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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계묘년 정치, 뭣이 중헌디?
‘국궁진췌 사이후이(麴窮盡膵 死而後已).’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며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는 의미다. 속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비장한 결심이 담긴 표현이다. 이는 228년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 제갈공명이 두 번째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유비의 아들인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후출사표’에 나온다.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문장이다.
이 문구를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 사용했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은 1956년 쑨원 탄생 90돌을 기념해 중국을 개조하고 변화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쑨원을 “진정으로 ‘국궁진췌 사이후이’에 충실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평생 간직한 좌우명으로도 유명하다. 1989년 덩샤오핑 전 주석이 은퇴 선언 후 권력 이양을 시작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된 장쩌민 전 주석은 같은 말로 다짐해 신임을 얻기도 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지금, 한국 정치에도 유효하다.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정신 자세이자 시급한 업무 태도지 싶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몹시 힘들었던 지난해보다 어려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여 국민 생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한 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경제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가 여야 정치권에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은행(WB)은 이달 10일 올 세계 경제성장률이 1.7%에 그친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작년 6월 전망한 3.0%보다 1.3%포인트나 낮췄다. 글로벌 경제가 성장 둔화로 극심한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1.7% 성장률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수출로 먹고살 만큼 세계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받아 휘청거릴 우려가 크다. 최근 정부와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모두 올해 수출 부진과 내수 경기 둔화 탓에 1.6~1.8%의 저성장을 예측한 게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에 따른 고통은 오롯이 국민 몫이다. 이미 직장인과 자영업자 등 대부분 서민은 소득이 변함없거나 감소한 반면 물가와 금리는 계속 치솟아 정말로 살기 팍팍하다며 아우성이다. 저소득층은 생활고에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더욱이 연초부터 전기료가 대폭 올라 가계 부담이 커졌다. 시내버스와 택시, 도시철도 등 대중교통 요금과 각종 보험료마저 줄줄이 인상될 조짐을 보인다. 혹독한 민생경제 한파 속에 예년에 비해 일찍 다가온 설 명절을 쇨 엄두가 안 난다는 사람이 숱하다. 이러다가 자칫 민생이 도탄에 빠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 경제과 국민의 삶이 녹록지 않는데도 실효적인 처방이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와 민생을 위한 정치가 사실상 실종된 까닭이다. 집권당과 거대 야당이 엄중하고 위급한 경제난과 민생고는 뒷전인 채 허구한 날 이념이나 당리당략을 앞세워 대립한다. 사사건건 충돌하며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은커녕 정치 혐오감과 불신을 안긴다. 가뜩이나 힘겨운 국민의 피로감을 가중시킨다. 여야 간 일상화한 정쟁은 마치 집토끼와 산토끼가 하늘땅에 온갖 천적이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먹이에 눈멀어 무방비 상태로 다투는 꼴이다. 그 결과가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무장력 강화 움직임, 중국의 한국인 단기비자 발급 중단일 테다. 여야는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을 두고도 대책 마련 대신 전·현 정권의 책임 공방만 일삼아 북측의 분열 책략에 놀아나는 모양새다. 여야가 그동안 정쟁에 낭비한 열정과 시간의 절반이라도 경제 활성화와 국민 고충 해소에 쏟았더라면 복합적으로 닥친 위기 중 일부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여야가 정쟁을 멈추고 여러 현안 해결에 머리를 맞대 몰두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명운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모든 역량을 모아 협치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여야는 신년 벽두부터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받들기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탄’으로 바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벌써부터 관심이 내년 4·10 총선으로 쏠리고 있다. 여야가 최우선적으로 좇아야 할 대상은 양측의 강성 지지층을 뺀 국민 다수의 민심이다. 2016년 영화 ‘곡성’을 통해 사회의 유행어가 됐던 명대사를 인용해 여야의 행태에 대해 “도대체 뭣이 중헌디?”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정치권이 ‘국궁진췌 사이후이’ 실천을 위해 경쟁하기 바란다. 지독한 어려움이 예견된 올해,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느 당이든 민의의 심판을 받기 십상이란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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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15분 도시' 정책과 민관 협치의 결합 필요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행복도시 부산.’ 박형준 부산시장이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내건 시정 구호다. 박 시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15분 도시’ 조성을 1호 공약으로 제시한 데 이어 민선 8기 시정의 3대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삼고 있다. ‘15분 생활권’ 환경을 구축해 시민들이 편리하고 행복하도록 할 목적에서다.
최근 15분 도시 조성을 위한 내년도 주요 사업이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시의회가 상임위원회별로 사상 최대인 15조 3480억 원 규모로 편성된 2023년 부산시 예산안을 심사하면서 15분 도시 관련 사업 예산을 줄줄이 삭감한 것이다. 지난달 29일 시의회 기획재경위는 15분 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41곳에 어린이 복합문화공간 ‘들락날락’을 개소하려는 예산 200억 원 중 무려 15%인 30억 원을 깎았다. 건설교통위도 15분 생활권 정책공모 사업비 212억 8200만 원 가운데 30억 원을 줄였다. ‘걸으면서 행복한 15분 도시’를 위한 차 없는 거리 만들기의 경우 전체의 86%나 되는 18억 원이 줄어든 3억 원만 반영됐다.
내년도 예산안은 7일 시의회 예산결산특위의 심사와 의결 후 8일 열리는 본회의에서 확정된다. 대폭 깎인 예산이 계수조정을 통해 증액되지 않은 채 최종 처리된다면 박 시장의 대표 공약 사업은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는 올해 시행 2년 차에 접어든 15분 도시 사업이 적극적인 시민 의견 수렴보다는 보여 주기식 탁상행정에 치중한 결과로 보인다. 사업의 구체성이나 시급성이 떨어지고 다른 사업과 중복된다는 시의회의 지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사업성이 부족하고 성과도 미흡하며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점도 시의회가 내세운 예산 삭감의 이유다. 오죽하면 박 시장과 같은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시장의 핵심 공약 사업 예산안을 단호하게 칼질했을까 싶다.
이같이 냉엄한 질타를 받는 행정으로는 살고 싶은 도시는커녕 세부적인 15분 생활권 구현조차 요원할 뿐이다. 이들 사업은 시민 삶의 질과 생활 편의와 직결된 정책이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바람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추진돼서는 안 된다. 행정기관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강행 역시 곤란할 테다.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요구와 의견을 잘 반영하는 맞춤형 시정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시민 제안을 받는 등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업 의제를 발굴한 뒤 숙의 과정을 거쳐 내실과 실효성 있는 사업계획을 세우는 부단한 노력이 간절하다.
