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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위기의식으로 '골디락스'에 힘 모을 때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이달 20일 기준금리를 현 5.25~5.50%로 동결했다. 3.50%인 우리나라 기준금리와 간극이 커지지 않고 최대 2.00%포인트 차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행 역시 내달 12일 기준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미 간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아 국내 금리 인상을 압박하는 요인이 한동안 해소되기 때문이다. 고금리와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수많은 가계와 기업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 기준금리 동결은 올 들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이후 3개월 만이다. 지난해 3월부터 올 5월까지 10차례나 기준금리가 올라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고공행진 추세가 한풀 꺾인 모양새다. 미 정부의 통화정책 긴축 기조로 연말께 금리가 다시 인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이번 동결은 경제 여건의 개선에 따른 활황세를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 연준도 자국 경제에 대해 ‘견고한 경제 활동, 견조한 일자리 창출, 낮은 수준의 실업률’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최근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도 두드러진 호조세를 보인다. 경기가 식을 줄 모르고 호황을 이어 가자 취업이 급증해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고용지표의 안정세가 뚜렷하다. 물가 상승률도 크게 하락하고, 앞으로 상승폭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됐다. 미 정부가 기울이는 경기 부양책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키운다.
미국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 ‘골디락스’(Goldilocks)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다소 성급한 분석마저 잇따른다. 골디락스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일컫는다. 영국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 등장하는 금발 소녀의 이름에서 따온 경제용어다. 길을 잃어 숲속을 헤매던 골디락스는 우연히 만난 곰들이 끓여 준 세 가지 죽-뜨거운 것, 차가운 것, 미지근한 것 중 미지근한 죽으로 허기를 채우고 기뻐한다는 게 동화 속 얘기다. 이같이 경제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인플레이션 없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호황 상태가 골디락스다.
미국 경제에 엿보이는 ‘고성장·저물가’의 모습이 부럽다. 오랜 경기 둔화와 저성장으로 1%대 저성장의 고착화가 우려되는 우리 사정과 대조적이어서다. 정부가 예측한 2023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겨우 1.4%다. 이미 수출 부진과 중국 경제 둔화세 등의 영향으로 상반기 경제 성장률은 0.9%에 그쳤다. 이대로 가면 성장률이 정부 예측치보다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가운데 JP모건, HSBC 등 해외 8개 투자은행이 내놓은 내년도 우리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1.9%에 불과하다. 성장률이 올해와 내년 2년 연속 1%대에 머무는 건 사상 처음이자 만성적인 ‘초저성장’의 늪에 빠진다는 의미라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과 고용 확대는 불가능에 가깝지 싶다.
민생과 직결된 물가도 진작에 비상이 걸렸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갈등 여파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물건값과 음식비, 공공요금이 크게 올랐다. 정부가 고물가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나 각종 가공식품 가격 인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더욱이 추석을 앞두고 제수용품과 식재료, 생필품 등 장바구니 물가가 폭등해 지갑이 얇은 서민층의 삶을 더욱 옥죈다. 체감 물가가 3%대인 소비자물가지수에 비해 월등히 높아 국민의 시름은 깊어지고 내수 진작이 힘들 수밖에 없다.
경제난의 그림자가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도 경기 회복을 위한 정치권의 별다른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가계, 중소기업, 정부 모두 빚에 허덕일 만큼 경제 위기가 심각하지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에 가득 차 격렬한 정쟁과 감정적인 이념 전쟁에 매달리면서 국회를 공전시킨다. 나라꼴이 어찌되든 정치적 이득만 취하려는 투여서 경제와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된 까닭에 국내 금리의 추가 인상 요인이 상존한 데다 또다시 국제 유가가 치솟아 국가 경제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실정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야가 극심한 민생고를 방치한다는 거센 질타가 나오는 이유다. 이제라도 여야가 하루빨리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실종된 정치를 복원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경제 위기를 외면할 경우 정당성과 공당 자격이 없어 퇴출돼야 마땅하다. 여야는 다가온 추석 민심을 제대로 읽어 경제 살리기와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최우선하고, 여기에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골디락스를 향해 합심하며 협치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9-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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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권한만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는 사람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 헌법 제7조 1항 규정이다. 공무원이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공복(公僕)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공무원 중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시도교육감 등 선출직은 주권을 가진 국민의 투표를 통해 뽑혀 공익을 위해 복무하는 만큼 공복의 성격이 더욱 짙다. 그래서 이 선량들 가운데 상당수는 선거 기간에 유권자에게 충실한 머슴을 자처하며 머리를 조아릴 정도다.
공무원이 국민을 섬기며 국가에 헌신하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잘못한 점이 있으면 기꺼이 책임도 지는 자세가 그것이다. 이는 말단에서 최고위까지 전 공직자가 잘 숙지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공직윤리의 하나다. 그 책임의 정도는 부여된 권한, 직책, 지위에 따라 달라질 테다. 권한이 크고 많은 고위직, 요직일수록 감당하는 책임감의 무게는 커진다. 바로 세간에서 얘기하는 ‘공직의 무게’다. 공무원에겐 일반 직장인과 다른 투철한 사명감이 필요하며, 자리나 임무에 걸맞은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다. 국민이 낸 혈세로 충당한 국록(國祿)을 먹는 직업이 공무원인 까닭이다.
