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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엑스포 유치, 부산 실사에서 승기 잡자
‘외국인 320만, 내국인 3160만 명 등 관람객 3480만 명. 생산 유발 43조, 부가가치 유발 18조 원, 고용창출 50만 명.’ 우리나라가 유치하려는 2030부산월드엑스포(국제박람회)에 대해 정부가 밝힌 관람객 수와 경제 파급효과 예측치다.
5년에 한 번 6개월 동안 열리는 등록엑스포인 월드엑스포는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국제행사로 꼽히는 대규모 종합박람회다. 이 행사의 경제적 효과는 주요 국가들이 앞다퉈 유치하려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훨씬 능가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16일간 펼쳐지는 올림픽은 관람객 300만 명, 경제 효과 12조 원 정도다. 한 달간 개최되는 월드컵의 경우 300만 명, 11조 4700억 원 수준이다. 두 초대형 행사 모두 부산엑스포의 관람객과 경제효과 전망치에 한참 못 미친다.
부산엑스포는 이 밖에도 부산 도시 브랜드와 경쟁력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선진국 한국의 국격과 위상을 크게 높이면서 엄청난 유·무형의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이 글로벌 관광·비즈니스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한국이 세계 선도국으로 올라선다는 의미다. 부산엑스포는 AI(인공지능), 메타버스, 블록체인 같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와 국내 기업의 홍보의 장이 돼 새로운 성장동력과 먹거리 확보에 기여할 것이다. 5년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술적 진보상과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게 월드엑스포여서다. 2018년 정부가 부산엑스포 유치를 국가사업으로 정해 사활을 걸고 유치 활동을 전개하는 이유다.
부산엑스포 유치전에 분수령이 될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실사가 코앞에 닥쳤다. BIE 현지 실사단 8명이 다음 달 2~7일 방한해 4~6일 부산에서 61개 항목에 걸쳐 유치 역량과 준비 상황을 종합적으로 점검한다. 좋은 평가가 나오도록 정부와 부산시, 경제계가 만반의 대비를 할 일이다. 실사 보고서는 BIE 171개 회원국에 제공돼 오는 11월 말 2030월드엑스포 개최지 결정투표를 위한 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앞서 BIE는 이달 6~10일 유치 경쟁 상대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찾아 실사를 벌였다. 실사단은 리야드의 신공항 조성 계획 등을 살펴보고 엑스포 관련 요건이 충족됐다는 호평을 내놨다고 한다. 행사장의 접근성과 직결된 국제 교통망은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인 까닭이다. 우리 정부가 최근 부산엑스포의 필수 인프라가 될 가덕신공항을 조기 건설해 2029년 엑스포 전에 개항키로 한 결정은 부산이 높은 점수를 받는 데 큰 보탬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과 부산에서 두 차례 실사단을 직접 만날 예정이라 고무적이다. 부산엑스포를 반드시 유치하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를 알리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지 싶다. 반면 엑스포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과 성원은 부족함이 있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엑스포를 잘 이해한다는 부산시민이 65%, 전국적으로는 30%에 그친 것으로 나타난 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 유치 열기를 지피고 관심을 고조시킬 필요성을 대변한다. 이 부분 역시 현지 실사의 최대 평가 항목 중 하나인 만큼 엑스포 유치 목적과 의의를 인식시키는 대국민 홍보와 관련 사업 추진이 시급하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정부는 지난 15일 국회에서 부산과 리야드 간 현재 판세를 백중세로 진단했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사우디가 일찌감치 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섰지만, 한국은 2021년 6월 유치신청서를 내고서야 활동을 본격화한 후발주자임을 감안할 때 참으로 놀라운 성과다. 이 기세를 몰아 부산이 이번 BIE 실사를 통해 리야드를 압도하는 평가를 이끌어 내 확실한 승기를 잡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 실사단의 체류 기간에 전국 곳곳에서 국민적인 부산엑스포 유치 의지와 응원 열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다채로운 이벤트 진행이 요구된다. 이런 이유로 부산 민관과 재계가 똘똘 뭉친 움직임이 활발해 바람직하다. 시민의 유치 열망을 담은 크고 작은 행사 개최는 물론 홍보 시설물 설치, 실사단 환영 현수막 부착, 차량 2부제 자율 실시, 해양 쓰레기 수거, 식품위생 점검 등 유치 의지와 개최 역량을 알리는 다양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 부산시, 시민 모두 엑스포 개최 능력과 최적의 여건을 갖춘 부산의 장점과 매력을 충분히 소개하는 데 최선을 다해 실사단의 감동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1970오사카엑스포는 일본이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7400만 명이 관람해 가장 성공한 엑스포로 평가되는 2010상하이엑스포는 중국이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는 G2국으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두 도시는 수도권에 필적하는 경제권까지 형성했다. 현지 실사의 문턱을 잘 넘고 남은 기간 총력을 기울여 부산엑스포 유치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와 부산은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 틀림없다.
2023-03-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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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국회의원을 챗GPT로 바꾸고픈 심정
열풍이 인다. AI(인공지능)를 탑재한 대화형 챗봇(Chatbot)인 ‘챗GPT’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달아오른다. 미국 오픈AI가 지난해 11월 말 내놓은 챗GPT가 올 들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출시 두 달 만에 사용자 1억 명을 돌파하며 지구촌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리고 있다. 아마 올해는 세계사에 챗GPT라는 고성능 AI가 인류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또 한 번의 디지털 혁명을 일으킨 해로 기록될 듯하다.
