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총통의 기술력으로 조총의 시대를 열다 [자주국방 인in人] 13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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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대 노영구 교수가 서울시민청 군기시터에서 군기시의 역할과 화약무기 제조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방대 노영구 교수가 서울시민청 군기시터에서 군기시의 역할과 화약무기 제조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주국방 인in人] 13. 조선군의 주력 무기 조총, 평화를 이끌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이 일본과 벌인 국제전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전쟁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불러온다.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제적 지형이나 각국의 정세가 바뀌었다고 본다. 대륙의 주인이던 명은 청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왕조를 간신히 유지한 조선은 성리학 지배 질서가 한층 강화됐다. 일본은 마침내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다. 일본은 약탈한 한국의 문화로 일본 문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한다.

임진왜란을 동북아 최대 화약무기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쟁은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고, 특히 화약무기의 평준화와 국가 간 이전이 이루어진다. 조선의 개인 화기이던 승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 등에서 성과를 냈지만, 왜군이 사용하던 조총의 효용성을 본 조선은 급격하게 조총으로 화약무기의 주력을 바꾼다. 전쟁의 목적은 유용한 무기로 싸워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총은 조선군의 주력 개인 소화기로 우뚝 선다.


다양한 조총, 조총은 17세기 이후 조선군의 주력 소화기였다. 다양한 조총, 조총은 17세기 이후 조선군의 주력 소화기였다.

승자총통에서 조총의 시대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채 1년 만인 1593년 조선은 조총을 자력으로 만들어 실전에 배치한다. 조총은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총이 아니다.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명나라에서 명명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도입한 조총을 철포(鐵砲·데뽀)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일본은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바로 도입해서 강한 군대를 양성했고,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일 수 있다고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교수가 말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대마도주가 조총을 조정에 바칩니다.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았지만, 쉽게 도입하지는 않았지요. 조선에는 강력한 기마궁병이 존재했으니까요." 실상 조총은 초기에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조선이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고, 조총의 위력을 몰라서도 아니다. "무기는 보수성이 굉장히 강하죠. 그게 확실하게 좋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누구도 채택하지 못합니다." 노 교수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밀린 것은 조총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조총을 집단으로 운용한 왜군의 전술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임진왜란 대표적인 초기 패전이죠. 왜병은 장창을 앞세워 기마병을 저지한 후에 조총을 집중 발사하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우리 해군이 학익진으로 왜선을 밀집시킨 후 천자총통 등 화포로 공략한 것과 마찬가지 전술이죠." 노 교수는 무기가 아니라 전술이 초기 패전의 원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총 운용의 위력을 확인한 조선은 바로 조총을 조선군에 도입한다. 이미 가늠자 가늠쇠가 존재하는 소승자총통을 만들어 사용하는 조선군은 도입하기가 총통류 보다 한결 쉬운 조총을 주 무기로 택한다.

국립진주박물관 김명훈 학예연구사는 조총이 재료 조달 면에서도 유리했다고 말했다. "총통류는 청동을 주재료로 썼습니다. 서울 군기시 유적 발굴 유물을 보면 총통류를 녹이기 직전의 덩이가 발굴되는데 구리를 구하기 힘든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철은 우리나라에서 흔한 재료였습니다. 조총은 철로 제작하니 재료 수급 면에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죠." .

임진왜란 이후 조총의 위력을 경험한 조선은 적극적으로 조총을 생산하기 시작해 불과 30년 만인 인조 대에 이르러 매년 2000정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승자총통(아래)과 현자총통.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승자총통(아래)과 현자총통.

승자총통은 왜 조총에 자리를 내줬나

국립진주박물관 김 연구사도 조총의 전술적 측면을 이야기했다. "왜군은 조총을 혼자서 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동해서 집단으로 발포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15~30%가 철포조였는데, 비록 조선군도 승자총통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화력 전술 측면에서 열세였죠."

조총의 화기적 장점도 분명 존재했다. 우선 조총은 총열이 길어 사거리도 길다. 일제 사격이 가능하도록 방아쇠가 있었다. 일제 사격은 조선군의 기선을 제압하는 효과가 분명했다. 반명 승자총통은 명중률이 조총보다 낮았다. 조총은 50m 이내에서 조준사격을 하면 상대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맞출 정도였다. 승자총통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 발화 방식에다가 총열도 40~50cm 정도로 짧았다. 치명적인 단점은 동합금으로 만들었다. 무게가 4kg 정도로 무거웠다. 총통을 구성하는 80%가 구리였다. 한 번 발사할 때 화약이 조총보다 많이 쓰이는 것도 약점이었다. 승자총통은 한 번에 화약 27g 사용했다. 조총은 8~12g만 쓰였다. 조총은 단발 탄환을 장책해 긴 총열을 이용해 쏘기에 탄도 안정성이 좋아 명중률이 뛰어났다. 총열 길이만 110cm에 이르고 조준선 정렬이 가능한 특징이 있었다.