작금의 공직사회 현실은 국민 기대치와 달라 문제다. 공무원의 무책임이 낳은 인재로 드러난 사건사고가 빈발한 반면 제대로 책임지는 고위 공직자를 보기 힘들어서다. 지난해 10월 29일 159명이 허망하게 희생된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는 책임을 회피하는 최고위층 인사들의 건재 속에 잊히고 있다. 지난달 15일 14명이 숨진 충북 청주 오송지하차도 침수 참사에 직접 관련된 여러 기관장 역시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지난달 19일 경북 예천 폭우 실종자 수색 중 해병대원이 익사한 사고의 군당국 수사는 고위급을 빼 외압 논란과 함께 꼬리 자르기란 비난이 인다.
문제가 생겨도 힘 있는 고위 공직자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의적인 책임조차 외면하기 일쑤다. 책임감은 물론 도덕성과 윤리 의식까지 상실한 셈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위직의 무게감에 어울리지 않는 행태다. 힘들게 오른 자리를 눈치 보며 요령껏 보전하다 나중에 원하는 곳으로 옮겨가는 징검다리로 삼을 심산이지 싶다. 최근 불거진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전관업체들 간 계약 남발과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 고위 공직 출신을 위한 전관예우는 경제계에 팽배하다.
이 지경이니 윗선에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을 주문해도 령(令)이 안 서 하위 공무원에게 먹혀들 리 만무하다. 괜히 열심히 일하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보호받기는커녕 무책임한 고위직의 희생양이 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신입 공무원의 퇴직 증가, 경찰의 순경 부족 현상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결국 관료사회에 ‘철밥통’ 소리를 듣는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으로 점철된 보신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창의적인 업무와 각종 규제 완화·해소가 말처럼 쉽지 않고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는 원인이 있다.
대표적 선출직 고위 공직자로 꼽히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권의 책임감이 결여된 남 탓 타령은 고질적인 책임 전가의 극치라고 할 만하다. 여야는 일본이 24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많았으나 머리를 맞대 대책을 마련하는 협치 대신 상호 사생결단식 정쟁으로 일관했다. 국민의힘은 방류의 위험성을 외치는 더불어민주당을 괴담 유포 세력으로 성토하고, 민주당은 안전하다는 정부·여당을 맹비난하느라 바빴다. 어민과 상인들이 수산물 소비 실종에 직격탄을 맞아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이지만,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양당은 이달 11일 파행으로 끝난 전북 새만금 세계잼버리대회 부실 운영의 책임을 놓고도 각각 전·현 정부의 무능 탓이라며 거센 공방을 벌인다.
모두 국민의 불쾌지수를 높이고 희생자 유족과 피해자들의 아픔을 키우는 처사다. 정부가 중대 관재(官災)가 일어날 때마다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히 규명해 지위고하와 친소관계를 불문하고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비로소 공직윤리가 확립돼 근무 기강이 바로 설 게다. 여야도 국회에 수북이 쌓인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하면서 비위 연루 의원을 단호히 내치는 등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건 요원할 뿐이다. 지금은 직무 유기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는 국회를 탄핵할 수 있는 법이나 국민의 국회의원 소환제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계와 정치권에 민생 안정과 경제 성장이란 대의를 위해 제 살도 도려내는 ‘읍참마속’의 각오를 촉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나라 안팎에 위기를 동반한 악재가 즐비하다. 모두에게 강한 책임감이 필요한 시기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8-2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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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분열된 악다구니판을 깨야 나라가 산다
트로이 목마는 기만전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기원전 12세기 도시국가 트로이는 스파르타 왕비를 유괴했다는 이유로 침공한 그리스 연합군의 대병력에 맞서 10년이나 버텼지만, 목마 계책에 속아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트로이는 그리스가 퇴각하는 척하며 정예군 수십 명을 숨겨 성문 앞에 세워 둔 목마를 전리품으로 여겨 성안에 들여놓고 승리에 도취했다가 목마 속 군사의 야간 기습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간계나 위선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트로이 목마에는 더욱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트로이 사람들이 성밖 목마를 두고 벌인 결론 없는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일부 장로들은 ‘그리스인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가호를 빌며 아테네 신에게 바친다’란 글이 새겨진 목마를 승전물로 삼아 성내 아테네 신전에 갖다 놓자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들은 목마를 부숴 내부를 살펴보자며 맞섰다. 군중도 양쪽으로 의견이 엇갈려 대립하는 바람에 결정은 왕의 몫이 됐다. 결국 목마를 안으로 옮기는 큰 실수를 낳게 만든 팽팽한 논란은 트로이가 어이없이 패망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같이 소모적인 말다툼이 격화돼 국력 약화 등의 낭패로 이어진 사례는 동서고금에 숱하다. 우리도 구한말 지도층과 지식인들이 친일파와 친청파, 친러파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다 맥없이 나라를 잃은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트로이와 우리나라 역사는 적의 야욕 앞에서 국론이 분열될 경우 망국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일제강점기 민족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권이 있고 병력도 충분하더라도 국민이 분열하면 패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도산 선생의 가르침은 지금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 패권전쟁을 벌이며 자국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러시아 4개 강대국에 끼어 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하는 엄중한 시기여서다. 북한의 핵위협마저 고조되고 있다. 위기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국익을 챙기는 데는 단합된 힘이 필수적이다. 이는 서방 세력과 러시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 혼란에 빠진 결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론 분열로 국력이 분산돼 열강의 요구나 북한 도발에 쉬 휘둘려선 안 될 일이다.