챗GPT는 방대한 데이터 학습량을 기반으로 이용자에게 맞춤형 결과물을 만들어 제공한다. 이것이 챗GPT가 국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비결로 꼽힌다. 간단한 시와 에세이는 물론 장문의 보고서, 논문을 작성해 준다. 복잡한 계산과 프로그래밍 코드 생성도 가능하다. 챗GPT가 더욱 매력적인 건 일상 언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웬만한 질문에는 몇 초 만에 대답한다는 점이다. 각종 전문 분야의 까다로운 물음에도 전문가가 쓴 것으로 착각할 만큼 구체적이고도 명쾌한 응답을 제시해 감탄을 부른다.
최근 정치권에서 챗GPT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필요한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들까지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챗GPT를 익히며 활용할 정도로 화두가 된 마당에 정치인이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을 갖는 건 당연할 테다. 역량 강화와 신지식 습득을 위해서라도 체험을 권할 만하다. 이제는 일상의 모임과 술자리에서 챗GPT를 소재로 한 담소에 끼지 못하면 소외되는 분위기마저 생겨서다. 더구나 챗GPT 사용자들이 질문을 던져서 얻은 내용물을 온라인에 올려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놀이가 성행한다. 이는 앞으로 두드러진 사회 현상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이 챗GPT에 의존하는 경우는 용납할 수 없다. AI의 진화가 보여 주는 무한한 가능성이 반갑고 실생활에서 쓸모가 커지길 기대한다. 반면 AI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점이 챗GPT를 맹신하면 안 되는 까닭을 알려 준다. 인터넷상에는 왜곡되고 편향된 자료와 가짜뉴스 같은 잘못된 정보가 넘친다. 챗GPT가 이를 바탕으로 거짓된 정보를 재생산하거나 오류를 빚을 공산이 크다. 특히 챗GPT의 기초 정보가 되는 한글 데이터가 빈약해 정확하고 올바른 사실관계 파악에 취약한 실정이다. 인권을 침해하고 윤리에 어긋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챗GPT의 엉뚱하고 틀린 답변만 모은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많이 나도는 상황이 이 같은 우려를 뒷받침한다. 불완전한 챗GPT가 의정 활동에 활용돼선 곤란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셈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아직은 다양한 참고 자료를 수집하는 용도가 나은 챗GPT를 정보의 최종 선택과 판단에 이용하는 건 금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자른 뒤 챗GPT로 교체하고 싶다는 여론이 움트고 있다. 요즘 SNS에 이런 의견과 공감 댓글이 자주 보인다. 국회의원에 대한 불만과 정치 불신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유는 차고 넘친다.
21대 국회는 여야 간 당리당략과 진영논리를 앞세운 정쟁, 당권 싸움에 혈안이 돼 경제 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은 뒷전이다. 국회 17개 상임위원회 가운데 2021년 3월 시행된 ‘일하는 국회법’의 의무 사항인 월 3회 이상 법안소위 개최를 지킨 곳이 2년간 전혀 없다. 국회가 여야 대립과 충돌 탓에 개점휴업 상태가 장기화하는 바람에 업무 공백을 빚은 게다. 이 때문에 상임위에서 법안 검토가 이뤄지지 않아 먼지가 쌓인 계류 법안이 급증하는 추세다. 이 중에는 고물가·고금리로 힘든 서민과 기업을 위해 처리가 시급한 법안이 꽤 있다. 국회가 의무를 방기하고 국회의원들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역대 국회의 행태도 오십보백보이거나 더 심했다. 국민의 정치 혐오감을 키우고 ‘식물국회’, ‘동물 국회’란 지적 속에 국회 무용론을 낳은 지 오래다.
AI가 빠르게 똑똑해질수록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길 걱정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한 챗GPT 사용자가 “좋은 정치의 기준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더니 국민의 관심을 최우선하는 것, 정직과 충실, 이성적 판단, 책임감, 투명성 등 다섯 가지 순서로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국민의 바람에 부합하는 대답이 분명하다. 국회의원 모두 위기를 느끼고 각성해야 할 대목이다. 챗GPT보다 의식 수준이 낮은 모습으로 무위도식하며 불체포·면책 특권 등 수많은 혜택을 누리는 국회의원에겐 꼬박꼬박 안겨 주는 거액의 세비가 아까울 지경이다. 게다가 국회가 비례대표 국회의원 50명 증원을 추진하고 있으니 정말 몰염치하다. 사실상 챗GPT와 교체는 어려워도 내년 4·10 총선에서 대폭적인 물갈이가 요구된다는 민의는 들끓는다. 정치권이 환골탈태해야 마땅하다.
2023-02-2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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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계묘년 정치, 뭣이 중헌디?
‘국궁진췌 사이후이(麴窮盡膵 死而後已).’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며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는 의미다. 속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비장한 결심이 담긴 표현이다. 이는 228년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 제갈공명이 두 번째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유비의 아들인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후출사표’에 나온다.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문장이다.
