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잊다/이기록(1975~ )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주빛 모란 안에 들어가
온몸을 밤새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 문예지 〈사이펀〉(2018 여름호) 중에서
잊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겹친 얼굴을 오래 앓’는 일일까. 잊는 일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온다고 시인이 말할 때 사기 그릇 찻잔에 오래도록 금이 가는 듯 한 아름다운 시가 세상에 나온다. 연일 폭염으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바람 부는 여름밤 테라스에 앉아 이 시를 읽으니, 지금도 젊은 얼굴을 한 옛 일들이 떠오른다. 사금파리로 땅에 금을 그어보며, 잊어야 할 일들, 후회하는 일들을 오래 생각해보던 시간은 언제였던가. 나라 밖 전쟁과 전쟁위기 고조, 국내의 여러 가지 정치 경제 문제들로 어수선하지만, 가끔씩은 시를 읽는 시간도 필요하다. 인생에 잊는 일과 후회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윤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