국제 정세가 이런데도 국내적으로는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당리당략을 앞세운 여야 간 끝 모를 정쟁을 지켜보자니 착잡한 마음뿐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일본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서울~경기도 양평 고속도로 노선 문제 등 불거지는 사안마다 의견 충돌을 빚으며 대립하기 일쑤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듯 상대방 공격에 혈안이 돼 있다. 이 때문에 국회가 처리해야 할 법안은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민생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년 4·10 총선이 다가오자 여야는 서로 지지층을 결집할 의도로 험악한 막말과 욕설을 서슴지 않으며 적대적인 강 대 강 대치로 치닫는다. 진실과 객관적 사고보다는 자기 진영이면 무조건 편들고 다른 편이면 마구 배척하는 걸 중시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민심을 호도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술수일 테다. 타협과 양보를 바탕으로 한 협치의 실종으로 정치가 황폐화된 이유다. 정치권의 편가르기와 갈라치기 탓에 지지자들이 믿고 싶은 것만 사실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남녀·세대·계층·직종 간 갈등도 깊어져 문제가 심각하다. 2017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 관리와 해소에 연간 최대 246조 원이 쓰인다고 밝혔다. 갈수록 볼썽사나운 악다구니판으로 몸살을 앓는 현실을 고려하면 비용 낭비가 엄청나게 늘어났지 싶다.
공멸이 우려되는 분열과 갈등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국가와 미래를 망치자는 것과 다름없다. 나라를 살리려면 극단의 진보·보수로 양분된 구도를 깨 국론을 추스르는 일이 절실하다. 나만 옳다는 생각과 집단적 편향성으로 갈라지고 반목하는 대신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자세가 정치인을 포함한 전 국민에 요구된다. 매사에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가장 실효적이고 시의적절한 합의나 방안을 도출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제는 모두가 분열을 접고 통합 노력을 우선시해야 마땅하다. 힘을 모으고 한목소리를 내며 국력과 경제력을 대폭 키워 강국이 된다면 미·중·일·러조차 우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되레 환심을 사며 지지와 협조를 얻으려고 한국 눈치를 볼 것이다. 기존 고압적인 외교 자세를 바꿔 먼저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올 게 분명하다. 위풍당당하고 국민의 삶이 안정된 국가 건설을 위해 화합과 연대를 적극 도모하자. 국론 분열상에 따른 국내외 비극적 역사를 거울삼아 우리 현실을 제대로 성찰하고 직시한다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2023-07-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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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본 어업협상
올 3월 16일 도쿄, 5월 7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전후해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계기로 급랭한 한일 관계는 안보 공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개선되는 모양새다. 대한상의와 일본상의가 교류를 단절한 지 6년 만인 이달 9일 부산에서 다시 만나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양국 경제협력이 재개되는 움직임도 잇따른다.
이 같은 화해 분위기 속에서 국내 수산업계는 한일 어업협상이 재개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앞서 수산업계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어업협상에 대해 논의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이 문제가 회담 의제에 포함되지 않자 실망하기도 했다. 조속한 어업협상 재개와 타결은 수산업계와 어업인들의 최대 숙원이어서다.
한일 어업협상은 두 나라 어선이 상대방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할 수 있는 척수와 어획량, 기간을 확정하는 일이다. 양국 정부는 1998년 새로 맺은 어업협정에 따라 2015년까지 매년 어기에 맞춰 EEZ 조업 기준을 정하는 협상을 벌여 왔다. 양국 사이 해역이 좁아 국제법이 인정한 200해리(약 370km)를 기준으로 설정된 서로의 EEZ가 겹치는 까닭에 해마다 새 기준을 마련해 온 것이다.
어업협상은 201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8년간 전면 중단돼 문제가 심각하다. 2015년 협의한 결과의 시효가 끝난 2016년 6월 30일 이후 한일 관계 경색과 일본의 미온적인 태도 탓에 아무런 추가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2011년 후쿠시마원전 폭발사고로 우리 정부가 2013년 일본 8개 현의 수산물을 대상으로 단행한 수입금지 조치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한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 EEZ에서의 조업 의존도가 낮아 급할 게 없었던 영향도 컸다.
반면 한국 수산업계는 연안 오염과 어자원 감소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황금어장으로 꼽히던 일본 EEZ 조업권을 잃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업협상이 장기간 표류하는 동안 수산업계는 EEZ 조업 불가로 어획량이 10만t 이상 줄었고, 누적 피해액은 5000억 원에 달한다. 특히 EEZ 어획고가 전체의 80%나 되는 부산과 EEZ 의존도가 큰 대형선망·기선저인망·채낚기·연승어업의 피해 규모는 막대하다. 선사의 잇단 도산과 어선 감척은 현재 진행형이다. 해양·수산업계가 정부에 어업협상이 시급하다고 줄기차게 지적해 온 이유다.
이같이 위기로 내몰린 수산업계에 초대형 악재까지 닥쳤다. 다음 달로 예정된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가 그것이다. 방류될 오염수의 안전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불안감 확산으로 수산물의 소비 위축 현상이 나타나 수산업은 물론 횟집 등 연관 업종마저 울상이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 호전에 편승해 일본 EEZ 조업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온다. 수산업계가 어려움 타개를 위해 어업협상 재개를 거세게 촉구한다면 해양수산부가 이를 피해보상 대책의 일환으로 수용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이 태도를 바꿔 경제협력을 구실로 먼저 협상 추진을 제안할 개연성이 있다. 바다와 수산물의 방사능 오염을 우려해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일본 어민들을 달랠 대체 어장을 확보할 목적에서다.
EEZ 내 조업이 절박한 건 맞지만,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원전 오염수 방류 초기의 어업협상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오염수를 바다에 대량 투기하는 큰 변수가 생긴 상황에서 한일 어업협상 타결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협상 재개 논의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 어선이 일본 EEZ에 입어해 잡은 물고기가 국산으로 유통되더라도 안전관리 문제가 불거지거나 일본 해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외면받을 게 분명하다.
