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시인들 모더니즘 시집 4권, 4색 개성으로 빛나다
부산의 모더니즘 시인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발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모더니즘 시집 4권은 김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신생), 송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걷는사람), 박춘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한국문연), 채수옥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여우난골)이다.부산 시단은 모더니즘 시가 강세다. 자연의 서정적 질서보다는 도시의 인공적 질서가 승한 환경이 이런 시로 나아가게 한다. 예측 불가가 ‘모던(morden)’, 근대의 속성이다. 부산의 모더니즘 강세는 부산 삶의 핵심, 사유의 방식이 ‘분열되고 오염된 근대’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김참·송진·박춘석·채수옥
소외·무질서·무목적·덧없음 등
모더니즘 강한 부산 정서 담아
‘우리 삶 파편적 단면’ 표출
도시 부산의 삶은 개항과 식민지 시대, 해방과 경제개발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150년 안팎에 어수선하고 핵심적으로 걸쳐 있는데 이 만만찮은 시기가 부산 시의 ‘모더니즘적 굴성’, 그것의 원형질을 이루고 있다는 거다. 물론 부산을 구성하는 요소는 많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부산이 내장한 많은 것들에 골고루 눈을 돌리기보다는 근대 도시적 요소와 삶의 세부, 즉 소외 무질서 무목적 덧없음을 향해 ‘표나게’ 내닫고 있는 거다. 야유, 반항, 파편들의 편집, 비논리적 반사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세부적으로 내닫는 방식에서는 감성적 방식과 이성적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편의적으로 본다면 전자에 김참과 송진, 후자에 박춘석과 채수옥이 속할 거 같다. 앞의 두 사람은 1990년대에, 뒤의 두 사람은 2002년에 등단했다. 전자와 후자는 두 연대의 모더니즘 경향성, 다른 결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요컨대 연대를 더해 가면서 대체로 이성적, 논리적, 사유적으로 돼 간다는 거다. 그것은 주지주의를 기조로 하는 모더니즘 시의 방향성이자 귀결일 것이다.
모더니즘이 택하는 감성적 방식은 어떠할까. 김참은 천천히 풀어헤치고, 송진은 단숨에 내달린다. 김참은 이번에 상당한 서정성을 풀어놓는다. ‘들어오는 뱀’이란 시를 보면 이러저런 뱀들과 ‘마흔일곱의 나는 서로 닮은꼴’이라며 뱀들이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한다. ‘숨 들이쉴 때면 파란 핏줄 툭툭 불거진다.’ 파란 정맥의 핏줄이 몸속의 뱀 같다는 시적 발견을 내놓는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내가 왜 홀로 있는지 알 수 없는 밤’(49쪽). 파편적인 세계를 마주하고 ‘알 수 없다’는 것이 김참의 세계 인식이다.
송진의 경우, 단박에 쓴 정념의 시로 읽힌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는 시는 행갈이, 단락이 없는 연속적인 문장으로 이뤄진 16쪽의 시 한 덩어리다. ‘뭐 하나라도 예측된 게 없다 예측되었다면 그건 거짓이다’(20쪽).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그 분열의 세계를 압도하는 언어적 정념, 놀라운 변전을 그는 노리고 있다.
이에 견줄 때 박춘석과 채수옥은 이성적 방식에 가깝다. 박춘석은 ‘내가 지금 사람일까’ ‘내가 실존하고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진지하다. 그는 ‘말이 닿을 수 없는 곳/마음만 닿는 곳’을 향한다. 그러나 ‘나는 수년을 사과를 향해 왔지만 사과에 당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과와 나 사이에는 ‘어느 전생인 듯 종의 경계’가 있다는 거다. ‘모든 꽃은, 모든 사람은 봄까지 가야 발견된다는데’ 그 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라고 그는 묻는다. ‘나무가 허공으로 높게 자란 만큼/뿌리가 깊다고 두 아이가 동시에 대답했습니다’. 봄소식은 저 허공에만 있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다는 거다. 저 먼 곳이 아니라 이곳에 ‘무엇’이 있다는 거다. 그는 시적인 자아인 ‘두 아이’에게 ‘봄소식 기쁘게 잘 들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채수옥은 ‘현대의//민낯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현대는 ‘플라스틱과 비닐의 시간’이다. ‘미궁과 비명에 싸인 여러 개의 장면들을 잘라내서 플라스틱과 비닐의 시간들을 기록하는//야근의 밤은 팽창한다’. ‘미궁과 비명에 싸인’ 우리 삶의 파편적인 장면을 밤늦도록 쓴다는 거다.
세계가 불온하다는 증언, 알 수 없다는 막막함,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는 도발…. 눈앞의 수렁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방식이 모더니즘 시다. 시는 저 ‘불온한 수렁’에 빠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헤쳐나올 수 있을 것인가. 어쩔 수 없는 그 지점에서의 절규가 모더니즘 시가 아닐까. 그러나 ‘시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