이런 까닭에 부산시가 2019년 7월 관련 조례까지 제정하며 도입한 민관 협치 제도가 박 시장 임기 들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시와 시민들이 연대해 지역발전 정책 마련과 각종 문제 해결에 머리를 맞대기로 한 민관 협치가 시정 구호와 15분 도시 정책 실천에 매우 유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 시장은 민관 협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데다 협치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도 부족해 보여 아쉽기만 하다.
시와 박 시장의 민관 협치에 대한 미온적인 모습은 지난 8월 단행된 조직 개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민관 협치 사업을 담당해 온 협치정책과를 총무과 내 협치조정팀으로 축소하고 담당 인력을 줄였다. 협치정책과가 맡은 업무들은 총무과와 자치분권과, 예산담당관실 등으로 분산했다. 민관 협치 사업의 컨트롤타워를 없애 버린 셈이다. 기능이 약화된 조직과 인력으로는 ‘부산시 민관 협치 활성화를 위한 조례’에 걸맞는 제도 활성화와 1차 협치 활성화 기본계획(2022~24년)상의 수많은 사업 전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 시장은 2019년 9월 시와 시의회·시민단체 관계자, 학계 전문가, 시민활동가 등 29명으로 발족한 부산시민협치협의회의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지만, 정기 회의(연 4회) 개최와 참석에 등한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민관 협치가 더불어민주당 출신 전임 시장의 작품이라 그럴 것”이란 추측성 뒷말도 나오는 실정이다.
당초 민관 협치는 복잡다단한 세태에 따라 급변하고 다변화해 행정력만으론 풀기 어려워진 지역과 시민사회의 과제들을 시민 참여와 민간과의 협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건의를 시가 수용해 만든 새로운 협력 모델이다. 정당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정착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요청하는 제도라고 하겠다. 시의 15분 도시 정책이 활기를 띠고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민관 협치 제도와 결합하는 게 효과적이다. 더욱이 민관 협치 활성화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인 지방자치제 안착에 필수적인 시민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절실한 일이다. 여기에 시와 시장의 인식 전환과 태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2022-12-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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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청산해야 할 정쟁·막말 국감
여야 간 정쟁이 심각하다. 지난 4일 시작돼 막바지에 이른 국회 국정감사를 지켜보고 있으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국감이 정쟁만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을 보여서다.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논의가 펼쳐지길 원하는 국민의 바람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 책임 방기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올 국감은 21대 국회의 후반기 원 구성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맞이한 국감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야가 그 어느 때 국감보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알차게 진행해야 할 당위성이 컸다. 국감의 근본적인 목적도 정부의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입법부의 감시와 대안 제시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물가·고환율·고금리에 저성장까지 겹친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과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 핵 위협으로 경제·안보 상황이 위중해진 시기다. 국가적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키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 실속을 찾는 정책 국감이 요구됐다.
한편으로는 국감에서 여야의 힘겨루기가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정권 교체로 입장이 뒤바뀐 여야가 그동안 보여 준 ‘네 탓’ 공방이 국감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던 게다. 국민의힘은 전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과오를 찾아내 질타하기에 열을 올렸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무능과 윤 대통령 주변에서 불거진 의혹에 대한 공세로 맞서 왔다.
기대는 무너지고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국감장은 본연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여야가 상호 비방을 되풀이하며 극명하게 대치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싸움터로 변질됐다. 총알만 없을 뿐 혈투가 난무하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모양새다. 18일 국회 법제사법·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선 여야의 난타전이 절정에 달했다. 이날 민주당 이 대표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의혹을 두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감사가 중단됐다. 다른 상임위별 국감에서도 당리당략이나 감정을 앞세운 감사 보이콧과 중단, 정회, 퇴장 등 파행이 잦아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쟁 국감 과정에서 막말과 반말이 빠지지 않아 여야 대립을 격화한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한마디로 맛이 갔던지 제정신이 아니다”, “개나 줘버려”, “버르장머리 없다”, “너나 잘하라” 등등. 예의나 품위와 너무나 동떨어진 저질 표현이다. 이런 발언은 으레 치졸한 트집 잡기로 이어져 소모적인 말다툼이 지속된다. 꼬리에 꼬리를 문 언쟁으로 사태 봉합은커녕 폭언과 인신공격의 수위가 한층 높아지기 마련이다. 고함, 호통, 으름장, 삿대질도 동원되기 일쑤여서 여야 간 증오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결국 이번 국감에서 국민의힘은 민주당 이 대표를 포함한 야당 의원 4명을, 민주당은 정진석·권성동 등 여당 의원 3명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다. 서로 독기 서린 말로 물어뜯는 데 혈안이 된 이전투구의 결과다. 게다가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식이라 몰염치하기도 하다. 이같이 충돌과 파행이 거듭되는 동안 민생과 경제 문제를 다루는 정책 질의는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국감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빵점짜리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정쟁에 골몰하고 알맹이는 없는 국감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거나 “신물 난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맹탕 국감’이란 비판과 함께 국감 무용론마저 제기될 정도다. 정치를 둘러싼 국민의 불신과 혐오, 무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27년 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서 ‘4류’로 지적받은 정치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1996년에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정쟁을 ‘코미디’라고 빗댔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여야의 거대 양당은 각종 선거, 정기회, 임시회에서도 시종일관 철천지원수처럼 사활을 걸고 싸우는 경우가 다반사다. 협치의 가능성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양측이 고심 끝에 5년 만에 정권을 바꾼 민심의 준엄한 경고를 벌써 망각한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국민들은 정쟁에 넌더리가 날 지경인 반면 국회의원들은 싸움을 주업으로 착각한 듯싶다. 일부 성실한 의원은 억울하겠으나 시급한 민생 경제의 안정과 국민의 원성조차 뒷전인 국회는 퇴출감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은 늦게나마 국감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내년, 내후년 국감도 정쟁과 막말로 얼룩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에 쏟아야 마땅한 정치적 역량과 시간을 낭비하며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을 안길지 모른다. 별다른 생산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쟁 일변도 정치판의 면모를 일신하기 바란다. 환골탈태가 국민 모두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2022-10-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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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중국의 한국 역사·문화 침탈에 대한 고언
#황하(黃河) 중류 지역을 무대로 한 중국인(한(漢)족)의 첫 왕조는 하(夏)·은(殷)·주(周)다. 가장 앞선 신화시대의 하나라는 비슷하거나 더 오래된 시기에 황하 하류를 포함해 현재의 중국 북부와 만주 지역을 차지한 우리나라 고조선의 제후 부족국이었다. 하·은·주를 다스린 계층은 나중에 중국인들이 동이(東夷)족이라고 부른 우리 한(韓)민족의 선조들이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환국(桓國)과 배달국, 고조선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대륙을 지배하며 중국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부여 출신인 고구려 시조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河北)성에 있었던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해 영역을 넓혔다.