이 문구를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 사용했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은 1956년 쑨원 탄생 90돌을 기념해 중국을 개조하고 변화시키는 데 평생을 바친 쑨원을 “진정으로 ‘국궁진췌 사이후이’에 충실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평생 간직한 좌우명으로도 유명하다. 1989년 덩샤오핑 전 주석이 은퇴 선언 후 권력 이양을 시작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된 장쩌민 전 주석은 같은 말로 다짐해 신임을 얻기도 했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지금, 한국 정치에도 유효하다.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정신 자세이자 시급한 업무 태도지 싶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몹시 힘들었던 지난해보다 어려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여 국민 생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한 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경제위기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가 여야 정치권에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은행(WB)은 이달 10일 올 세계 경제성장률이 1.7%에 그친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작년 6월 전망한 3.0%보다 1.3%포인트나 낮췄다. 글로벌 경제가 성장 둔화로 극심한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1.7% 성장률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수출로 먹고살 만큼 세계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받아 휘청거릴 우려가 크다. 최근 정부와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모두 올해 수출 부진과 내수 경기 둔화 탓에 1.6~1.8%의 저성장을 예측한 게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이에 따른 고통은 오롯이 국민 몫이다. 이미 직장인과 자영업자 등 대부분 서민은 소득이 변함없거나 감소한 반면 물가와 금리는 계속 치솟아 정말로 살기 팍팍하다며 아우성이다. 저소득층은 생활고에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더욱이 연초부터 전기료가 대폭 올라 가계 부담이 커졌다. 시내버스와 택시, 도시철도 등 대중교통 요금과 각종 보험료마저 줄줄이 인상될 조짐을 보인다. 혹독한 민생경제 한파 속에 예년에 비해 일찍 다가온 설 명절을 쇨 엄두가 안 난다는 사람이 숱하다. 이러다가 자칫 민생이 도탄에 빠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 경제과 국민의 삶이 녹록지 않는데도 실효적인 처방이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와 민생을 위한 정치가 사실상 실종된 까닭이다. 집권당과 거대 야당이 엄중하고 위급한 경제난과 민생고는 뒷전인 채 허구한 날 이념이나 당리당략을 앞세워 대립한다. 사사건건 충돌하며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은커녕 정치 혐오감과 불신을 안긴다. 가뜩이나 힘겨운 국민의 피로감을 가중시킨다. 여야 간 일상화한 정쟁은 마치 집토끼와 산토끼가 하늘땅에 온갖 천적이 우글거리는 들판에서 먹이에 눈멀어 무방비 상태로 다투는 꼴이다. 그 결과가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무장력 강화 움직임, 중국의 한국인 단기비자 발급 중단일 테다. 여야는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을 두고도 대책 마련 대신 전·현 정권의 책임 공방만 일삼아 북측의 분열 책략에 놀아나는 모양새다. 여야가 그동안 정쟁에 낭비한 열정과 시간의 절반이라도 경제 활성화와 국민 고충 해소에 쏟았더라면 복합적으로 닥친 위기 중 일부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여야가 정쟁을 멈추고 여러 현안 해결에 머리를 맞대 몰두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명운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모든 역량을 모아 협치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여야는 신년 벽두부터 ‘윤심(윤석열 대통령 의중)’ 받들기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탄’으로 바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벌써부터 관심이 내년 4·10 총선으로 쏠리고 있다. 여야가 최우선적으로 좇아야 할 대상은 양측의 강성 지지층을 뺀 국민 다수의 민심이다. 2016년 영화 ‘곡성’을 통해 사회의 유행어가 됐던 명대사를 인용해 여야의 행태에 대해 “도대체 뭣이 중헌디?”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정치권이 ‘국궁진췌 사이후이’ 실천을 위해 경쟁하기 바란다. 지독한 어려움이 예견된 올해, 정치가 국민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느 당이든 민의의 심판을 받기 십상이란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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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15분 도시' 정책과 민관 협치의 결합 필요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행복도시 부산.’ 박형준 부산시장이 행정 역량을 집중하겠다며 내건 시정 구호다. 박 시장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15분 도시’ 조성을 1호 공약으로 제시한 데 이어 민선 8기 시정의 3대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삼고 있다. ‘15분 생활권’ 환경을 구축해 시민들이 편리하고 행복하도록 할 목적에서다.
최근 15분 도시 조성을 위한 내년도 주요 사업이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시의회가 상임위원회별로 사상 최대인 15조 3480억 원 규모로 편성된 2023년 부산시 예산안을 심사하면서 15분 도시 관련 사업 예산을 줄줄이 삭감한 것이다. 지난달 29일 시의회 기획재경위는 15분 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41곳에 어린이 복합문화공간 ‘들락날락’을 개소하려는 예산 200억 원 중 무려 15%인 30억 원을 깎았다. 건설교통위도 15분 생활권 정책공모 사업비 212억 8200만 원 가운데 30억 원을 줄였다. ‘걸으면서 행복한 15분 도시’를 위한 차 없는 거리 만들기의 경우 전체의 86%나 되는 18억 원이 줄어든 3억 원만 반영됐다.
내년도 예산안은 7일 시의회 예산결산특위의 심사와 의결 후 8일 열리는 본회의에서 확정된다. 대폭 깎인 예산이 계수조정을 통해 증액되지 않은 채 최종 처리된다면 박 시장의 대표 공약 사업은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는 올해 시행 2년 차에 접어든 15분 도시 사업이 적극적인 시민 의견 수렴보다는 보여 주기식 탁상행정에 치중한 결과로 보인다. 사업의 구체성이나 시급성이 떨어지고 다른 사업과 중복된다는 시의회의 지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사업성이 부족하고 성과도 미흡하며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점도 시의회가 내세운 예산 삭감의 이유다. 오죽하면 박 시장과 같은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시장의 핵심 공약 사업 예산안을 단호하게 칼질했을까 싶다.
이같이 냉엄한 질타를 받는 행정으로는 살고 싶은 도시는커녕 세부적인 15분 생활권 구현조차 요원할 뿐이다. 이들 사업은 시민 삶의 질과 생활 편의와 직결된 정책이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바람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추진돼서는 안 된다. 행정기관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강행 역시 곤란할 테다.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요구와 의견을 잘 반영하는 맞춤형 시정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시민 제안을 받는 등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업 의제를 발굴한 뒤 숙의 과정을 거쳐 내실과 실효성 있는 사업계획을 세우는 부단한 노력이 간절하다.
