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꿈에 나타난 독수리, 헝가리 건국 이끌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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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헝가리] 부다 성의 독수리 투룰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내려다보는 부다 지구에는 왕궁이 서 있다. 왕중 정문에는 아주 인상적인 조각상이 보인다. 거대한 독수리 조각상이다. 헝가리에서는 이 독수리를 ‘투룰’이라고 부른다. 이곳뿐 아니라 헝가리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대형 독수리 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헝가리의 투룰 신화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부다 성의 투룰 부다 성의 투룰

■훈노르와 마자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수천 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시아에 작은 왕국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큰 산맥이 가로막혔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놓인 곳이었다. 북쪽의 산맥 사이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 물을 공급했다. 모든 것이 풍족했던 왕국이었다.

어느 날 왕국에 큰 홍수가 났다. 물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왕국에 살던 사람들은 새 땅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왕국을 다스리던 님로드는 큰 건물을 지어 새 도시를 세웠다. 웅장한 피라미드도 건설했다. 앞으로 홍수가 나지 않게 해달라며 신에게 바치는 신전이었다. 그는 대단한 전사였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영토를 북쪽과 동쪽으로 넓혔다. 그때마다 백성을 이주시켜 새 영토에서 살게 했다.

님로드는 왕비 에네스에게서 두 아들 훈노르, 마조르를 얻었다. 그는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냥을 갈 때는 늘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두 아들과 함께 사냥을 나간 님로드는 굉장한 사냥감을 발견했다.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큰 뿔을 가진 거대한 흰 사슴이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놈을 놓치지 마라.”


훈노르와 마조르의 흰 사슴 사냥. 훈노르와 마조르의 흰 사슴 사냥.

훈노르와 마조르는 당장 사슴을 쫓아갔다. 사슴은 황야를 거쳐 초원을 지나 서쪽으로 달아났다. 황혼이 질 무렵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두 왕자는 풀밭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다시 사슴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사슴이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두 왕자는 또 추격전을 벌였다. 사슴은 낯선 땅을 지나더니 아젬 산맥을 넘었다. 메티오스의 거친 습지도 지나갔다. 나중에는 아름답고 비옥한 땅에 들어갔다. 그리고 호수로 뛰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훈노르와 마조르가 간 곳은 세 방향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한쪽은 습지인 곳이었다. 그 너머에는 큰 땅이 펼쳐져 있었다. 새와 물고기 외에 각종 사냥감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습지가 가로막고 있어 건너가기는 힘들었다. 두 형제는 사슴을 놓쳐 화가 났지만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둘은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사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사원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님로드는 두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원을 건설했다. 훈노르와 마조르는 그곳에 머물면서 5년 동안 명상을 하고 공부를 했다. 둘이 사원에 들어간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위대한 스승이 그들을 찾아왔다. 둘은 스승에게서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어느 날 훈노르와 마조르는 사슴이 사라진 지역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새벽 무렵 이상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둘은 소리를 따라 갔다. 숲에서 두 여인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사슴에게 바치는 뿔의 축제를 벌이던 중이었다. 두 여인은 인근 지역을 다스리던 왕 둘라의 딸이었다.

훈노르와 마조르는 두 여인과 결혼했다. 아버지의 나라에는 돌아가지 않고 사슴이 사라진 호수 인근에 집을 지어 정착했다. 그들의 후손은 오랫동안 번창했다. 나중에는 스키타이의 108개 부족을 이루게 됐다. ‘108’은 불교에서 아주 신성한 숫자였다. 스키타이 부족은 불교를 믿고 있었다.


■에메세와 투룰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다. 마곡 왕이 스키타이의 여러 부족을 다스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손자다. 그가 왜 훈노르와 마조르가 정착한 스키타이를 다스리게 됐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마곡의 후손 중에 이기에크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신하의 딸인 에메세와 결혼했다.

에메세는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새가 날아오더니 몸 안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분수가 자궁에서 솟아올라 서쪽으로 흘렀다. 물살은 점점 더 커졌고 나중에는 큰 강이 됐다. 강은 산을 덮고 있던 눈을 녹여 아름다운 저지대로 흘러갔다. 저지대에서 황금 가지를 가진 신기한 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헝가리의 투룰. 헝가리의 투룰.

에메세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처음 보는 낯선 곳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를 가졌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독수리 투룰의 정령이 왕비에게 아들을 잉태하게 해 주었다.”