#만주 땅에서 일어나 중국 역사를 장식한 금(金)과 청(淸)은 한국 고대사를 빛낸 고구려·발해의 유민들이 말갈족 후예들과 함께 만든 국가다. 고구려를 구성한 두 축인 한민족과 말갈족은 나라가 망하자 발해를 건국했다. 상당수 발해인은 국운이 기울 때 한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고토에 남아 대를 이어 갔다. 그 자손들은 같이 어울려 살던 말갈족의 후신인 여진족과 뜻을 모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중국 북송(北宋)을 정벌한 뒤 도읍을 연경(베이징)으로 옮겨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장구한 세월 동안 만주에 거주한 고구려·발해 유민의 후손들은 여진족 각 부족이 만주족으로 통합해 세력을 키우자 이들과 합세해 후금(後金)을 개국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明)나라를 무너뜨려 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한반도 대신 만주 잔류의 길을 택한 또 다른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 전자는 1911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내용과 민족 사관을 가진 재야 학자들의 학설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고증하기 어렵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사실이 많다는 이유로 정통 사학계와 논쟁을 빚어 온 사안이다. 후자는 동북아 강대국으로 군림한 고구려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린 발해, 만주를 터전으로 해 중국 본토까지 진출한 금·청나라 정사를 바탕으로 꾸며 본 가상 역사다. 기개가 대단했던 고구려·발해인의 후손들이 옛 북방 영토에 눌러앉아 살면서 실제 겪었을지도 모를 삶의 궤적을 상상해 봤다.
만일 이러한 두 얘기를 한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인정한다면, 중국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중국 정부의 강한 반발은 물론 전체 중국인의 공분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남의 역사를 날조하고 침탈하는 처사라며 맹비난을 퍼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은 극에 달하고 한·중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지 싶다. 중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는 등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가운데 양국 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 사태가 장기화할 수도 있겠다. 둘 중 어느 하나만 한국의 공식 인정이 이뤄지더라도 중국은 강력한 대처를 경고하며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중국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 2002년부터 과거 만주 일대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중국사로 일방 편입시킨 국책사업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역사관이 도를 넘은 탓이다. 고구려·발해사를 고대 중국 지방정부의 역사라고 외치는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부여도 지방정부라며 억지 주장을 펼친다. 중국은 7월 26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에 고구려·발해를 고의로 지운 한국 고대사 연표를 버젓이 전시해 우리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중국 민관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김치와 한복도 자기네 것인 양 공공연히 우기고 있다. 이웃나라 사람들의 뿌리를 부정하고 민족 정체성을 뒤흔드는 역사 찬탈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 말처럼 한국 고유문화 다수가 중국 전통문화에서 비롯됐다면, 그것은 중국 문화가 상고시대에 황하 이북 지역에서 발흥해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한민족의 영향을 받은 방계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실제로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동이족이 꽃피운 요하문명(또는 홍산(紅山)문화)이 2000~4000년 뒤처진 황하문명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유적이 중국 북동부에서 속속 발굴됐다. 중국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한국사 침탈 행보를 멈춰야 한다. 올 한·중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양국이 우호를 증진하며 동반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역사는 치욕이든 자랑거리든 있는 그대로 새기고 알려야 마땅하다. 후대가 교훈 삼아 밝은 새 역사를 써 나가야 해서다. 동서고금의 진리는 형체일 뿐인 국가는 없어질 수 있어도 정신인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 준다. 중국이 앞으로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허구로 점철된 역사를 만들 경우 중국의 미래 세대는 가짜에 오염된 중국사를 배우며 착각에 빠져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2022-09-2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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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역동적인 부산항, 가덕신공항으로 비상해야
‘노인과 바다의 도시’. 초고령화 도시로 쇠락해 가는 부산의 실상을 헤밍웨이가 쓴 명작 소설 ‘노인과 바다’의 제목에 빗댄 자조적인 문구다. 이 표현은 부산경제의 오랜 침체로 지역 청년들이 취업이나 창업을 위해 타지로 떠나는 현상이 심화하면서 세간에 회자한 지 오래다. 부산은 인구 유출과 감소로 제2 도시 위상마저 위태롭다.
부산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체념한 채 가만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으로 더 악화하기 전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노인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면, 바다에서라도 재도약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야 마땅하다. 그 방법으로는 부산에 발달한 수산업의 활성화나 해양관광, 해양레포츠, 해양과학기술, 해양바이오 등 해양 관련 신산업 육성이 있을 테다. 무엇보다 올해로 개항 146주년을 맞은 부산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항구에 기반한 해운·항만·물류산업에서 막대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선진국으로 잘 먹고 잘살듯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부산항이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 언제든지 항만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노력을 집중할 경우 미래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 든든한 밑바탕이 돼서다. 지난해 1년간 부산항에서 처리된 물동량은 2020년에 비해 4% 늘어난 2270만TEU(1TEU는 길이 6m 컨테이너 1개)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물류대란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극복하며 이뤄 낸 성과라 의미가 크다. 게다가 부산항은 부가가치가 높은 환적(중계) 화물 처리량이 싱가포르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물류 허브’ 항만이다. 이는 지역 해운·항만·물류업계 종사자들이 제 역할에 매진한 결과다.
올 들어선 부산항의 경쟁력을 키우는 경사가 잇따라 고무적이다. 다음 달 2일 부산신항 남컨테이너부두 내 6부두 개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인근 5부두 개장 후 신항 추가 개장은 10년 만이다. 연간 220만TEU 처리 능력을 가진 6부두의 3개 선석이 가동됨으로써 국내 선사와 수출입 업체들이 수년째 시달리는 만성적인 물류 적체 현상의 완화가 기대된다. 이 부두는 국내 항만 최초로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무인 안벽 크레인과 자동화 야드크레인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화물 처리 속도를 높이는 등 효율성 제고와 안전사고 예방이 가능해 부산항의 신규 물동량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앞서 24일에는 신항 배후부지(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4만 5608㎡의 대우로직스틱스 컨테이너 공영 장치장이 문을 연다.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하루 3580TEU를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다. 이로써 장치장 포화가 잦은 신항 일대 물류난 해소에 숨통이 트이지 싶다. 특히 다음 달 11~16일 부산항이 다양한 글로벌 물류기업을 파트너로 확보하고 국제물류 네트워크를 강화해 세계의 허브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 기간에 해운대에서 세계 물류인의 대축제인 ‘국제물류협회(FIATA) 세계총회’가 열리는 것. 이 행사를 찾는 145개국 4만여 개 회원 기업을 상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부산항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려 엄청난 물동량 증대로 이어지면 금상첨화일 게다.