이런 까닭에 부산시가 2019년 7월 관련 조례까지 제정하며 도입한 민관 협치 제도가 박 시장 임기 들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시와 시민들이 연대해 지역발전 정책 마련과 각종 문제 해결에 머리를 맞대기로 한 민관 협치가 시정 구호와 15분 도시 정책 실천에 매우 유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 시장은 민관 협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데다 협치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도 부족해 보여 아쉽기만 하다.
시와 박 시장의 민관 협치에 대한 미온적인 모습은 지난 8월 단행된 조직 개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민관 협치 사업을 담당해 온 협치정책과를 총무과 내 협치조정팀으로 축소하고 담당 인력을 줄였다. 협치정책과가 맡은 업무들은 총무과와 자치분권과, 예산담당관실 등으로 분산했다. 민관 협치 사업의 컨트롤타워를 없애 버린 셈이다. 기능이 약화된 조직과 인력으로는 ‘부산시 민관 협치 활성화를 위한 조례’에 걸맞는 제도 활성화와 1차 협치 활성화 기본계획(2022~24년)상의 수많은 사업 전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 시장은 2019년 9월 시와 시의회·시민단체 관계자, 학계 전문가, 시민활동가 등 29명으로 발족한 부산시민협치협의회의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지만, 정기 회의(연 4회) 개최와 참석에 등한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민관 협치가 더불어민주당 출신 전임 시장의 작품이라 그럴 것”이란 추측성 뒷말도 나오는 실정이다.
당초 민관 협치는 복잡다단한 세태에 따라 급변하고 다변화해 행정력만으론 풀기 어려워진 지역과 시민사회의 과제들을 시민 참여와 민간과의 협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건의를 시가 수용해 만든 새로운 협력 모델이다. 정당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정착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요청하는 제도라고 하겠다. 시의 15분 도시 정책이 활기를 띠고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민관 협치 제도와 결합하는 게 효과적이다. 더욱이 민관 협치 활성화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인 지방자치제 안착에 필수적인 시민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절실한 일이다. 여기에 시와 시장의 인식 전환과 태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2022-12-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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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청산해야 할 정쟁·막말 국감
여야 간 정쟁이 심각하다. 지난 4일 시작돼 막바지에 이른 국회 국정감사를 지켜보고 있으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국감이 정쟁만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을 보여서다.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논의가 펼쳐지길 원하는 국민의 바람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 책임 방기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올 국감은 21대 국회의 후반기 원 구성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맞이한 국감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야가 그 어느 때 국감보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알차게 진행해야 할 당위성이 컸다. 국감의 근본적인 목적도 정부의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입법부의 감시와 대안 제시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물가·고환율·고금리에 저성장까지 겹친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과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 핵 위협으로 경제·안보 상황이 위중해진 시기다. 국가적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키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 실속을 찾는 정책 국감이 요구됐다.
한편으로는 국감에서 여야의 힘겨루기가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정권 교체로 입장이 뒤바뀐 여야가 그동안 보여 준 ‘네 탓’ 공방이 국감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던 게다. 국민의힘은 전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과오를 찾아내 질타하기에 열을 올렸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무능과 윤 대통령 주변에서 불거진 의혹에 대한 공세로 맞서 왔다.
기대는 무너지고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국감장은 본연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여야가 상호 비방을 되풀이하며 극명하게 대치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싸움터로 변질됐다. 총알만 없을 뿐 혈투가 난무하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모양새다. 18일 국회 법제사법·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선 여야의 난타전이 절정에 달했다. 이날 민주당 이 대표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의혹을 두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감사가 중단됐다. 다른 상임위별 국감에서도 당리당략이나 감정을 앞세운 감사 보이콧과 중단, 정회, 퇴장 등 파행이 잦아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쟁 국감 과정에서 막말과 반말이 빠지지 않아 여야 대립을 격화한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한마디로 맛이 갔던지 제정신이 아니다”, “개나 줘버려”, “버르장머리 없다”, “너나 잘하라” 등등. 예의나 품위와 너무나 동떨어진 저질 표현이다. 이런 발언은 으레 치졸한 트집 잡기로 이어져 소모적인 말다툼이 지속된다. 꼬리에 꼬리를 문 언쟁으로 사태 봉합은커녕 폭언과 인신공격의 수위가 한층 높아지기 마련이다. 고함, 호통, 으름장, 삿대질도 동원되기 일쑤여서 여야 간 증오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결국 이번 국감에서 국민의힘은 민주당 이 대표를 포함한 야당 의원 4명을, 민주당은 정진석·권성동 등 여당 의원 3명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했다. 서로 독기 서린 말로 물어뜯는 데 혈안이 된 이전투구의 결과다. 게다가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식이라 몰염치하기도 하다. 이같이 충돌과 파행이 거듭되는 동안 민생과 경제 문제를 다루는 정책 질의는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국감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빵점짜리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정쟁에 골몰하고 알맹이는 없는 국감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거나 “신물 난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맹탕 국감’이란 비판과 함께 국감 무용론마저 제기될 정도다. 정치를 둘러싼 국민의 불신과 혐오, 무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27년 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서 ‘4류’로 지적받은 정치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1996년에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정쟁을 ‘코미디’라고 빗댔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여야의 거대 양당은 각종 선거, 정기회, 임시회에서도 시종일관 철천지원수처럼 사활을 걸고 싸우는 경우가 다반사다. 협치의 가능성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양측이 고심 끝에 5년 만에 정권을 바꾼 민심의 준엄한 경고를 벌써 망각한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국민들은 정쟁에 넌더리가 날 지경인 반면 국회의원들은 싸움을 주업으로 착각한 듯싶다. 일부 성실한 의원은 억울하겠으나 시급한 민생 경제의 안정과 국민의 원성조차 뒷전인 국회는 퇴출감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은 늦게나마 국감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내년, 내후년 국감도 정쟁과 막말로 얼룩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에 쏟아야 마땅한 정치적 역량과 시간을 낭비하며 국민에게 더 큰 실망을 안길지 모른다. 별다른 생산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쟁 일변도 정치판의 면모를 일신하기 바란다. 환골탈태가 국민 모두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2022-10-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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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중국의 한국 역사·문화 침탈에 대한 고언
#황하(黃河) 중류 지역을 무대로 한 중국인(한(漢)족)의 첫 왕조는 하(夏)·은(殷)·주(周)다. 가장 앞선 신화시대의 하나라는 비슷하거나 더 오래된 시기에 황하 하류를 포함해 현재의 중국 북부와 만주 지역을 차지한 우리나라 고조선의 제후 부족국이었다. 하·은·주를 다스린 계층은 나중에 중국인들이 동이(東夷)족이라고 부른 우리 한(韓)민족의 선조들이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환국(桓國)과 배달국, 고조선은 중국 상고시대부터 대륙을 지배하며 중국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부여 출신인 고구려 시조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河北)성에 있었던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해 영역을 넓혔다.
