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을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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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유성룡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 기록 이유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판단하는 것”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성찰적 기록이다. 이 책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원문을 번역하고 긴 해설을 붙인 것이다. 원문은 권1, 권2, 녹후잡기(錄後雜記)로 구성돼 있는데 〈징비록〉은 전란 전야 대일관계에서부터 일본군 퇴각과 노량해전까지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세세히 적어놨다.


대중적 관심사에서 보면 〈징비록〉의 주인공은 이순신이다. 그것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1등 공신이 이순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징비록〉이 이순신의 전공을 시시콜콜 다 적은 것은 아니다. 1592년 임진년의 경우, 여러 해전 중 한산도대첩만 써놨다. 그것은 한산에서의 승리가 조선 중흥을 이루게 했으며, 명군이 조선을 도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명랑해전도 마찬가지다. 정유재란으로 숨통이 넘어가기 직전의 조선을 구한 해전이 명량해전이다. 임란의 모든 전공이 이순신에게만 돌아간다고 할 수는 없으나 위기의 조선을 결정적 순간에 두 번 구한 것이 이순신이었다.

〈징비록〉은 권2 본문의 마지막 장을 할애해 ‘이순신의 인품’에 대해서 적고 있다. ‘이순신은 재주가 있었으나 명운이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 아 애석한 일이다.’ 이순신의 역할과 공로는 〈징비록〉을 통해서 더욱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던 거다.

〈징비록〉의 두 번째 주인공은 의병이다. 의병은 관군이 패퇴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경상우도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전라도에서 고경명 최경회 등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영남에서 홍의장군 곽재우가 봉기한 것이 임진년 4월 22일이었다. 임란이 발발한 일주일 뒤였다. 〈징비록〉의 세 번째 주인공은 명나라다. 명은 조선을 구하러 와서, 짐짓 거드름을 피웠다. 일본군과 싸워 이기면 저들의 전공으로 삼았고, 싸워서 지면 조선을 탓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오래도록 지루하게 끈 것이 강화협상이었다. 4년이나 끌었던 그 강화협상도 거짓과 조작이 개입돼 파탄났으며 결국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한·중·일이 모두 참여한 동아시아 세계의 대전이었다. 임란 이후 일본의 정권이 바뀌었고, 명나라가 멸망했다. 조선이 살아남았던 것이 아주 특이했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이 〈징비록〉을 읽는 이유의 하나이겠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다. 역사를 쓰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판단하는 것으로, 요컨대 현재를 판단하는 거라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 쓰기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썼던 것은 그 때문이고, 지금 〈징비록〉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옮긴 이는 유네스코의 등재기준에 부합한다며 초본 〈징비록〉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제언을 하고 있다. 〈징비록〉은 동아시아 세계 대전으로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가져왔던 임란에 대한 빼어난 기록이자 체계적 기록이다. 유성룡 지음/장준호 번역 해설/아르테/368쪽/2만 4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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