부산항 관리·운영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는 부산항의 활황세를 감안해 올 물동량 계획치를 지난해보다 3.5% 증가한 2350만TEU로 잡았다. 환적 물량은 5% 늘어난 1290만TEU다. 부산항의 특장점을 잘 살려 도전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좋겠다. BPA는 각각 내년과 2026년 최첨단 스마트 항만으로 개장 예정인 신항 서컨테이너부두 2-5, 2-6단계 선석 개발도 차질없이 진행해 부산항 경쟁력을 강화할 일이다. 때마침 정부는 최근 BPA를 공기업에서 기타공공기관으로 변경키로 했다. BPA는 독립성 보장에는 미흡하지만, 앞으로 기획재정부 간섭이 줄고 인사와 경영 등에서 자율성이 생기는 만큼 부산항 육성과 연관 산업 지원에 최선을 다하며 책임 경영을 펼쳐야 할 것이다.
역동적인 부산항은 신항 근처에 들어설 가덕신공항으로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다. 육해공이 결합된 복합물류는 세계적인 추세다. 2030부산월드엑스포를 겨냥한 신공항 조기 건설이 추진돼 2029년 24시간 운영되는 국제공항이 개항한다면 항만, 공항, 고속도로·철도망이 긴밀하게 연결된 트라이포트 체계가 구축된다. 글로벌 복합물류와 교통·관광 중심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에 따른 시너지와 경제적 파급효과는 추산하기 힘들 정도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이유다. 부산항이 하루빨리 가덕신공항의 날개를 달아 세계 초일류의 물류 허브로 비상하기를 바란다.
2022-08-2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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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폭염은 불공정한 재난이다
7일은 ‘작은 더위’라고 하는 소서(小暑)다. 무더위가 시작된다는 절기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로는 대서(大暑)를 낀 7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가 꼽힌다. 실제로 이 기간에 불볕더위나 가마솥더위로 표현되는 폭염 현상이 자주 찾아온다. 기상청은 체감온도가 섭씨 33도를 넘는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경우 폭염주의보를, 35도 이상 고온이 이틀 이상 계속되면 폭염경보를 각각 발령한다. 폭염특보 제도는 일사병 같은 폭염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2008년 처음 도입됐다.
부산에서는 지난 2일 오전을 기해 내려진 폭염주의보가 5일까지 나흘째 지속되면서 바깥 활동을 하기에 불편했다. 폭염이 이처럼 빨리 온 것은 이례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밤에는 최저 기온이 25도를 웃도는 열대야 현상이 기승을 부린다. 부산은 4일 새벽 최저 기온이 25.1도로 올해 첫 열대야를 기록한 뒤 이틀째 열대야가 나타났다. 이는 1914년 7월 1일 이후 108년 만에 가장 이른 것이다. 지난해 부산의 첫 열대야는 7월 12일 발생했다. 지금이 과연 초여름이 맞나 싶다.
올해 때 이른 무더위·열대야 기승
불볕더위 빈도·강도 커지는 추세
재해가 소외 계층에 불평등 안겨
저소득층 피해와 고통 더욱 심각
체계적 사회안전망 구축 급선무
국가·사회가 적극적 대응 나서야
전국적으로도 6월 말부터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요 며칠 전국 대부분 지역의 낮 최고 기온이 33도를 넘어서며 폭염특보가 발효됐다. 습도까지 높아 체감온도 35도를 넘기거나 열대야가 생긴 곳이 많았다. 기상청은 올여름 평년보다 기온이 높고, 푹푹 찌는 낮과 후텁지근한 밤이 이어지는 찜통더위가 잦을 것으로 전망한다.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번 여름이 국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2018년의 폭염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엄청나게 무덥진 않을까 걱정된다. 이미 올 폭염은 7월 중순께 폭염이 본격화한 4년 전보다 보름이나 빠르다.
2018년 7월의 폭염일수는 무려 15.4일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근 30년간 7월 평균 폭염일수 3.9일의 4배가량 되는 최악의 폭염 참사였다. 폭염에 따른 온열질환으로 48명이 목숨을 잃은 그해를 포함한 최근 10년간(2012~2021년) 전국 평균 폭염일수는 14.8일이다. 과거 30년 평균 11일에 비해 3.8일 늘어났다. 이 같은 수치들은 폭염의 빈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강도가 세지고 있다는 걸 대변한다. 자연현상인 폭염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 탓에 대형 재난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지난 1일 경남 창녕에서 40대 남성이 폭염주의보 속에 농산물 작업을 하다 숨지는 등 7월 들어 3명이 온열질환 증세로 사망했다. 안타까운 폭염 피해 소식이 들릴 때마다 자연재해의 불공정한 모습이 연상된다. 기후변화로 잦아진 폭염을 비롯한 각종 재난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목격해서다. 누구든지 다 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위기인데도 유독 저소득층이 큰 피해를 입고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최근의 고물가·고금리 사태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폭염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지면 채소값 등 밥상 물가가 더욱 올라 가뜩이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생활고를 가중시킬 게 분명하다. 예년보다 일찍 무더워지자 지난달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일부 취약계층은 전기요금이 부담스러워 선풍기조차 종일 틀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는 실정이다. 7월부터 전기료마저 인상된 마당에 에어컨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더위에 장사 없다”는 속담도 있는데, 하물며 폭염이 안기는 고초는 오죽하겠는가.
그렇다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기약도 없는 탄소중립 정책이 활발해질 때를 바라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당장 급증하고 있는 온열질환자 최소화 방안 마련과 함께 기상 재해로 직격탄을 맞는 소외 계층을 꼼꼼하게 챙길 수 있는 사회안전망 강화가 급선무다. 자연재해가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심각한 규모로 더 자주 빚어질 것으로 예견되는 만큼 불가항력적인 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공동 대처해야 할 대상으로 접근할 때 재난이 초래하는 불공정·불평등성을 해소할 수 있을 테다.
이달에 민선 8기 지방정부와 제9대 지방의회가 임기에 들어갔다. 양측이 지방자치체 안착을 위한 생활정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충과 비애를 감안한 보다 근원적이고 적극적인 폭염 지원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코로나19로 지역 기초생활수급자가 27개월 만에 30% 가까이 폭증한 현실도 직시할 일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 유례없는 경제 위기와 재난을 극복하는 데 민생 안정을 최우선하는 정책과 협치가 절실하다. 폭염 같은 재난은 개개인이 아닌 국가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체계적이고 철저한 대응체계 구축에 나설 때다. 건강한 사회와 희망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폭염과 경제난에 방치된 가난한 국민을 외면해선 안 된다.
2022-07-0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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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맨홀 뚜껑… 도시 역사 숨 쉬는 안전장치
우리나라 인구의 91.8%가 국토 면적의 16.7%에 불과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27일 국토교통부와 한국국토정보공사가 발표한 ‘2021년 도시계획 현황 통계’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국내 모든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를 먼저 꼽지 싶다.