#만주 땅에서 일어나 중국 역사를 장식한 금(金)과 청(淸)은 한국 고대사를 빛낸 고구려·발해의 유민들이 말갈족 후예들과 함께 만든 국가다. 고구려를 구성한 두 축인 한민족과 말갈족은 나라가 망하자 발해를 건국했다. 상당수 발해인은 국운이 기울 때 한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고토에 남아 대를 이어 갔다. 그 자손들은 같이 어울려 살던 말갈족의 후신인 여진족과 뜻을 모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중국 북송(北宋)을 정벌한 뒤 도읍을 연경(베이징)으로 옮겨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장구한 세월 동안 만주에 거주한 고구려·발해 유민의 후손들은 여진족 각 부족이 만주족으로 통합해 세력을 키우자 이들과 합세해 후금(後金)을 개국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明)나라를 무너뜨려 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한반도 대신 만주 잔류의 길을 택한 또 다른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 전자는 1911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내용과 민족 사관을 가진 재야 학자들의 학설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고증하기 어렵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사실이 많다는 이유로 정통 사학계와 논쟁을 빚어 온 사안이다. 후자는 동북아 강대국으로 군림한 고구려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린 발해, 만주를 터전으로 해 중국 본토까지 진출한 금·청나라 정사를 바탕으로 꾸며 본 가상 역사다. 기개가 대단했던 고구려·발해인의 후손들이 옛 북방 영토에 눌러앉아 살면서 실제 겪었을지도 모를 삶의 궤적을 상상해 봤다.
만일 이러한 두 얘기를 한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인정한다면, 중국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중국 정부의 강한 반발은 물론 전체 중국인의 공분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남의 역사를 날조하고 침탈하는 처사라며 맹비난을 퍼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은 극에 달하고 한·중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지 싶다. 중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는 등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가운데 양국 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 사태가 장기화할 수도 있겠다. 둘 중 어느 하나만 한국의 공식 인정이 이뤄지더라도 중국은 강력한 대처를 경고하며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중국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 2002년부터 과거 만주 일대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중국사로 일방 편입시킨 국책사업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역사관이 도를 넘은 탓이다. 고구려·발해사를 고대 중국 지방정부의 역사라고 외치는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부여도 지방정부라며 억지 주장을 펼친다. 중국은 7월 26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에 고구려·발해를 고의로 지운 한국 고대사 연표를 버젓이 전시해 우리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중국 민관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김치와 한복도 자기네 것인 양 공공연히 우기고 있다. 이웃나라 사람들의 뿌리를 부정하고 민족 정체성을 뒤흔드는 역사 찬탈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 말처럼 한국 고유문화 다수가 중국 전통문화에서 비롯됐다면, 그것은 중국 문화가 상고시대에 황하 이북 지역에서 발흥해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한민족의 영향을 받은 방계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실제로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동이족이 꽃피운 요하문명(또는 홍산(紅山)문화)이 2000~4000년 뒤처진 황하문명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유적이 중국 북동부에서 속속 발굴됐다. 중국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한국사 침탈 행보를 멈춰야 한다. 올 한·중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양국이 우호를 증진하며 동반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역사는 치욕이든 자랑거리든 있는 그대로 새기고 알려야 마땅하다. 후대가 교훈 삼아 밝은 새 역사를 써 나가야 해서다. 동서고금의 진리는 형체일 뿐인 국가는 없어질 수 있어도 정신인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 준다. 중국이 앞으로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허구로 점철된 역사를 만들 경우 중국의 미래 세대는 가짜에 오염된 중국사를 배우며 착각에 빠져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2022-09-2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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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역동적인 부산항, 가덕신공항으로 비상해야
‘노인과 바다의 도시’. 초고령화 도시로 쇠락해 가는 부산의 실상을 헤밍웨이가 쓴 명작 소설 ‘노인과 바다’의 제목에 빗댄 자조적인 문구다. 이 표현은 부산경제의 오랜 침체로 지역 청년들이 취업이나 창업을 위해 타지로 떠나는 현상이 심화하면서 세간에 회자한 지 오래다. 부산은 인구 유출과 감소로 제2 도시 위상마저 위태롭다.