선조는 1593년 도성으로 돌아오며 비변사를 통해 훈련도감 창설을 지시한다. 그리고 조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은 철과 장인만 확보하면 됐다. 조선은 이미 소승자총통을 만든 기술력을 갖고 있었고, 철 수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서울시민청 군기시터 유구 모형도. 서울시민청 군기시터 유구 모형도.

군기시와 훈련도감 하도감

"군기시는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소라고 보면 됩니다. 훈련도감 하도감은 조병창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는 지금의 서울 시민청 자리에 있었던 군기시 유적에서 다양한 화약무기를 만드는 실험과 연구를 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발굴과정에서 1563년 제작했다는 명문이 뚜렷한 불랑기 자포가 발견된 것이다.

"흔히 불랑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가 처음 선보였고 이후 조선이 도입한 무기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군기시 유적에서 발굴된 불랑기 자포는 임진왜란 30년 전에 만든 것이 확인됐습니다." 조선이 화약무기의 선진국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다.

불랑기는 포신과 포탄을 장착하는 자포로 분리 구성돼 있는데 자포는 포신에 포탄을 장착하는 장치다. 서울 군기시 유적에서는 불랑기 자포와 총통류가 녹기 직전인 상태로 엉겨 붙은 유물과 대장군전의 철깃, 각종 총통류 유물이 많아 가히 화약무기 전시장으로 볼 수 있다. 노 교수는 조총을 군기시에서 직접 만들었는지 유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고의 장인들이 근무하던 군기시에서 시험제작했을 개연성은 높게 봤다. 다만, 훈련도감의 하도감 유적이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동대문DDP)에 있는 하도감 유적에서 조총을 만들어 훈련도감 군인에게 줘서 실험도 하게 하고, 보급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도감은 훈련도감의 분영 중 한 곳으로 조선 효종 때 한양의 동쪽 방어를 위해 군사를 주둔케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하도감에는 조총고, 궁전고, 화약고 등 창고를 두었고 불랑기 등과 같은 화기 제작도 이루어졌다. 만든 후에는 실험도 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습니다."

동대문 운동장을 재개발하며 만든 동대문DDP에는 하도감의 주춧돌과 소성유구(화기를 사용한 흔적) 유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렇게 조총은 군기시와 훈련도감을 통해 조선군의 대표 소화기로 우뚝 섰다.


동대문DDP에 있는 훈련도감 하도감 터. 하도감에서는 조총 등 화약무기 생산과 시험 운용이 이루어졌다. 동대문DDP에 있는 훈련도감 하도감 터. 하도감에서는 조총 등 화약무기 생산과 시험 운용이 이루어졌다.

발전을 거듭한 조선의 조총

노 국방대 교수는 조선의 조총은 일본의 것도, 명나라의 것도 아닌 독창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아무래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해로로 들어온 남방계 총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경우 터키를 통해 육로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조총을 다 보았고, 정확도 면에서 좀 더 우수한 일본식 총을 우선 선택합니다. 일본 조총은 사냥에 특화된 조총이었거든요.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개발 시도를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엔 항왜(항복한 왜군)를 통해 기술을 발전시켰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교역 시기에는 조총을 수입하기도 했다고 노 교수는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 개량도 이루어지는데 효종 때에 외국 신식 조총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을 통해 획득한 조총을 참고로 신형 조총을 시험 생산했다는 것. 노 교수는 "17세기 초중반 동방 항해에 나선 네덜란드 선원들은 사실 전투병이자 선원이었고, 총기도 능숙하게 다뤘다"며 "1627년 조선에 표류한 뒤 귀화한 박연의 경우 병자호란에 참전하고 홍이포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총은 서구의 총에서 보이는 특징인 장전 속도를 높이고, 장전 도구를 개량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노 교수는 인조가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만인의 조총을 생산하도록 지시한 기록도 문헌에 나온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대한제국 시기 화승총.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대한제국 시기 화승총.

우수한 사격술로 위력 과시

조선 조총부대의 사격술이 동아시아 최고라는 기록이 많다.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12월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 제2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조총병의 뛰어난 사격술에 혼쭐이 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명을 치기 위해 조총병 파병을 요구했다. 1637년 중국 랴오닝성 금주 전투에 유림 장군이 지휘하는 조총병 1500명이 파견됐다. 유림 장군의 조총병은 7개월 동안 5만 개의 탄환 사용하면서 활약했다. 청은 1658년(효종 9년) 또 조총병 파병을 요구했다. 이른바 나선정벌이다. 러시아로 출병하는 조선군은 최정예 사수 20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모두 특등 사수로 60보 거리에서 폭 10cm에 불과한 표적을 맞힌 다음에야 선발될 수 있었다.