맨홀(Manhole)도 대표적인 도시 시설물 가운데 하나다. 제대로 된 번듯한 도시라면 모든 시가지에 걸쳐 상·하수도관과 도시가스관, 전기·통신선 등이 복잡하게 매설돼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몰려 살고 있는 도시의 원활한 유지와 편리한 시민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지하 인프라다. 이같이 땅속에 묻힌 숱한 기반 시설의 검사·수리·청소 등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구멍이 바로 맨홀이다. 맨홀은 도시민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각종 시설과 설비가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뻗어 있는 지하 세계와 연결된 통로인 것이다.
지난달 23일 밤부터 장마가 시작된 부산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 잦다. 길을 가다가 쏟아지는 비를 만날 때마다 자연스레 배수 상태를 확인하게 되고, 이어 바닥에 설치된 맨홀 뚜껑으로 눈길이 간다. 사람의 출입이 가능한 정도의 큰 구멍이 길바닥에 뚫려 있으니 추락 같은 안전사고 방지와 만반의 지하 구조물 관리를 위해 평소 덮개로 씌워두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맨홀 뚜껑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다. 뚜껑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이 요철 형태로 새겨져 있다. 미관상의 목적도 있지만, 사람과 차량이 뚜껑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마찰력을 높이려는 기능이 강하다. 맨홀 뚜껑은 비와 눈에도 부식이 적어야 하고 대형 차량의 무게까지 이겨내며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단단한 주철로 제작돼 내구성이 뛰어나다. 뚜껑에는 그 용도와 함께 설치·관리 기관의 휘장과 로고, 제원, 제조업체 명칭 등이 표시돼 있어 쓰임새와 설치 시기를 알려 준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맨홀 뚜껑 자체는 한 도시, 특정 지역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맨홀 뚜껑의 용도는 크게 상수도용, 하수도(오수·우수)용, 전기용, 통신용, 도시가스용으로 나뉜다. 2019년 2월 부산시가 지역 하수 시설 안전관리 차원에서 하수도용 맨홀 뚜껑 정비를 위해 도시정보시스템(UIS)에서 추출한 맨홀만 9만 5216개로 집계됐다. 다른 용처의 맨홀까지 헤아린다면, 부산 시내 전체 맨홀 뚜껑 개수는 몇 배나 늘어나게 된다. 부산의 경우 차도와 보도에서 5~20m 간격으로 각종 맨홀 뚜껑 네댓 개쯤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고로 2016년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에 59만 4000개의 맨홀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업계는 전국에 산재한 맨홀을 대략 150만 개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도처에 흔하게 널린 맨홀 뚜껑은 지하 구조물 형태에 따라 원형과 정사각형, 직사각형으로 제작된 게 많다. 십중팔구는 원형이다. 맨홀 뚜껑이 거의 대부분 둥근 이유는 원은 모든 방향의 지름이 같아 뚜껑이 원형 구멍에 빠질 염려가 없기 때문. 원형 맨홀 뚜껑은 어떤 방향의 폭도 모두 일정하므로 원형 구멍과 같은 뚜껑을 만들면, 뚜껑이 어떻게 놓이든 상관없이 안전하게 걸쳐져 구멍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반면 사각형 뚜껑은 대각선의 길이가 가로·세로에 비해 길어서 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간선도로와 이면도로 등 차도에 쓰이는 맨홀 뚜껑은 원형 제품이 일반적이다. 또 차도용 뚜껑이 자동차의 무거운 하중을 충분히 견디도록 만들어져 보도용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
부산에 깔려 있는 수많은 상수도용과 오수·우수용 맨홀 뚜껑은 ‘부산광역시’라는 문구가 적혀 있거나 부산시 휘장이 디자인된 것 일색이다. 1963~1994년 부산직할시 시절의 뚜껑도 있어 휘장의 변천사와 설치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95년 경남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기장군에서는 ‘기장군’ 단독으로 표기된 뚜껑도 보인다. 상수도 배기·제수변과 소화전, 도시가스 밸브 등 중요 시설 맨홀 뚜껑의 경우 ‘주정차 금지’ 표기가 돼 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차량으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해서다. 이들 맨홀과 일부 전기용 맨홀의 뚜껑에는 주차와 굴착 시 사람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표면이나 주위에 노랑·빨강·파랑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사람들이 늘 밟고 다니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맨홀 뚜껑은 조용히 도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제 역할을 다하며 역사를 써가고 있다. 고철값이 오르거나 경제난으로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절도범의 주요 표적이 되는 아픔도 겪는다. 가끔씩 관리 부실 탓에 뚜껑이 파손되거나 맨홀이 열려 있다가 안타까운 추락사고와 교통사고를 유발하기도 했다. 관할 지자체와 관리 당국의 철저한 관리가 요구되는 이유다.
급변하는 도시에서 오래된 걸 발견하는 즐거움은 각별할 테다. 재개발과 가로 정비사업, 훼손 등 갖가지 사유로 맨홀 뚜껑을 새것으로 교체할 때 옛것을 없애지 않고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 맨홀 뚜껑은 오랜 세월 우리의 발밑에서 안전을 지켜주며 도시의 진화 과정을 담아 온 문화자산인 까닭이다. 혹자들이 “맨홀 뚜껑은 도시의 지문”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요 며칠 동안 부산 16개 구·군 지역을 누비는 발품을 팔아가며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지닌 맨홀 뚜껑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봤다. 이 사진물이 누군가 뜻있는 사람이 부산의 맨홀 뚜껑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글·사진=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상수도용
상수도관과 연결된 맨홀의 뚜껑은 중앙에 한자 ‘물 수(水)’ 자 문양이 새겨진 게 대부분이다. 매우 드물게 ‘상수도’나 ‘수도’가 표기된 뚜껑도 있다. 세부적으로는 일반 소화전, 소방용 소화전(119), 유량계, 배기변(공기와 가스 배출), 공기변(공기 조절), 제수변(물 흐름 차단·조정) 등 용도가 있다. 표면에 ‘주차금지’라고 표기된 뚜껑이 많다. 이는 위급 상황과 수시 점검에 신속하게 대응할 목적에서다.
■오수용
각 가정의 생활하수 등 각종 오폐수가 흐르는 하수관 중에서도 오수관의 맨홀에 설치된 뚜껑마다 ‘오수’라고 표시돼 있다. ‘하수도’로 표기된 뚜껑이 부산에 아직도 있지만, 막상 찾기는 힘들다. 오수 맨홀 뚜껑은 오수관로에서 발생한 악취가 맨홀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 아예 구멍이 없는 게 특징이다. 주택가 이면도로와 골목길에서는 정화조용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수용
도시 여러 곳에 모인 빗물을 흘려보내는 우수관의 맨홀 뚜껑은 빗물이 지하로 잘 빠질 수 있도록 여러 군데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수용 맨홀 뚜껑은 각 제품마다 오수용과 같은 문양의 디자인에 구멍이 곳곳에 나 있는 형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포장길로 뒤덮인 도시에서 지표수의 원활한 배수를 위해 가장 많이 설치된 맨홀 뚜껑이다.