어업협상이 재개될 경우 일본은 협의 과정에서 이익 극대화를 위해 예전에 비해 더 깐깐하고 무리한 주장을 펼칠 공산이 크다. EEZ 조업을 허용하는 대가로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폐지부터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독도 영유권 주장에 유리한 내용을 관철하려는 모습 역시 예상된다. 이는 지난 3월 일본 초등교과서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시한 데서 알 수 있다.
정부는 언제든 어업협상 카드가 현안으로 등장할 것에 대비해 수산업계와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신중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주고받을지 그리고 적게 주고 많이 받아 내는 전략을 고심하며 협상 재개의 득실을 꼼꼼히 따져 놓고 있어야 하겠다. 일본이 우리보다 협상력이 낫고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양국 간 교섭에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이 좋은 무기가 될 듯하다.
2023-06-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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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신해양강국, 결국 교육에 달렸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지난해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같은 달 31일 부산에서 열린 제27회 바다의 날 기념식에서 신해양강국 재도약을 선언했다. “신해양강국 건설을 위기 극복과 경제 재도약의 기회로 삼자”고 밝힌 것이다. 신해양강국 건설은 해양수산 부문 대선 공약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월 15일 부산을 찾아 신해양강국 미래 비전을 선포하며 해양수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사실상 섬나라인 우리에게는 드넓은 해양이 블루오션이라는 의미에서다.
해양강국은 해양수산 분야 경제력과 기술력이 뛰어나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국가를 말한다. 신해양강국 건설이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해양수산의 국가 경쟁력과 해양과학 기술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키워 굴지의 해양부국으로 새롭게 올라서자는 뜻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올해부터 추진하는 정책의 세부 방안이 지난달 27일 부산에서 한국물류교통협회가 신해양강국 미래 비전 공유를 위해 개최한 콘퍼런스를 통해 알려졌다. 기조연설에서 송상근 해양수산부 차관이 각종 계획의 내용을 소개했다. 국제물류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해양 모빌리티 산업 주도권 확보, 수출형 블루푸드 수산업 육성, 해양레저·관광 활성화 등이다.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이 잘 실천돼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면 해양수산 전문 인력 양성이 필수적이다. 국민의 해양 의식을 고취하고 확산하는 교육도 절실하다. 풍부한 인적 토대 구축과 해양문화의 저변 확대가 병행되지 않는 신해양강국 추진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이를 간과하면 신해양강국은 헛구호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해양수산업의 인력 수급 전망이 어두운 데다 해양의 활용 가치에 대한 국민 인식이 부족한 까닭이다.
요즘 상선이든 원양 어선이든 연근해 어선이든 배를 타려는 청년층을 보기 어렵다. 이는 전국의 수많은 대학에서도 몇 안 되는 해운·어업 계열 학과의 학생 수가 급감하고, 폐과가 우려되는 곳이 있는 데서 쉽게 확인된다. 바다 위에서 장기간 외롭고 힘들게 생활하는 선원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추구 성향이 강한 MZ 세대로부터 열악한 직종으로 기피되는 탓이다. 유능하고 경험 많은 해기사 배출이 줄어들 경우 미래 해양수산업을 이끌거나 이 분야를 연구할 인재가 적어지는 만큼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해양수산 업계가 갈수록 심화하는 젊은 인력 부족 현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어업은 인력난에 급속한 고령화가 겹쳐 생산성 하락과 어가 수입 감소로 이어진다. 2000년 25만 명이 넘던 어가 인구가 2022년 9만 명대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21년 2월 해양교육·문화진흥법이 시행됐지만, 각급 학교와 사회에서 해양교육과 강좌·체험 프로그램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 개발조차 원활하지 않다. 이 때문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해양 영토 개척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바다와 친숙한 해양문화를 온 나라에 조성하는 건 요원하기만 하다.
해수부는 해양수산 인력 양성과 해양교육을 교육부나 대학의 임무로만 여길 게 아니다. 신해양강국의 토양을 마련하는 사업으로 판단해 교육부, 지자체와 머리를 맞대며 선제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신해양강국 정책에 맞는 인력 수요를 면밀히 파악해 관련 학과 유지와 학생 유치 노력을 기울이면서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해양교육에 관심과 지원을 쏟아야 마땅하다. 또 해양수산업 종사자와 해양과학기술 연구 인력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근무 환경 개선, 복지 향상 등의 방법으로 직업적 매력도를 높이는 일이 급선무다. 이 같은 조치가 없으면 해양수산은 여전히 국민적 무관심 속에서 홀대를 당하기 십상이다. 귀어·귀촌 장려와 해양 바이오 육성 정책에 거액의 헛돈이 쓰이고, 지금처럼 해양수산 분야 벤처 창업이 저조한 상태가 지속될 것이 뻔하다.
해양수산에서 국부를 창출하기 위해선 최첨단 기술을 입히고 융복합 비즈니스 모델을 가미해 새 먹거리와 신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이에 정부의 전폭적인 투자나 지원이 중요한데, 미니 중앙부처인 해수부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많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여타 부처의 대부분 관료가 육상 중심의 사고에 젖어 있어 신해양강국 건설에 필요한 충분한 예산 확보와 업무 협조에 난항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의 힘 있는 범정부 협의체인 국가해양위원회(가칭)를 신설해 대통령 공약 사항 진행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기는 방안이 요구된다. 오는 3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릴 28회 바다의 날 행사 때 어떤 추가 대책이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2023-05-0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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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엑스포 유치, 부산 실사에서 승기 잡자
‘외국인 320만, 내국인 3160만 명 등 관람객 3480만 명. 생산 유발 43조, 부가가치 유발 18조 원, 고용창출 50만 명.’ 우리나라가 유치하려는 2030부산월드엑스포(국제박람회)에 대해 정부가 밝힌 관람객 수와 경제 파급효과 예측치다.