부산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체념한 채 가만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으로 더 악화하기 전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노인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면, 바다에서라도 재도약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야 마땅하다. 그 방법으로는 부산에 발달한 수산업의 활성화나 해양관광, 해양레포츠, 해양과학기술, 해양바이오 등 해양 관련 신산업 육성이 있을 테다. 무엇보다 올해로 개항 146주년을 맞은 부산항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항구에 기반한 해운·항만·물류산업에서 막대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선진국으로 잘 먹고 잘살듯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부산항이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 언제든지 항만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노력을 집중할 경우 미래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 든든한 밑바탕이 돼서다. 지난해 1년간 부산항에서 처리된 물동량은 2020년에 비해 4% 늘어난 2270만TEU(1TEU는 길이 6m 컨테이너 1개)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물류대란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극복하며 이뤄 낸 성과라 의미가 크다. 게다가 부산항은 부가가치가 높은 환적(중계) 화물 처리량이 싱가포르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동북아 물류 허브’ 항만이다. 이는 지역 해운·항만·물류업계 종사자들이 제 역할에 매진한 결과다.
올 들어선 부산항의 경쟁력을 키우는 경사가 잇따라 고무적이다. 다음 달 2일 부산신항 남컨테이너부두 내 6부두 개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인근 5부두 개장 후 신항 추가 개장은 10년 만이다. 연간 220만TEU 처리 능력을 가진 6부두의 3개 선석이 가동됨으로써 국내 선사와 수출입 업체들이 수년째 시달리는 만성적인 물류 적체 현상의 완화가 기대된다. 이 부두는 국내 항만 최초로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무인 안벽 크레인과 자동화 야드크레인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화물 처리 속도를 높이는 등 효율성 제고와 안전사고 예방이 가능해 부산항의 신규 물동량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앞서 24일에는 신항 배후부지(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4만 5608㎡의 대우로직스틱스 컨테이너 공영 장치장이 문을 연다.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하루 3580TEU를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다. 이로써 장치장 포화가 잦은 신항 일대 물류난 해소에 숨통이 트이지 싶다. 특히 다음 달 11~16일 부산항이 다양한 글로벌 물류기업을 파트너로 확보하고 국제물류 네트워크를 강화해 세계의 허브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 기간에 해운대에서 세계 물류인의 대축제인 ‘국제물류협회(FIATA) 세계총회’가 열리는 것. 이 행사를 찾는 145개국 4만여 개 회원 기업을 상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부산항의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려 엄청난 물동량 증대로 이어지면 금상첨화일 게다.
부산항 관리·운영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는 부산항의 활황세를 감안해 올 물동량 계획치를 지난해보다 3.5% 증가한 2350만TEU로 잡았다. 환적 물량은 5% 늘어난 1290만TEU다. 부산항의 특장점을 잘 살려 도전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좋겠다. BPA는 각각 내년과 2026년 최첨단 스마트 항만으로 개장 예정인 신항 서컨테이너부두 2-5, 2-6단계 선석 개발도 차질없이 진행해 부산항 경쟁력을 강화할 일이다. 때마침 정부는 최근 BPA를 공기업에서 기타공공기관으로 변경키로 했다. BPA는 독립성 보장에는 미흡하지만, 앞으로 기획재정부 간섭이 줄고 인사와 경영 등에서 자율성이 생기는 만큼 부산항 육성과 연관 산업 지원에 최선을 다하며 책임 경영을 펼쳐야 할 것이다.
역동적인 부산항은 신항 근처에 들어설 가덕신공항으로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다. 육해공이 결합된 복합물류는 세계적인 추세다. 2030부산월드엑스포를 겨냥한 신공항 조기 건설이 추진돼 2029년 24시간 운영되는 국제공항이 개항한다면 항만, 공항, 고속도로·철도망이 긴밀하게 연결된 트라이포트 체계가 구축된다. 글로벌 복합물류와 교통·관광 중심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에 따른 시너지와 경제적 파급효과는 추산하기 힘들 정도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이유다. 부산항이 하루빨리 가덕신공항의 날개를 달아 세계 초일류의 물류 허브로 비상하기를 바란다.
2022-08-2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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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폭염은 불공정한 재난이다
7일은 ‘작은 더위’라고 하는 소서(小暑)다. 무더위가 시작된다는 절기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로는 대서(大暑)를 낀 7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가 꼽힌다. 실제로 이 기간에 불볕더위나 가마솥더위로 표현되는 폭염 현상이 자주 찾아온다. 기상청은 체감온도가 섭씨 33도를 넘는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경우 폭염주의보를, 35도 이상 고온이 이틀 이상 계속되면 폭염경보를 각각 발령한다. 폭염특보 제도는 일사병 같은 폭염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2008년 처음 도입됐다.
부산에서는 지난 2일 오전을 기해 내려진 폭염주의보가 5일까지 나흘째 지속되면서 바깥 활동을 하기에 불편했다. 폭염이 이처럼 빨리 온 것은 이례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밤에는 최저 기온이 25도를 웃도는 열대야 현상이 기승을 부린다. 부산은 4일 새벽 최저 기온이 25.1도로 올해 첫 열대야를 기록한 뒤 이틀째 열대야가 나타났다. 이는 1914년 7월 1일 이후 108년 만에 가장 이른 것이다. 지난해 부산의 첫 열대야는 7월 12일 발생했다. 지금이 과연 초여름이 맞나 싶다.
