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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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벚꽃이 하롱하롱 떨어지는 송정 가로수 길을 걸었다. 비가 오지 않아 도로가에 눈처럼 쌓인 꽃잎을 머리에 흩뿌리며 웃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지만 새삼 경이로웠다. 길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은 벚꽃 터널 아래서 아이처럼 사람들이 웃었다. 새까맣고 거친 나무둥치에서 어찌 저리 여린 꽃잎이 피어날까. 가장 무거운 것과 가장 가벼운 것이 공존하는 것은 삶의 신비이다.

고유한 전통을 간직한 한국 정원이 보고 싶어 담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소쇄원과 명옥헌에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백제 문화권에 속하는 전라도 지역을 방문하면 경상도와는 다른 우아한 품격이 건축물에 스며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순창 용궐산 전망대에 최근에 세운 정자는 기품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여서 세수가 적을 텐데 관광 유적지를 정성 들여 조성한 감각이 돋보였다. 문득 금정산 둘레길에서 잠시 쉬었던 쉼터와 비교되었다. 비가 왔을 때 갔더니 처마가 너무 짧아 마룻바닥이 다 젖어 있었다. 작은 건축물이지만 부산의 특색이나 고유한 멋을 살리면 더 좋을 것 같다.


평화와 위로 전하는 메리 올리버의 시

지친 세상 삶의 무게 가볍게 하는 소망들

코로나 끝나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길


담양 죽녹원으로 들어가니 잘 가꾼 대나무 숲길이 정겨웠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 전국에서 오는 듯했다. 긴 대나무 숲을 따라 한국가사문학관까지 걸어갔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게 정자와 한옥 건물을 배치해 편안한 휴식을 선사했다. 특히 가사문학의 진수를 담은 작품을 커다란 돌에 새긴 글씨도 예술성이 살아 있었다. 한시를 세련된 서체로 새긴 것을 보고 감탄했다. 한편 어느 도로에서 보았던 ‘바르게 살자’라고 쓴 커다란 돌비석이 떠올라 씁쓸했다. 아름다운 시의 한 구절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가사문학을 소개하는 산책길에는 송강 정철의 가사인 ‘성산별곡’도 있었다. 그가 영의정으로 재직할 시절 조선은 혼란스러웠고 그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정철이 선조의 매서운 칼잡이 역할을 한 정치가로서 가담했던 ‘기축옥사’ 얘기를 들으니 당혹스러웠다. 기축옥사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옥사를 당했다고 한다. 예술가의 삶과 글이 늘 일치할 수 없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래도 그의 가사를 기리는 문화는 담양에 남아 있었다.

미국에서 도시 문화가 팽배한 가운데 매사추세츠주 동부 해안가의 아름다운 프로빈스타운에 정착해 자연을 찬미하는 시를 쓴 메리 올리버(Mary Oliver)는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다. 한때 미국 시단에서는 고백파 시의 여파로 개인의 상처와 고뇌를 시적으로 과감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우세했지만 그녀는 서정시를 주로 썼다. 그녀의 시를 읽으니 한국의 서정시와 유사한 듯해서 놀라웠다. 올리버는 40년 넘게 프로빈스타운에서 숲을 거닐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며 만난 동물과 식물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삶의 환희와 경이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정치적 시각이나 비판적 사유보다는 자연에서 느끼는 평화와 위로를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시 ‘기러기(Wild Geese)’는 V자로 대형을 이루어 남쪽으로 떠나는 기러기 무리의 비행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언어가 쉬우면서도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는 미국 학생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이다. 시의 앞부분에서 ‘당신이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무릎으로 기어 100마일의 먼 사막을 건너지 않아도 돼./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면 돼./ 내게 절망과 당신이 가진 것을 말해 봐요, 그러면 나도 당신에게 나의 얘기를 털어놓을 게요’라고 시작하면서 독자에게 대화를 건넨다. 타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현대인의 답답한 심정을 녹여 준다. 사회적 윤리와 의무 혹은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제시한다. 먼 곳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기러기의 날갯짓을 격려하면서 안도감을 제공한다.

올리버는 시에 사적인 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자연의 사물들을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 시인이다. 그녀는 어릴 적 성적 학대를 당했음을 노후에 고백했고 여성 사진작가인 몰리 쿡과 오랜 세월을 동반자로 살았다. 이성의 배우자와 결혼했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나 앤 섹스턴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녀는 내면이 더 평화로웠던 것 같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이 상상하는 그 자체를 제공하지요./ 기러기처럼 꽥꽥거리며 들뜬 소리로 외쳐요./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당신이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요.’ 외롭고 지친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에게 그녀는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기러기처럼 우리는 다시 어딘가로 멀리 자유롭게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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