5년에 한 번 6개월 동안 열리는 등록엑스포인 월드엑스포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국제행사로 꼽히는 대규모 종합박람회다. 이 행사의 경제적 효과는 주요 국가들이 앞다퉈 유치하려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훨씬 능가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16일간 펼쳐지는 올림픽은 관람객 300만 명, 경제 효과 12조 원 정도다. 한 달간 개최되는 월드컵의 경우 300만 명, 11조 4700억 원 수준이다. 두 초대형 행사 모두 부산엑스포의 관람객과 경제효과 전망치에 한참 못 미친다.
부산엑스포는 이 밖에도 부산 도시 브랜드와 경쟁력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선진국 한국의 국격과 위상을 크게 높이면서 엄청난 유·무형의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이 글로벌 관광·비즈니스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한국이 세계 선도국으로 올라선다는 의미다. 부산엑스포는 AI(인공지능), 메타버스, 블록체인 같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와 국내 기업의 홍보의 장이 돼 새로운 성장동력과 먹거리 확보에 기여할 것이다. 5년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술적 진보상과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게 월드엑스포여서다. 2018년 정부가 부산엑스포 유치를 국가사업으로 정해 사활을 걸고 유치 활동을 전개하는 이유다.
부산엑스포 유치전에 분수령이 될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실사가 코앞에 닥쳤다. BIE 현지 실사단 8명이 다음 달 2~7일 방한해 4~6일 부산에서 61개 항목에 걸쳐 유치 역량과 준비 상황을 종합적으로 점검한다. 좋은 평가가 나오도록 정부와 부산시, 경제계가 만반의 대비를 할 일이다. 실사 보고서는 BIE 171개 회원국에 제공돼 오는 11월 말 2030월드엑스포 개최지 결정투표를 위한 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앞서 BIE는 이달 6~10일 유치 경쟁 상대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찾아 실사를 벌였다. 실사단은 리야드의 신공항 조성 계획 등을 살펴보고 엑스포 관련 요건이 충족됐다는 호평을 내놨다고 한다. 행사장의 접근성과 직결된 국제 교통망은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인 까닭이다. 우리 정부가 최근 부산엑스포의 필수 인프라가 될 가덕신공항을 조기 건설해 2029년 엑스포 전에 개항키로 한 결정은 부산이 높은 점수를 받는 데 큰 보탬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과 부산에서 두 차례 실사단을 직접 만날 예정이라 고무적이다. 부산엑스포를 반드시 유치하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를 알리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지 싶다. 반면 엑스포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과 성원은 부족함이 있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엑스포를 잘 이해한다는 부산시민이 65%, 전국적으로는 30%에 그친 것으로 나타난 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 유치 열기를 지피고 관심을 고조시킬 필요성을 대변한다. 이 부분 역시 현지 실사의 최대 평가 항목 중 하나인 만큼 엑스포 유치 목적과 의의를 인식시키는 대국민 홍보와 관련 사업 추진이 시급하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정부는 지난 15일 국회에서 부산과 리야드 간 현재 판세를 백중세로 진단했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사우디가 일찌감치 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섰지만, 한국은 2021년 6월 유치신청서를 내고서야 활동을 본격화한 후발주자임을 감안할 때 참으로 놀라운 성과다. 이 기세를 몰아 부산이 이번 BIE 실사를 통해 리야드를 압도하는 평가를 이끌어 내 확실한 승기를 잡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실사단의 체류 기간에 전국 곳곳에서 국민적인 부산엑스포 유치 의지와 응원 열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다채로운 이벤트 진행이 요구된다. 이런 이유로 부산 민관과 재계가 똘똘 뭉친 움직임이 활발해 바람직하다. 시민의 유치 열망을 담은 크고 작은 행사 개최는 물론 홍보 시설물 설치, 실사단 환영 현수막 부착, 차량 2부제 자율 실시, 해양 쓰레기 수거, 식품위생 점검 등 유치 의지와 개최 역량을 알리는 다양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 부산시, 시민 모두 엑스포 개최 능력과 최적의 여건을 갖춘 부산의 장점과 매력을 충분히 소개하는 데 최선을 다해 실사단의 감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1970오사카엑스포는 일본이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7400만 명이 관람해 가장 성공한 엑스포로 평가되는 2010상하이엑스포는 중국이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는 G2국으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두 도시는 수도권에 필적하는 경제권까지 형성했다. 현지 실사의 문턱을 잘 넘고 남은 기간 총력을 기울여 부산엑스포 유치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와 부산은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 틀림없다.
2023-03-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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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국회의원을 챗GPT로 바꾸고픈 심정
열풍이 인다. AI(인공지능)를 탑재한 대화형 챗봇(Chatbot)인 ‘챗GPT’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달아오른다. 미국 오픈AI가 지난해 11월 말 내놓은 챗GPT가 올 들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출시 두 달 만에 사용자 1억 명을 돌파하며 지구촌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리고 있다. 아마 올해는 세계사에 챗GPT라는 고성능 AI가 인류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또 한 번의 디지털 혁명을 일으킨 해로 기록될 듯하다.
챗GPT는 방대한 데이터 학습량을 기반으로 이용자에게 맞춤형 결과물을 만들어 제공한다. 이것이 챗GPT가 국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비결로 꼽힌다. 간단한 시와 에세이는 물론 장문의 보고서, 논문을 작성해 준다. 복잡한 계산과 프로그래밍 코드 생성도 가능하다. 챗GPT가 더욱 매력적인 건 일상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웬만한 질문에는 몇 초 만에 대답한다는 점이다. 각종 전문 분야의 까다로운 물음에도 전문가가 쓴 것으로 착각할 만큼 구체적이고도 명쾌한 응답을 제시해 감탄을 부른다.