올해 때 이른 무더위·열대야 기승
불볕더위 빈도·강도 커지는 추세
재해가 소외 계층에 불평등 안겨
저소득층 피해와 고통 더욱 심각
체계적 사회안전망 구축 급선무
국가·사회가 적극적 대응 나서야
전국적으로도 6월 말부터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요 며칠 전국 대부분 지역의 낮 최고 기온이 33도를 넘어서며 폭염특보가 발효됐다. 습도까지 높아 체감온도 35도를 넘기거나 열대야가 생긴 곳이 많았다. 기상청은 올여름 평년보다 기온이 높고, 푹푹 찌는 낮과 후텁지근한 밤이 이어지는 찜통더위가 잦을 것으로 전망한다.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번 여름이 국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2018년의 폭염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엄청나게 무덥진 않을까 걱정된다. 이미 올 폭염은 7월 중순께 폭염이 본격화한 4년 전보다 보름이나 빠르다.
2018년 7월의 폭염일수는 무려 15.4일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근 30년간 7월 평균 폭염일수 3.9일의 4배가량 되는 최악의 폭염 참사였다. 폭염에 따른 온열질환으로 48명이 목숨을 잃은 그해를 포함한 최근 10년간(2012~2021년) 전국 평균 폭염일수는 14.8일이다. 과거 30년 평균 11일에 비해 3.8일 늘어났다. 이 같은 수치들은 폭염의 빈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강도가 세지고 있다는 걸 대변한다. 자연현상인 폭염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 탓에 대형 재난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지난 1일 경남 창녕에서 40대 남성이 폭염주의보 속에 농산물 작업을 하다 숨지는 등 7월 들어 3명이 온열질환 증세로 사망했다. 안타까운 폭염 피해 소식이 들릴 때마다 자연재해의 불공정한 모습이 연상된다. 기후변화로 잦아진 폭염을 비롯한 각종 재난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목격해서다. 누구든지 다 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위기인데도 유독 저소득층이 큰 피해를 입고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리는 까닭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최근의 고물가·고금리 사태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폭염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지면 채소값 등 밥상 물가가 더욱 올라 가뜩이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생활고를 가중시킬 게 분명하다. 예년보다 일찍 무더워지자 지난달 전력 수요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일부 취약계층은 전기요금이 부담스러워 선풍기조차 종일 틀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는 실정이다. 7월부터 전기료마저 인상된 마당에 에어컨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더위에 장사 없다”는 속담도 있는데, 하물며 폭염이 안기는 고초는 오죽하겠는가.
그렇다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기약도 없는 탄소중립 정책이 활발해질 때를 바라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당장 급증하고 있는 온열질환자 최소화 방안 마련과 함께 기상 재해로 직격탄을 맞는 소외 계층을 꼼꼼하게 챙길 수 있는 사회안전망 강화가 급선무다. 자연재해가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심각한 규모로 더 자주 빚어질 것으로 예견되는 만큼 불가항력적인 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공동 대처해야 할 대상으로 접근할 때 재난이 초래하는 불공정·불평등성을 해소할 수 있을 테다.
이달에 민선 8기 지방정부와 제9대 지방의회가 임기에 들어갔다. 양측이 지방자치체 안착을 위한 생활정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충과 비애를 감안한 보다 근원적이고 적극적인 폭염 지원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코로나19로 지역 기초생활수급자가 27개월 만에 30% 가까이 폭증한 현실도 직시할 일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 유례없는 경제 위기와 재난을 극복하는 데 민생 안정을 최우선하는 정책과 협치가 절실하다. 폭염 같은 재난은 개개인이 아닌 국가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체계적이고 철저한 대응체계 구축에 나설 때다. 건강한 사회와 희망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폭염과 경제난에 방치된 가난한 국민을 외면해선 안 된다.
2022-07-05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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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맨홀 뚜껑… 도시 역사 숨 쉬는 안전장치
우리나라 인구의 91.8%가 국토 면적의 16.7%에 불과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27일 국토교통부와 한국국토정보공사가 발표한 ‘2021년 도시계획 현황 통계’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국내 모든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를 먼저 꼽지 싶다.
맨홀(Manhole)도 대표적인 도시 시설물 가운데 하나다. 제대로 된 번듯한 도시라면 모든 시가지에 걸쳐 상·하수도관과 도시가스관, 전기·통신선 등이 복잡하게 매설돼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몰려 살고 있는 도시의 원활한 유지와 편리한 시민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지하 인프라다. 이같이 땅속에 묻힌 숱한 기반 시설의 검사·수리·청소 등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구멍이 바로 맨홀이다. 맨홀은 도시민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각종 시설과 설비가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뻗어 있는 지하 세계와 연결된 통로인 것이다.