■공공 디자인 적용
인도 등 보행로에 깔린 각종 맨홀 뚜껑 중에는 각양각색의 보도블록과 조화를 이루게끔 디자인된 것도 있다. 도시 미관을 위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부산 중구 광복·중앙동, 동구 범일동, 부산진구 부전동 등 원도심의 일부 특화 거리는 낡고 오래된 맨홀 뚜껑의 교체가 이뤄지면서 용도에 관계없이 모든 뚜껑에 통합된 공공 디자인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부산시가 아닌 관할 기초지자체 이름과 지역 상징물을 새긴 뚜껑을 설치했다. 중구 남포동 비프(BIFF)광장의 부산국제영화제 로고를 적용한 맨홀 뚜껑이 대표적이다.
■전기용
전기용 맨홀은 한국전력공사(한전)가 관리한다. 여러 회선의 전력 케이블이 매설된 전력구 입구나 전기 배선 맨홀에 설치된 뚜껑에는 주로 ‘한전’ 또는 ‘전기’라는 글자가 크고 작은 크기로 새겨져 있다. 회사명 대신에 한전의 심벌마크가 있는 뚜껑 디자인도 많이 볼 수 있다. 교통 신호등 제어 등을 위한 경찰용 전기 맨홀 뚜껑도 거리에서 자주 보인다.
■통신용
도시의 땅속에는 전화선은 물론 인터넷망, 이동통신 중계국을 연결하는 통신선이 많이 묻혀 있다. 대로변에선 KT와 SK텔레콤, LG유플러스 등 국내 이동통신 3사의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KT가 민영화되기 전인 한국통신, 그리고 그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시기의 로고가 새겨진 뚜껑도 많이 남아 있어 국내 통신기업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 공기업으로 출범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모태가 되는 중앙부처인 체신부에서 설치한 맨홀 뚜껑(중앙에 ‘체’나 ‘체신부’로 표기)까지 지금의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신부→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KT 순이다.
■도시가스용
도시가스관이 지나는 지역 가운데 극히 일부 지점에 관리용 밸브가 있는 맨홀이 있다. 이 맨홀의 뚜껑에는 눈에 잘 띄는 노란색 바탕에 주정차를 금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차량의 주정차는 물론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가스 누출과 폭발 위험이 있는 시설에 대한 안전한 관리 때문일 것이다.
■서면 한복판의 부산대 뚜껑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인근 중앙대로변 보도에 부산대 마크가 찍힌 원형 맨홀 뚜껑이 설치돼 있어 궁금증을 일으킨다. 일반인이 육안으로 보면, 설치 시점과 용도를 알 길이 없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현재 부산경찰청이 신호등 관리 등을 위해 사용하는 시설로 알려졌다. 뚜껑 표면이 꽤 닳은 상태여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맨홀 뚜껑 생산업체가 주문량보다 많이 만들어 놓은 제품의 하나가 다른 공사장의 발주 때 끼어 들어가는 바람에 서면에 설치됐을지도 모르겠다.
2022-07-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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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이제는 지경학적 실리 외교 펼칠 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4개월 가까이 됐다. 장기화하는 이 전쟁을 계기로 주목받는 근대 인물이 있다. 영국 지리학자 해퍼드 존 매킨더(1861~1947)다. 그는 지리적 위치가 국제 정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지정학(地政學·Geopolitics)을 개척했다. 유라시아(유럽·아시아) 개념을 창시하기도 했다. 매킨더의 ‘심장지대(Heartland) 이론’이 우크라이나전쟁을 유발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그가 현세로 불려 나온 것이다.
매킨더는 저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에서 심장지대론을 펼쳤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지(동유럽)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 패권을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동유럽, 즉 심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진하려는 서유럽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간 오랜 갈등 끝에 발발한 게 우크라이나전쟁이라고 판단한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소재한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풍부한 광물자원, 세계 3대 곡창지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가스관 밀집 등으로 엄청난 가치를 보유한 국가다. 이 나라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 EU(유럽연합)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는 시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패권적인 러시아가 일으킨 이번 전쟁은 매킨더의 지정학적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는 건 당연할 테다.
우크라이나, 유럽의 격전지로 전락
한반도 역시 장기간 외세에 시달려
한·미·일, 북·중·러 신냉전 구도 형성
평화 구축 위해 슬기로운 대처 필요
‘경제가 곧 안보’ 인식 확산하는 추세
동맹 강화 속 다층적 외교 전개해야
매킨더의 지정학 관점은 한반도에도 적용된다. 예부터 강대한 대륙 세력과 만만치 않은 해양 세력의 간섭에 시달리고 침략도 자주 당했다. 반도 국가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 탓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다’는 ‘새우 콤플렉스’에 늘 짓눌려 지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개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아슬아슬하게 이어 오는 줄타기 외교가 엄연한 현실이어서다. 열악한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도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장점으로 활용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 내 천만다행이다. 1960년대부터 부산항을 기점으로 오대양을 누비며 무역 강국과 선진국으로 거듭나지 않았는가.
이런 가운데 남북 관계는 미·일·중·러 4강에 휘둘리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해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북핵을 반대하는 한·미·일과 북·중·러 진영 간 대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수년 전 시작된 미·중 양국의 세계 패권 경쟁이 촉발한 신냉전 구도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자리 잡은 셈이다. 자칫 한반도가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격전장이 된 우크라이나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한반도에 닥친 신냉전 시대를 잘 헤쳐 나가기 위해 지정학을 넘어선 지경학(地經學·Geoeconomics)적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지경학은 지리적 특성이나 인구가 경제, 특히 대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피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해 유라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물류·경제 중심지로 성장한다는 전략은 지경학적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이에 힘입어 동북아에 남북을 고리로 한 경제공동체가 형성돼 세계 최대의 신성장 지대가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 싶다. 북한의 무력시위에 철저히 대응하되 대화의 노력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지난달 22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새롭게 출범시킨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한국이 동참하게 됐다. 또 나토가 오는 29일 스페인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에 우리나라를 글로벌 파트너 국가로 초청해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안보·외교 연대를 강화하고, 세계 중추국으로서 위상을 높이며 역할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반면 남북 평화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중·러의 반감을 사고 경제 제재가 이어질 우려가 있다.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안보 태세와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지경학적 외교 자세가 요구된다. 지난달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반도체 강국인 한국을 일본보다 먼저 방문해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서둘러 찾은 까닭을 참고할 만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차질에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미·중 기술 패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안보·경제’가 한·미 정상회담의 최고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안보’란 인식의 확산으로 지경학적 접근이 절실해졌다. 윤석열 정부가 다층적 실용 외교로 대처할 때다.