최근 정치권에서 챗GPT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필요한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들까지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챗GPT를 익히며 활용할 정도로 화두가 된 마당에 정치인이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을 갖는 건 당연할 테다. 역량 강화와 신지식 습득을 위해서라도 체험을 권할 만하다. 이제는 일상의 모임과 술자리에서 챗GPT를 소재로 한 담소에 끼지 못하면 소외되는 분위기마저 생겨서다. 더구나 챗GPT 사용자들이 질문을 던져서 얻은 내용물을 온라인에 올려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놀이가 성행한다. 이는 앞으로 두드러진 사회 현상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이 챗GPT에 의존하는 경우는 용납할 수 없다. AI의 진화가 보여 주는 무한한 가능성이 반갑고 실생활에서 쓸모가 커지길 기대한다. 반면 AI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점이 챗GPT를 맹신하면 안 되는 까닭을 알려 준다. 인터넷상에는 왜곡되고 편향된 자료와 가짜뉴스 같은 잘못된 정보가 넘친다. 챗GPT가 이를 바탕으로 거짓된 정보를 재생산하거나 오류를 빚을 공산이 크다. 특히 챗GPT의 기초 정보가 되는 한글 데이터가 빈약해 정확하고 올바른 사실관계 파악에 취약한 실정이다. 인권을 침해하고 윤리에 어긋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챗GPT의 엉뚱하고 틀린 답변만 모은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많이 나도는 상황이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불완전한 챗GPT가 의정 활동에 활용돼선 곤란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셈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아직은 다양한 참고 자료를 수집하는 용도가 나은 챗GPT를 정보의 최종 선택과 판단에 이용하는 건 금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자른 뒤 챗GPT로 교체하고 싶다는 여론이 움트고 있다. 요즘 SNS에 이런 의견과 공감 댓글이 자주 보인다. 국회의원에 대한 불만과 정치 불신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21대 국회는 여야 간 당리당략과 진영논리를 앞세운 정쟁, 당권 싸움에 혈안이 돼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은 뒷전이다. 국회 17개 상임위원회 가운데 2021년 3월 시행된 ‘일하는 국회법’의 의무 사항인 월 3회 이상 법안소위 개최를 지킨 곳이 2년간 전혀 없다. 국회가 여야 대립과 충돌 탓에 개점휴업 상태가 장기화하는 바람에 업무 공백을 빚은 게다. 이 때문에 상임위에서 법안 검토가 이뤄지지 않아 먼지가 쌓인 계류 법안이 급증하는 추세다. 이 중에는 고물가·고금리로 힘든 서민과 기업을 위해 처리가 시급한 법안이 꽤 있다. 국회가 의무를 방기하고 국회의원들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역대 국회의 행태도 오십보백보이거나 더 심했다. 국민의 정치 혐오감을 키우고 ‘식물국회’, ‘동물 국회’란 지적 속에 국회 무용론을 낳은 지 오래다.
AI가 빠르게 똑똑해질수록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길 걱정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한 챗GPT 사용자가 “좋은 정치의 기준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더니 국민의 관심을 최우선하는 것, 정직과 충실, 이성적 판단, 책임감, 투명성 등 다섯 가지 순서로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국민의 바람에 부합하는 대답이 분명하다. 국회의원 모두 위기를 느끼고 각성해야 할 대목이다. 챗GPT보다 의식 수준이 낮은 모습으로 무위도식하며 불체포·면책 특권 등 수많은 혜택을 누리는 국회의원에겐 꼬박꼬박 안겨 주는 거액의 세비가 아까울 지경이다. 게다가 국회가 비례대표 국회의원 50명 증원을 추진하고 있으니 정말 몰염치하다. 사실상 챗GPT와 교체는 어려워도 내년 4·10 총선에서 대폭적인 물갈이가 요구된다는 민의는 들끓는다. 정치권이 환골탈태해야 마땅하다.
2023-02-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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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계묘년 정치, 뭣이 중헌디?
‘국궁진췌 사이후이(麴窮盡膵 死而後已).’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며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는 의미다. 속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비장한 결심이 담긴 표현이다. 이는 228년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 제갈공명이 두 번째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유비의 아들인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후출사표’에 나온다.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문장이다.
