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의 월드 클래스] 신경극정치
정치부 기자
1936년 12월. 중국 국민당 동북군의 수장 장쉐량은 공산당 홍군과의 불필요한 소모전에 지쳐 있었다. 주적은 일본인데 총통 장제스가 홍군 토벌에만 몰두했기 때문. 결국 장쉐량은 장제스를 납치하는 반란을 감행한다. 그러나 더는 내전이 없다는 점만 확인하고는 장제스를 풀어줬다. 장제스가 난징으로 무사 복귀하도록 비행기를 제공하고, 본인도 함께 가서 반란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장제스도 작은 보답을 하듯 군사법정의 선고(10년 금고형)를 뒤엎고 장쉐량을 가택연금했다. 앞서 반란군이 요구했던 공산당과의 항일 연합전선도 수용했다.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에드거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에는 이 ‘시안 사건’을 흥미진진한 ‘가짜놀음’으로 표현한다. 소름 끼치는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칼로 허공을 베지만 정작 서로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경극무대에서 벌이는 두 무사의 결투로 봤다. 그러면서 “모두가 승리를 거두고 오로지 역사만이 기만당했다”고 평가했다.
장쉐량과 장제스의 노련한 ‘경극정치’가 서로의 체면과 대의명분을 손상하지 않는 동시에 ‘국공합작’이라는 역사적 결과물까지 빚어낸 셈이다.
오늘날 ‘양안 갈등’을 보면 중국의 경극정치가 다시 떠오른다. 이달 초 미국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분쟁을 겪는 대만을 찾자 중국은 소위 ‘칼춤’을 췄다. 대만 포위 훈련을 벌이고 전투기의 대만해협 중간선 침범을 ‘뉴노멀’로 만들며 으름장을 놨다.
거기까지였다. 실제 군사적 충돌을 빚을 ‘임계점’은 넘지 않았다. 군사·경제적 위세를 떨치는 수준에서 대국의 자존심을 지키고 궁극적 목표인 반미 세력의 규합을 진전시킬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을 위한 내부 결속을 다지겠다는 의중도 엿보였다.
그러나 이번 경극은 ‘다른 결말’이 예상된다. 대국의 엄포가 무색하게 펠로시 의장 이후 유럽, 미국, 일본 정치권의 대만행이 줄 잇는다. 반미보다는 ‘칩4’(한국·미국·일본·대만의 반도체 동맹) 등 친미 규합은 오히려 속도를 낸다. 감정적인 대응에 자존심과 반도체 등 기술 패권까지 흠집날 수 있다는 위기론이 나온다. 무력 시위 이면의 대미 정치력·협상력이 아쉽다.
현재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 위반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이 이미 원칙 지지 의사를 밝힌 데다 인플레이션, 우크라 전쟁 등 국제적 위기 속 오로지 ‘중국만을 위한 명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G2’의 한 축으로 글로벌 무대에 올라 있다. 과거와 달리 자국 내 정치적 승리, 체면 지키기 이상의 리더십을 요구받는다. 대국다운 명분을 가지고 벌이는 ‘신경극정치’를 기대한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