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순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그게 존엄이다”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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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격/케이티 엥겔하트

‘존엄한 죽음의 조건’ 무엇인지 되묻고
존엄사에 대한 찬성·반대 입장 보여 줘

‘내가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은 존엄성을 정확히 괄약근 조절과 동일시했다. 엉덩이를 닦아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만 삶이 존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간단했다. 사람들은 존엄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무언가가 존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때는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우리가 존엄한 죽음을 바라는 순간은 언제일까. 병에서 회복될 가망이 없거나 치매로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을 때가 그런 순간일까. 〈죽음의 격〉은 우리가 마주할 ‘존엄한 죽음이 보장된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존엄하게 죽고 싶다고 부르짖는 사람들과 존엄사법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 존엄사가 인권의 보장인지 침해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판사, 윤리와 신념의 문제로 존엄사를 거부하는 의사,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존엄사를 진행하고 지지하는 의사 등 각각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1940년대부터 존엄사가 합법인 스위스, 가장 포괄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 1994년 세계 최초로 존엄사법을 통과시킨 미국 등에서 있었던 죽음과 존엄에 관한 철학적·제도적·법적·윤리적 논의부터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돕는 지하조직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존엄과 죽음에 얽힌 논쟁과 활동을 엮어낸다.

‘어떤 노인이 이런 비참하고 외로운 곳에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죽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 자살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성적 자살은 겉으로는 도덕적 선택처럼 보이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재정적 방치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삶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평온한 죽음을 바라지만 존엄사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네 명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존엄사법이라는 제도의 안과 밖에서 평온한 죽음을 돕는 두 명의 의사를 직접 만난다. 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존엄한 죽음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존엄’이라 부르는지 되묻는다.

저자 케이티 엥겔하트는 존엄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죽음의 시간’을 공동 제작해 프래그먼츠 영화제에서 ‘최고 장편상’을 수상한 언론인. 집필을 위해 6년을 취재하며 공을 들였다.

저자는 존엄한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정의한 나 자신’으로 살길 원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모든 순간에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도 올 6월 일명 ‘의사 조력 존엄사법’이 발의됐다. 법안에 대한 찬반 논란은 첨예하다. 자살을 방조하는 간접 살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생명경시 풍조에 따른 자살률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 책은 존엄사 찬성과 반대 입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존엄한 죽음에 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케이티 엥겔하트 지음/소슬기 옮김/은행나무/528쪽/2만 원.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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