다는 생각이 든다. 맨밥의 힘이라 할 수 있다. 맨발 걷기는 바로 이런 힘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전에는 지기(地氣)를 받는다고 말을 했지만, 지금은 지구 자기장과 공명한다고 말한다. 지기를 받는 것, 지구 자기장과 공명하면 우리는 인기(人氣) 있는 사람이 되리라 본다.”(권택환)

그러나 맨발 걷기가 만능일 수는 없다. 잘못된 맨발 걷기는 오히려 더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학 측면에서 발바닥 용천혈(湧泉穴) 등을 통한 냉기(冷氣)의 유입이 우리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연구 과제다.

무릎을 꿇고 발끝을 가지런히 모아 세우고 앉아 발뒤꿈치로 엉덩이를 받친 채 회음부위를 압박한다. 오른발을 왼발 무릎 위에 올린 후,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정지된 상태로 고정할 수 있을 만큼 있다가 푼다. 발뒤꿈치를 바닥에 대고 할 수 있다면 좀 더 정지된 시간을 늘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사나는 성적인 욕망의 절제와 의지력을 키워주며 집중력·균형력 배양에 효율적인 자세다. 발가락과 발목 관절, 아킬레스건을 자극하며 종아리 근육을 튼튼히 한다.

‘파당구쉬타 아사나’와 더불어 팁(tip)으로 ‘발끝 치기’를 권하는 바이다. 앉은 상태에서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앞으로 쭉 뻗은 채, 뒤꿈치는 붙이고 양 발끝만 서로 마주치도록 한다. 가능한 한 새끼발가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큰 동작을 취하는 게 운동효과가 더해진다. 발을 비롯한 하체의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 특히 손발이 찬 사람에게 권하는 동작이다. 허벅지를 슬림하게 해주며 발과 다리에 부종을 완화시켜 준다. 서혜부 쪽의 신장·간 경락을 자극해 정(精)을 튼실하게 해준다. TV 시청 시나 틈날 때마다 해주면 놀라운 효과가 있다.

세상에는 범죄에 빠른 발, 줄서기에 견공보다 빠른 발, 뱀같이 교활한 발,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발, 뻔뻔한 발, 잘 넘어지는 발, 태클을 잘 거는 발, 거짓과 위선에 능한 발, 궤변과 요설(妖舌)을 풀어내는 발, 교만과 허영에 사로잡힌 발도 있고, 복음과 법(法)을 전하는 발, 사물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발, 불의를 보고 뛰어가는 발, 겸손과 낮춤의 길로 옮겨 가는 발, 병들고 약한 자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는 발, 위기에 처한 자를 위해 뛰어가는 발, 묵상과 사유를 위해 두 손 모으며 기도처로 향하는 발,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자세를 낮추는 발도 있다.

과연 나 자신은 어떤 발, 어떤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한 번쯤 돌이켜 볼 일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란 말이 있다. ‘네 발밑을 살펴보라’는 뜻인데 불가(佛家)의 전등록 중 하나인 ‘벽암록’에 전해오는 유명한 화두(話頭)다.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자신의 발밑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없는지 발 아래쪽을 잘 살펴보라는 경책이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다리 저는 자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르코(9:45) 구절을 떠올린다.

아래 시는 서산대사가 썼다고도 하고, 순조 때 활동했던 시인 이양연이 썼다고도 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했던 ‘답설(踏雪)’이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후일 후손들에게 또한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바르고 번듯한 걸음으로 걸어가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액자 속에 글이 아닌, 입과 머리로만이 아닌 온몸으로 깊이 새겨들을 시구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남을 원망하느라 인생을 소모하고 사회를 더럽힌다. 그러나 어떤 불행과 힘든 시간에도 타인의 선한 마음을 믿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를 지키는 힘은 높고 낮은 것을 떠나 직업의 귀천을 떠나, 주어진 환경과 맡겨진 위치에서 묵묵히 자기 몫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느껴진다. 마치 우리 인체의 발 같은 사람들 말이다.

오늘 내딛는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발걸음이 하늘마음·하늘 문을 여는 진솔한 발걸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해 본다. 그러면 아마 우리네 삶 자체가 향기로움은 물론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을 듯하다.

상당한 균형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파당구쉬타 아사나’를 취하면서 자신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의 의미를 한 번쯤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가 수련의 두 가지 큰 대들보는 ‘심신의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라고 선현들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 발(足) / 최진태 ]

낮은 곳 낮은 자세 섬김과 헌신 봉사/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 다함/ 생색일랑 그대가 내게 내가 죽어 너 산다면

애제자 가섭 존자 열반을 못지켰다/ 늦게와 통곡하는 저 모습 애잔쿠려/ 두 발을 들어 보이리 염화시중(拈華示衆) 미소짓게

백설위 찍혀지는 내가 걷는 발자욱들/ 그대로 얼어붙어 화석인냥 선명하다/ 하늘이 지켜본단다 무슨말을 더할까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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