에메세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아기에게 알모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헝가리어로 알모스는 ‘꿈꾸는 자’라는 뜻이다. 알모스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쾌활하고 친절했으며, 지혜가 흘러넘치는 젊은이가 됐다. 사자처럼 날씬하고 나무처럼 컸으며, 전쟁에서는 매우 용감하고 대담한 전사였다.

알모스는 스키타이 여러 부족의 지도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그는 유명한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아들에게 아르파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르파드와 헝가리 건국


아르파드가 성인이 됐을 때 스키타이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의 인구는 크게 늘어난 상태였다. 농사를 지을 땅이 모자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힘들어질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카서스 산맥 쪽에서 난민이 밀려들었다.

‘스키타이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새로운 땅을 찾아 새 나라를 열어야 해.’

아르파드는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문을 들은 일곱 부족 족장이 그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마자르, 카리, 카시, 제노, 쿠르트 지아마트, 니에크, 타르얀 족이었다. 일곱 부족장은 낯선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지도자 아래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르파드를 지도자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당신을 왕으로 모실 것입니다. 당신이 이끄는 길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것입니다.”

일곱 족장은 아르파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새 연맹체에 헌신을 다짐하는 서약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뽑아 항아리에 담았다.

“왕에게 피의 맹세를 바칩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아르파드 왕과 왕의 후손이 이끄는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왕에게 불충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자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올 것입니다. 누구라도 맹세를 어긴다면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의 아르파드와 일곱 부족장 조각상.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의 아르파드와 일곱 부족장 조각상.

아르파드는 여유를 갖고 오랫동안 철저하고 꼼꼼하게 긴 여행을 준비했다. 모든 게 만족스럽게 갖춰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스키타이를 떠났다. 나중에 헝가리 사람들은 일곱 부족이 떠난 고향을 ‘헤투마자르’라고 불렀다. 페르시아의 옛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교리를 담은 책인 <젠드 아베스타>에는 ‘해투마트라는 곳이 페르시아 서쪽 사카스탄에 있었다’라고 돼 있다. 사카스탄은 스키티아를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아르파드 일행은 여러 강 사이에 놓여 있는 땅으로 이주했다. 옛 헝가리어로는 아틸-코즈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아틸은 ‘큰 강’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7년 동안 살았다.

아르파드는 아틸-코즈를 최종 정착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더 나은 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늘 주변 지역을 물색하고 다녔다.

드디어 오래 전부터 신이 약속한 날이 찾아왔다. 그때는 896년이었다. 아틸-코즈에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오래 전 아르파드의 할머니인 에메세의 꿈에 나타났던 투룰이었다. 아르파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투룰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새는 아름다운 검 한 자루를 입에 문 채 천천히 하늘을 날았다.

투룰은 신의 계시를 받을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르파드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아래로 내려와 아르파드의 얼굴 옆을 스치듯 지나가기도 했다. 투룰은 갑자기 큰 울음소리를 내더니 아르파드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가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마치 따라오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다.

아르파드는 말을 타고 투룰을 따라갔다. 한참동안 날아가던 새는 아르파드가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낯선 땅에서 물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아르파드의 머리를 빙빙 돌면서 크게 울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르파드는 새가 검을 버린 땅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가운데로 큰 강이 흐르고 있고, 한쪽에는 높은 언덕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틸-코즈로 돌아간 아르파드는 일곱 부족장에게 투룰이 인도해준 땅과 할머니 에메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독수리가 나타나 할머니 몸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나타난 독수리가 바로 그 새입니다. 투룰이 그곳에 검을 떨어뜨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땅을 영토로 삼으라는 할머니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로 이주해서 영원한 번영을 누리도록 합시다.”


부다 성 정문에 세워진 투룰 조각상. 부다 성 정문에 세워진 투룰 조각상.

아르파드는 투룰이 안내한 땅으로 일곱 부족을 데리고 가 나라를 세웠다. 그는 싸움도 잘 했지만 능력 있는 외교 협상가이기도 했다. 주변에 있던 여러 부족과 싸우거나 동맹을 맺어 세력을 키웠다. 뒤늦게 서쪽에서 따라온 스키타이의 친척 부족도 흔쾌히 받아들여 인구를 늘렸다.

아르파드와 일곱 부족이 정착한 곳은 바로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였다. 헝가리 사람들은 아르파드가 정착한 896년을 헝가리 건국 원년이라고 믿는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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