이 문구를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 사용했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은 1956년 쑨원 탄생 90돌을 기념해 중국을 개조하고 변화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쑨원을 “진정으로 ‘국궁진췌 사이후이’에 충실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평생 간직한 좌우명으로도 유명하다. 1989년 덩샤오핑 전 주석이 은퇴 선언 후 권력 이양을 시작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된 장쩌민 전 주석은 같은 말로 다짐해 신임을 얻기도 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지금, 한국 정치에도 유효하다.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정신 자세이자 시급한 업무 태도지 싶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몹시 힘들었던 지난해보다 어려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여 국민 생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한 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경제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가 여야 정치권에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은행(WB)은 이달 10일 올 세계 경제성장률이 1.7%에 그친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작년 6월 전망한 3.0%보다 1.3%포인트나 낮췄다. 글로벌 경제가 성장 둔화로 극심한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1.7% 성장률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수출로 먹고살 만큼 세계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받아 휘청거릴 우려가 크다. 최근 정부와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모두 올해 수출 부진과 내수 경기 둔화 탓에 1.6~1.8%의 저성장을 예측한 게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에 따른 고통은 오롯이 국민 몫이다. 이미 직장인과 자영업자 등 대부분 서민은 소득이 변함없거나 감소한 반면 물가와 금리는 계속 치솟아 정말로 살기 팍팍하다며 아우성이다. 저소득층은 생활고에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더욱이 연초부터 전기료가 대폭 올라 가계 부담이 커졌다. 시내버스와 택시, 도시철도 등 대중교통 요금과 각종 보험료마저 줄줄이 인상될 조짐을 보인다. 혹독한 민생경제 한파 속에 예년에 비해 일찍 다가온 설 명절을 쇨 엄두가 안 난다는 사람이 숱하다. 이러다가 자칫 민생이 도탄에 빠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 경제과 국민의 삶이 녹록지 않는데도 실효적인 처방이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와 민생을 위한 정치가 사실상 실종된 까닭이다. 집권당과 거대 야당이 엄중하고 위급한 경제난과 민생고는 뒷전인 채 허구한 날 이념이나 당리당략을 앞세워 대립한다. 사사건건 충돌하며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은커녕 정치 혐오감과 불신을 안긴다. 가뜩이나 힘겨운 국민의 피로감을 가중시킨다. 여야 간 일상화한 정쟁은 마치 집토끼와 산토끼가 하늘땅에 온갖 천적이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먹이에 눈멀어 무방비 상태로 다투는 꼴이다. 그 결과가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무장력 강화 움직임, 중국의 한국인 단기비자 발급 중단일 테다. 여야는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을 두고도 대책 마련 대신 전·현 정권의 책임 공방만 일삼아 북측의 분열 책략에 놀아나는 모양새다. 여야가 그동안 정쟁에 낭비한 열정과 시간의 절반이라도 경제 활성화와 국민 고충 해소에 쏟았더라면 복합적으로 닥친 위기 중 일부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여야가 정쟁을 멈추고 여러 현안 해결에 머리를 맞대 몰두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명운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모든 역량을 모아 협치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여야는 신년 벽두부터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받들기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탄’으로 바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벌써부터 관심이 내년 4·10 총선으로 쏠리고 있다. 여야가 최우선적으로 좇아야 할 대상은 양측의 강성 지지층을 뺀 국민 다수의 민심이다. 2016년 영화 ‘곡성’을 통해 사회의 유행어가 됐던 명대사를 인용해 여야의 행태에 대해 “도대체 뭣이 중헌디?”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정치권이 ‘국궁진췌 사이후이’ 실천을 위해 경쟁하기 바란다. 지독한 어려움이 예견된 올해,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느 당이든 민의의 심판을 받기 십상이란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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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15분 도시' 정책과 민관 협치의 결합 필요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행복도시 부산.’ 박형준 부산시장이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내건 시정 구호다. 박 시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15분 도시’ 조성을 1호 공약으로 제시한 데 이어 민선 8기 시정의 3대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삼고 있다. ‘15분 생활권’ 환경을 구축해 시민들이 편리하고 행복하도록 할 목적에서다.
최근 15분 도시 조성을 위한 내년도 주요 사업이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시의회가 상임위원회별로 사상 최대인 15조 3480억 원 규모로 편성된 2023년 부산시 예산안을 심사하면서 15분 도시 관련 사업 예산을 줄줄이 삭감한 것이다. 지난달 29일 시의회 기획재경위는 15분 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41곳에 어린이 복합문화공간 ‘들락날락’을 개소하려는 예산 200억 원 중 무려 15%인 30억 원을 깎았다. 건설교통위도 15분 생활권 정책공모 사업비 212억 8200만 원 가운데 30억 원을 줄였다. ‘걸으면서 행복한 15분 도시’를 위한 차 없는 거리 만들기의 경우 전체의 86%나 되는 18억 원이 줄어든 3억 원만 반영됐다.
내년도 예산안은 7일 시의회 예산결산특위의 심사와 의결 후 8일 열리는 본회의에서 확정된다. 대폭 깎인 예산이 계수조정을 통해 증액되지 않은 채 최종 처리된다면 박 시장의 대표 공약 사업은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는 올해 시행 2년 차에 접어든 15분 도시 사업이 적극적인 시민 의견 수렴보다는 보여 주기식 탁상행정에 치중한 결과로 보인다. 사업의 구체성이나 시급성이 떨어지고 다른 사업과 중복된다는 시의회의 지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사업성이 부족하고 성과도 미흡하며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점도 시의회가 내세운 예산 삭감의 이유다. 오죽하면 박 시장과 같은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시장의 핵심 공약 사업 예산안을 단호하게 칼질했을까 싶다.
이같이 냉엄한 질타를 받는 행정으로는 살고 싶은 도시는커녕 세부적인 15분 생활권 구현조차 요원할 뿐이다. 이들 사업은 시민 삶의 질과 생활 편의와 직결된 정책이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바람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추진돼서는 안 된다. 행정기관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강행 역시 곤란할 테다.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요구와 의견을 잘 반영하는 맞춤형 시정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시민 제안을 받는 등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업 의제를 발굴한 뒤 숙의 과정을 거쳐 내실과 실효성 있는 사업계획을 세우는 부단한 노력이 간절하다.
이런 까닭에 부산시가 2019년 7월 관련 조례까지 제정하며 도입한 민관 협치 제도가 박 시장 임기 들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시와 시민들이 연대해 지역발전 정책 마련과 각종 문제 해결에 머리를 맞대기로 한 민관 협치가 시정 구호와 15분 도시 정책 실천에 매우 유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 시장은 민관 협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데다 협치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도 부족해 보여 아쉽기만 하다.