조선 조총병의 활약으로 러시아군의 남하는 저지됐다. 함경북도 병마우후 신유의 북정일기에는 조선군의 활약상이 잘 기록돼 있다. 조선 조총병은 임란 이후 60년도 안 돼 동아시아 최고의 사격술을 갖게 됐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다.

훈련도감을 통해 직업군인화한 조선군은 그에 맞는 실력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훈련서도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 후인 1603년(선조 36년) 선조의 명에 의해 한효순이 '신기비결'이라는 화약무기 전용 병서를 저술한 것. 신기비결은 각종 총통의 자세한 제원과 발사에 필요한 기구는 물론 사격 방법과 자세, 장전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병서를 바탕으로 정예화된 조총병은 동아시아 최고의 특등사수로 발돋움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서양식 대포인 운현궁 화포.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1874년(고종 11년) 제작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서양식 대포인 운현궁 화포.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1874년(고종 11년) 제작됐다.

병자호란과 조총 중심 군사 체계

인조반정 이후인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다. 정묘호란이다. 전쟁 발발 두달 만에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는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년 난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느라 북방의 전력이 대폭 약화된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전란 이후 조선은 조총병 양성에 매진한다. 수성 위주의 방어 전략에서 화포와 조총병은 효용성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9년 뒤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채택했던 수성 중심의 방어 전략은 신무기인 서양식 대형 화포로 무장한 후금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다만 병자호란 여러 전투 경험을 통해 조선은 조총이 활보다 더 유용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노 교수는 설명했다.

"인조 17년 어영군의 번상 군사는 포수와 사수가 각각 절반씩이었는데 사수를 전원 포수로 전환하는 것을 모색합니다. 아예 살수는 폐지하고요." 노 교수는 총융청의 포수는 5400여 명이었는데 훈련도감에서 800정, 총융청에서 조총 300정을 제조해 포수의 충실화를 시도할 만큼 인조는 포수 양성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인조 26년에는 함경 감영의 군병 중에서 장관이 거느린 병사의 절반인 4000명이 포수였을 만큼 포수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정묘호란 당시 지방군은 포수의 비중이 20% 정도였으나 불과 20여 년 만에 병종 구성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라고 노 교수는 분석했다.

임진왜란 때인 16세기 말 조총이 도입된 이후 조선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화기 부대만으로 기병을 저지할 정도로 조총병 중심으로 편제됐다.


대곡사명 감로왕도(부분)에 등장하는 조총병. 대곡사명 감로왕도(부분)에 등장하는 조총병.

화약무기가 이끈 조선사회 변화

화약무기 중심의 조선 사회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도 경험한다. 선조의 명으로 만들기 시작한 조총과 훈련도감의 설치는 조선의 경제적 변화도 야기했다.

노 교수는 훈련도감이 시장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총 등을 만들며 철과 석탄, 유황 등을 대량생산해야 했기에 광업의 발전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훈련도감에 납품하기 위해 전국에 화약제조공장이 생기고, 조총에 쓰일 납탄을 만들기 위해 납 광산도 개발하는 등 공업과 광업에도 엄청난 변화를 끼쳤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집권세력의 권력 기반이었고, 왕궁 순시와 도성 방어, 순찰, 지방군 훈련 등을 담당한 직업군인 제도는 그 자체가 엄청난 경제 체제였다. 조선 숙종 때는 5000명의 상비군이 유지될 정도였는데 지금의 남대문시장(칠패시장)은 훈련도감 군인들이 수익을 위해 만든 시장이다. 훈련도감 군인 가족들이 종로 시전상인들과 대항하는 난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총이 화폐 중심의 경제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렇듯 조총은 단순한 군사 무기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변화의 견인체였다.

불교의 감로왕도에도 조총이 등장하기도 했다. 감로왕도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음식 공양을 묘사한 불화로 중생 구제의 염원을 담았다. 17세기 보석사 감로왕도와 18세기 중엽 대곡사명 감로왕도의 전쟁 장면에는 조총병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19세기 이르러 오군영에만 조총 4만 4000정이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울과 함경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10만 정이 넘는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총이 넘쳐나자 민간 시장 좌판에서도 조총이 거래되기도 했다.

물론 조총은 한계도 명확했다. 동북아 평화 시기가 도래하면서 전쟁이 빈번한 서양의 총포류에 비해 그 발달이 더뎠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외침이 거의 없었던 17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조총은 그렇게 300년 동안 조선을 지켰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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