2022-06-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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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민주주의는 어떻게 농락당했나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1919년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 헌법 제1조의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나라 헌법 제1조와 흡사하다. 이는 1948년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바이마르 헌법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이다. 이 헌법은 독일 최초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자유와 인권에 대해 규정하는 등 근대적 헌법의 전형이 돼 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역사학자 벤저민 카터 헷 뉴욕시립대 교수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라는 저서가 있다. 바이마르 헌법에 기초해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독일 민주주의가 왜 무너졌는지를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현실 불만 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의 이기적인 음모가 결합된 민심이 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선출했다고 말한다. 또 히틀러가 무법적이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독일 국민을 불행으로 내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급격히 파괴했다는 게다.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민주적으로 붕괴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히틀러 독재 탓 바이마르 헌법 실종
민주당 전횡에 ‘반민주적’ 비난 쇄도
다수당 힘 과시 편법·꼼수 동원 잦아
‘검수완박’ 입법 추진 강행이 대표적
정권 교체로 이어진 현실 직시해야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 혁신 필요
이같이 뼈아픈 민주주의의 상처는 먼 나라 얘기거나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집권당에 의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촛불 민심에 힘입어 탄생한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이 걸핏하면 절대다수 의석의 위력을 행사하며 안하무인격으로 독주해 온 행태가 그렇다.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워 온갖 편법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능멸한 경우가 여러 차례다.
최근 들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입법화하겠다며 보여 준 무리한 폭주 행보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중대 입법인데도 국민 의견 수렴과 공감대 형성 같은 사전 절차를 묵살했다.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마련한 법안이 허점투성이여서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4월 국회 처리를 강행하려고 들었다. 엄청난 부작용이 예상되는 졸속 법안이라고 지적한 각계의 반발과 반대 여론이 거세져도 의석수만 믿고 입법 추진을 밀어붙이려 한다. 문재인 정권의 각종 비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원천 봉쇄할 속셈으로 의심될 정도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하는 절차적 정의를 짓밟는 반민주적 폭거라는 비난이 무성한 이유다.
급기야 지난 22일 검수완박을 둘러싼 여야 간 충돌을 우려한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이 나오기 직전에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위장 탈당하는 꼼수까지 등장했다. 민주당이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 안건조정위원회의 무소속 몫까지 차지해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낼 목적에서다. 오죽하면 당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범여권인 정의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테러”라고 규탄했을까 싶다.
민주당은 2020년 12월에도 여권인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을 야당 몫 안건조정위원으로 선임하는 방법 등으로 야당의 강한 반대를 뚫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안건조정위는 여야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자는 취지에서 최대 90일의 숙려기간을 두고 도입됐다. 민주당이 이를 입법 독주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는 셈이다. 앞서 2019년 12월 민주당은 공수처법 제정안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시행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회기 끊어 가기 수법으로 제1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강제로 무산시켰다. 특히 2020년 3월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해 스스로 만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때그때 정국에 따라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 모든 처사는 민주주의를 농락한 흑역사로 평가될 만하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민주당이 정작 정치 민주화에 역행해 대의 민주주의를 망치는 4류 수준 정치를 펼친 꼴이다. 당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비민주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9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다음 달 10일 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야당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동안 민의와 동떨어져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내로남불’에 익숙한 정권 입맛에 따라 입법 횡포를 부린 결과임을 직시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곧 출범할 윤석열 정권은 히틀러의 독재가 낳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죽음과 민주당의 전횡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오로지 국민의 뜻에 관심을 두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해야 마땅하겠다. 이는 또한 여야 양쪽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상적인 국회 운영과 협치로 대의 민주주의 정신을 살려 나갈 때 국민의 신뢰와 지지는 저절로 뒤따르지 않겠는가. 높아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의 혁신이 절실하다.
2022-04-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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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의 세상 터치] 해수부, 해양도시 부산에 있으면 안 되나
국내 최초의 초광역권 통합·협력 모델로 추진되는 ‘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부울경 특별연합)’. 얼마 전 부산시는 메가시티의 상징이 될 청사 소재지를 울산시와 경남도에 양보했다. 과연 부울경의 맏형다운 통 큰 배려다. 서로 자기 이익을 앞세워 청사 위치를 두고 다투다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메가시티의 순조로운 출범을 위해 희생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산 사람들이 가진 정체성의 하나인, 바다처럼 마음이 넓고 진취적인 해양성 기질에서 나온 용단이 아닐 수 없다.
개방적인 해양도시 부산 시민들이 세종시에 소재한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제20대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달 23일 부산항을사랑하는시민모임, 부산경실련 등 시민사회단체는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 후보들에게 해수부의 부산 이전을 공약할 것을 촉구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은 시민과 지역 해양수산 업계의 숙원이어서다. 부산은 이명박 정부 시절 폐지된 해수부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부활할 때부터 수시로 부산 설치를 주장해 왔으나 지역 이기주의로 치부되고 묵살됐다.
내륙의 해수부 바다 접근성 떨어져
해양수산업과 원활한 소통 힘들어
바다 근처로 이전해 효율성 높여야
해양 클러스터 갖춘 부산이 최적지
해양수도 지향 부산으로 옮길 필요
해양력 강화·지역균형발전 기대돼
메가시티 청사를 유치하는 곳은 새로운 지방행정 중심지로 성장하고 대규모 상권을 형성해 지역 발전과 경제 활성화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도 부산이 좋은 기회를 선뜻 포기하고 해수부 이전을 바라는 이유는 뭘까? 올 상반기에 탄생할 메가시티가 비대한 수도권과 경쟁이 가능한 경제·생활권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을 ‘동북아 해양수도’로 만들어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국가 해양력을 키우면서 메가시티 발전의 원동력과 거점으로 삼는 데 해수부 이전이 절실한 것이다. 이처럼 해수부 이전은 맹목적이지 않고 명분이 있는 요구다.
부산에 해수부가 있어야 할 당위성도 충분하다. 부산이 해양산업과 수산업의 최고·최대 도시인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해양진흥공사,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국립수산과학원,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수산연수원 등 해양수산 공공기관과 연구·교육시설도 즐비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부산항은 세계 2위 환적항, 세계 5~6위 컨테이너항만을 자랑한다. 부산같이 해양수산의 수많은 기능이 집적화한 도시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다. 해수부 청사의 최적지로 꼽히는 이유다.