시와 박 시장의 민관 협치에 대한 미온적인 모습은 지난 8월 단행된 조직 개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민관 협치 사업을 담당해 온 협치정책과를 총무과 내 협치조정팀으로 축소하고 담당 인력을 줄였다. 협치정책과가 맡은 업무들은 총무과와 자치분권과, 예산담당관실 등으로 분산했다. 민관 협치 사업의 컨트롤타워를 없애 버린 셈이다. 기능이 약화된 조직과 인력으로는 ‘부산시 민관 협치 활성화를 위한 조례’에 걸맞는 제도 활성화와 1차 협치 활성화 기본계획(2022~24년)상의 수많은 사업 전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 시장은 2019년 9월 시와 시의회·시민단체 관계자, 학계 전문가, 시민활동가 등 29명으로 발족한 부산시민협치협의회의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지만, 정기 회의(연 4회) 개최와 참석에 등한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민관 협치가 더불어민주당 출신 전임 시장의 작품이라 그럴 것”이란 추측성 뒷말도 나오는 실정이다.
당초 민관 협치는 복잡다단한 세태에 따라 급변하고 다변화해 행정력만으론 풀기 어려워진 지역과 시민사회의 과제들을 시민 참여와 민간과의 협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건의를 시가 수용해 만든 새로운 협력 모델이다. 정당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정착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요청하는 제도라고 하겠다. 시의 15분 도시 정책이 활기를 띠고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민관 협치 제도와 결합하는 게 효과적이다. 더욱이 민관 협치 활성화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인 지방자치제 안착에 필수적인 시민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절실한 일이다. 여기에 시와 시장의 인식 전환과 태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2022-12-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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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청산해야 할 정쟁·막말 국감
여야 간 정쟁이 심각하다. 지난 4일 시작돼 막바지에 이른 국회 국정감사를 지켜보고 있으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국감이 정쟁만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을 보여서다.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논의가 펼쳐지길 원하는 국민의 바람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 책임 방기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올 국감은 21대 국회의 후반기 원 구성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맞이한 국감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야가 그 어느 때 국감보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알차게 진행해야 할 당위성이 컸다. 국감의 근본적인 목적도 정부의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입법부의 감시와 대안 제시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물가·고환율·고금리에 저성장까지 겹친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과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 핵 위협으로 경제·안보 상황이 위중해진 시기다. 국가적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키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 실속을 찾는 정책 국감이 요구됐다.
한편으로는 국감에서 여야의 힘겨루기가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정권 교체로 입장이 뒤바뀐 여야가 그동안 보여 준 ‘네 탓’ 공방이 국감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던 게다. 국민의힘은 전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과오를 찾아내 질타하기에 열을 올렸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무능과 윤 대통령 주변에서 불거진 의혹에 대한 공세로 맞서 왔다.
기대는 무너지고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국감장은 본연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여야가 상호 비방을 되풀이하며 극명하게 대치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싸움터로 변질됐다. 총알만 없을 뿐 혈투가 난무하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모양새다. 18일 국회 법제사법·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선 여야의 난타전이 절정에 달했다. 이날 민주당 이 대표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의혹을 두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감사가 중단됐다. 다른 상임위별 국감에서도 당리당략이나 감정을 앞세운 감사 보이콧과 중단, 정회, 퇴장 등 파행이 잦아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쟁 국감 과정에서 막말과 반말이 빠지지 않아 여야 대립을 격화한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한마디로 맛이 갔던지 제정신이 아니다”, “개나 줘버려”, “버르장머리 없다”, “너나 잘하라” 등등. 예의나 품위와 너무나 동떨어진 저질 표현이다. 이런 발언은 으레 치졸한 트집 잡기로 이어져 소모적인 말다툼이 지속된다. 꼬리에 꼬리를 문 언쟁으로 사태 봉합은커녕 폭언과 인신공격의 수위가 한층 높아지기 마련이다. 고함, 호통, 으름장, 삿대질도 동원되기 일쑤여서 여야 간 증오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결국 이번 국감에서 국민의힘은 민주당 이 대표를 포함한 야당 의원 4명을, 민주당은 정진석·권성동 등 여당 의원 3명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다. 서로 독기 서린 말로 물어뜯는 데 혈안이 된 이전투구의 결과다. 게다가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식이라 몰염치하기도 하다. 이같이 충돌과 파행이 거듭되는 동안 민생과 경제 문제를 다루는 정책 질의는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국감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빵점짜리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정쟁에 골몰하고 알맹이는 없는 국감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거나 “신물 난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맹탕 국감’이란 비판과 함께 국감 무용론마저 제기될 정도다. 정치를 둘러싼 국민의 불신과 혐오, 무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27년 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서 ‘4류’로 지적받은 정치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1996년에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정쟁을 ‘코미디’라고 빗댔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여야의 거대 양당은 각종 선거, 정기회, 임시회에서도 시종일관 철천지원수처럼 사활을 걸고 싸우는 경우가 다반사다. 협치의 가능성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양측이 고심 끝에 5년 만에 정권을 바꾼 민심의 준엄한 경고를 벌써 망각한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국민들은 정쟁에 넌더리가 날 지경인 반면 국회의원들은 싸움을 주업으로 착각한 듯싶다. 일부 성실한 의원은 억울하겠으나 시급한 민생 경제의 안정과 국민의 원성조차 뒷전인 국회는 퇴출감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은 늦게나마 국감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내년, 내후년 국감도 정쟁과 막말로 얼룩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에 쏟아야 마땅한 정치적 역량과 시간을 낭비하며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을 안길지 모른다. 별다른 생산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쟁 일변도 정치판의 면모를 일신하기 바란다. 환골탈태가 국민 모두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2022-10-20 [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