해수부가 해양수산 업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부족하고 관련 공공기관과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업계의 불만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바다와 동떨어진 내륙 깊숙한 지역에 위치해 탁상행정에 빠지기 쉬운 까닭이다. 이제는 해수부가 산업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펼칠 때가 됐다. 청사를 바다 근처로 옮긴다면 해양수산업의 실상과 고충을 제때 인식하며, 관련 기업·기관들과 머리를 맞대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기에 수월할 테다. 해수부가 부산 이전을 통해 컨트롤타워 기능을 강화하고 민간과 공공 부문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경우 정부가 계획한 ‘해양 초강국 실현’이 앞당겨지지 싶다.
각 정부부처는 다양한 부문과 기능별로 세분화된 행정기구다. 이와 달리 해수부는 유일하게 바다라는 공간이 활동 영역인 분야가 모인 부처다. 그리고 부산은 역대 정부에서 힘없는 미니 부처인 해수부가 존폐 기로에 놓일 때마다 살려 냈던 도시다. 해수부는 조직의 특수성과 애정이 남다른 부산을 기반으로 활용해 운영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해수부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전향적인 조치가 시행된다면 지역균형발전에 바람직한 모델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노무현 정부 때 1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단행된 이후 현재까지 장기간 추가적인 성과가 없는 원인은 2차 이전 대상 기관을 비롯한 수도권의 강한 저항에 있다. 이는 뭐든지 절반이 넘는 인구가 살고 제반 환경이 잘 갖춰진 수도권에 있어야 효율적이라는 수도권 중심 논리가 팽배한 탓이다. 이 같은 생각은 수도권·비수도권 간 불균형만 심화하는 고정관념이어서 변화가 시급하다. 정부부처가 서울과 세종시에 몰려 있어야 한다는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해수부에 한해서는 “지방은 안 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해양수산 인프라 수준만큼은 부산이 압도적이지 않은가.
해수부를 부산에 두기를 제안한다. 해양수산 정책의 효율성 제고와 지역균형발전 촉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분명해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대선 후보 시절 부산을 아시아 최고, 세계 최고의 해양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위가 해수부 부산 이전을 적극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대선 공약 이행을 시작할 것을 주문한다.
2022-03-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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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의 세상 터치] 반중 정서 확산하는 한·중 수교 30주년
찻잔 속 태풍인 줄 알았다. 이달 4일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계기로 ‘한복(韓服)공정’ 논란이 불거질 때만 해도…. 논란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대표가 중국 국기를 전달한 개막식에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성이 함께 등장한 장면에서 촉발됐다. 국내 네티즌들은 “중국이 한복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행위”라거나 “한복은 한국 고유 의상”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중국이 추진한 한국 고대사 왜곡 프로젝트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빗댄 ‘한복공정’으로 표현하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 같은 대응은 사실 관계를 살펴봤을 때 과한 측면이 있으며, 한·중 갈등을 부추기는 과민 반응이라는 일각의 의견도 나왔다. 조선족뿐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 대표 모두 자신들의 전통 복장으로 국기 전달 행사에 참여한 만큼 차분히 지켜보자는 게다. 이 목소리는 올림픽 쇼트트랙 종목의 잇단 편파 판정과 중국 텃세에 따른 우리나라 선수들의 불이익으로 반중(反中)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면서 묻혀 버렸다. 반중 감정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더 거세지고 전 연령대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베이징올림픽, ‘한복공정’ 논란 일어
잇단 편파 판정으로 반중 감정 폭발
양국 청년층 간 민족 갈등의 골 깊어
한국 역사·문화 침탈 시도 중단할 때
호혜평등 정신으로 협력 강화 필요
보다 성숙한 한·중 관계 미래 열어야
반중 정서가 고조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제공자는 중국이다. 지속적인 ‘문화공정’ 도발이 한국인들의 중국 혐오감을 키워 온 탓이다. 중국 측이 한복을 자기네 문화로 선전한 경우만 해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제작된 베이징올림픽 홍보 영상은 한복 차림의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상모를 돌리는 모습을 담아 문화 침탈 논란을 빚었다. 중국 최대 포털인 바이두 백과사전은 ‘한복은 중국옷 한푸(漢服)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SNS에서 한국이 한복을 훔쳐 갔다고 우긴다. 채소를 절인 중국 음식 파오차이(泡菜)가 김치의 원조라는 그들의 억지 주장은 한국인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중국은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중국 정부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2002년 시작한 ‘동북공정’이 대표적이다. 만주 지역에서 한(韓)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든 고구려·발해가 중국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엔 늘 분노가 치민다. 남의 역사를 강탈하는 국제 범죄이자 중대한 외교적 결례여서다. 바로 인접한 한반도에 독자적인 해당 역사를 계승한 번듯한 국가, 수천만 인구를 가진 민족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묵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올해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30년이 흘렀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반목의 40년 역사를 끝내고 정식 국교를 맺었다. 한·중 관계는 수교 초기 우호 단계에서 1998년 협력동반자,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 2008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2013년 성숙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2017년 실질적 전략적 협력동반자 단계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지난해 기준 한국의 최대 교역국(전체 교역량의 24.6%)이면서 최대 수출(25.9%)·수입(23.3%)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두 나라 관계가 더욱 긴밀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뜻깊은 수교 30주년을 맞아 양국 간 우호가 한층 증진되기는커녕 악화될 것이 우려된다. 여야 정치권까지 반중 정서와 대통령선거의 표심을 의식해 중국 비난에 가세하자 중국 당국이 불쾌감을 표시했을 정도다. 국수주의에 물들거나 한국을 싫어하는 혐한증(嫌韓症)을 가진 일부 중국 네티즌들 역시 반중 현상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한·중 갈등이 심화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더욱이 미래를 짊어진 양국 청년층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수교 후 25년간 한·중 교류 규모가 눈부시게 성장했던 우호·협력의 시기를 복원하는 데 양국 정부가 노력했으면 좋겠다. 양국의 협력 강화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성숙한 관계의 미래를 열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2017년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과 한류를 금지한 한한령(限韓令) 조치 이후 냉랭해진 한·중 관계에 하루속히 훈풍이 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중국이 한국 역사와 문화를 침탈하려는 꿈을 접는 것이 중요하다. 패권주의 대신에 호혜평등의 정신으로 이웃나라 한국을 대해야 할 것이다. 〈논어〉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가르치지 않았던가. 양국 국민들이 이 말을 명심해 근거 없는 맹목적인 비방과 무분별한 강경 발언은 삼갈 일이다. 한국 정부에는 남북문제와 한·중 교역을 이유로 일관했던 중국 눈치 보기나 저자세 외교를 탈피해 때로는 할 말을 다하는 소신을 보여 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젊은이들의 자존심을 지켜 줘야 중국을 불공정하게 여기며 경계하는 반중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다.
2022-02-10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