지난달 23일 밤부터 장마가 시작된 부산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 잦다. 길을 가다가 쏟아지는 비를 만날 때마다 자연스레 배수 상태를 확인하게 되고, 이어 바닥에 설치된 맨홀 뚜껑으로 눈길이 간다. 사람의 출입이 가능한 정도의 큰 구멍이 길바닥에 뚫려 있으니 추락 같은 안전사고 방지와 만반의 지하 구조물 관리를 위해 평소 덮개로 씌워두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맨홀 뚜껑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다. 뚜껑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이 요철 형태로 새겨져 있다. 미관상의 목적도 있지만, 사람과 차량이 뚜껑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마찰력을 높이려는 기능이 강하다. 맨홀 뚜껑은 비와 눈에도 부식이 적어야 하고 대형 차량의 무게까지 이겨내며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단단한 주철로 제작돼 내구성이 뛰어나다. 뚜껑에는 그 용도와 함께 설치·관리 기관의 휘장과 로고, 제원, 제조업체 명칭 등이 표시돼 있어 쓰임새와 설치 시기를 알려 준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맨홀 뚜껑 자체는 한 도시, 특정 지역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맨홀 뚜껑의 용도는 크게 상수도용, 하수도(오수·우수)용, 전기용, 통신용, 도시가스용으로 나뉜다. 2019년 2월 부산시가 지역 하수 시설 안전관리 차원에서 하수도용 맨홀 뚜껑 정비를 위해 도시정보시스템(UIS)에서 추출한 맨홀만 9만 5216개로 집계됐다. 다른 용처의 맨홀까지 헤아린다면, 부산 시내 전체 맨홀 뚜껑 개수는 몇 배나 늘어나게 된다. 부산의 경우 차도와 보도에서 5~20m 간격으로 각종 맨홀 뚜껑 네댓 개쯤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고로 2016년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에 59만 4000개의 맨홀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업계는 전국에 산재한 맨홀을 대략 150만 개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도처에 흔하게 널린 맨홀 뚜껑은 지하 구조물 형태에 따라 원형과 정사각형, 직사각형으로 제작된 게 많다. 십중팔구는 원형이다. 맨홀 뚜껑이 거의 대부분 둥근 이유는 원은 모든 방향의 지름이 같아 뚜껑이 원형 구멍에 빠질 염려가 없기 때문. 원형 맨홀 뚜껑은 어떤 방향의 폭도 모두 일정하므로 원형 구멍과 같은 뚜껑을 만들면, 뚜껑이 어떻게 놓이든 상관없이 안전하게 걸쳐져 구멍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반면 사각형 뚜껑은 대각선의 길이가 가로·세로에 비해 길어서 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간선도로와 이면도로 등 차도에 쓰이는 맨홀 뚜껑은 원형 제품이 일반적이다. 또 차도용 뚜껑이 자동차의 무거운 하중을 충분히 견디도록 만들어져 보도용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
부산에 깔려 있는 수많은 상수도용과 오수·우수용 맨홀 뚜껑은 ‘부산광역시’라는 문구가 적혀 있거나 부산시 휘장이 디자인된 것 일색이다. 1963~1994년 부산직할시 시절의 뚜껑도 있어 휘장의 변천사와 설치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95년 경남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기장군에서는 ‘기장군’ 단독으로 표기된 뚜껑도 보인다. 상수도 배기·제수변과 소화전, 도시가스 밸브 등 중요 시설 맨홀 뚜껑의 경우 ‘주정차 금지’ 표기가 돼 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차량으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해서다. 이들 맨홀과 일부 전기용 맨홀의 뚜껑에는 주차와 굴착 시 사람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표면이나 주위에 노랑·빨강·파랑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사람들이 늘 밟고 다니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맨홀 뚜껑은 조용히 도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제 역할을 다하며 역사를 써가고 있다. 고철값이 오르거나 경제난으로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절도범의 주요 표적이 되는 아픔도 겪는다. 가끔씩 관리 부실 탓에 뚜껑이 파손되거나 맨홀이 열려 있다가 안타까운 추락사고와 교통사고를 유발하기도 했다. 관할 지자체와 관리 당국의 철저한 관리가 요구되는 이유다.
급변하는 도시에서 오래된 걸 발견하는 즐거움은 각별할 테다. 재개발과 가로 정비사업, 훼손 등 갖가지 사유로 맨홀 뚜껑을 새것으로 교체할 때 옛것을 없애지 않고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 맨홀 뚜껑은 오랜 세월 우리의 발밑에서 안전을 지켜주며 도시의 진화 과정을 담아 온 문화자산인 까닭이다. 혹자들이 “맨홀 뚜껑은 도시의 지문”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요 며칠 동안 부산 16개 구·군 지역을 누비는 발품을 팔아가며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지닌 맨홀 뚜껑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봤다. 이 사진물이 누군가 뜻있는 사람이 부산의 맨홀 뚜껑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글·사진=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상수도용
상수도관과 연결된 맨홀의 뚜껑은 중앙에 한자 ‘물 수(水)’ 자 문양이 새겨진 게 대부분이다. 매우 드물게 ‘상수도’나 ‘수도’가 표기된 뚜껑도 있다. 세부적으로는 일반 소화전, 소방용 소화전(119), 유량계, 배기변(공기와 가스 배출), 공기변(공기 조절), 제수변(물 흐름 차단·조정) 등 용도가 있다. 표면에 ‘주차금지’라고 표기된 뚜껑이 많다. 이는 위급 상황과 수시 점검에 신속하게 대응할 목적에서다.
■오수용
각 가정의 생활하수 등 각종 오폐수가 흐르는 하수관 중에서도 오수관의 맨홀에 설치된 뚜껑마다 ‘오수’라고 표시돼 있다. ‘하수도’로 표기된 뚜껑이 부산에 아직도 있지만, 막상 찾기는 힘들다. 오수 맨홀 뚜껑은 오수관로에서 발생한 악취가 맨홀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 아예 구멍이 없는 게 특징이다. 주택가 이면도로와 골목길에서는 정화조용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수용
도시 여러 곳에 모인 빗물을 흘려보내는 우수관의 맨홀 뚜껑은 빗물이 지하로 잘 빠질 수 있도록 여러 군데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수용 맨홀 뚜껑은 각 제품마다 오수용과 같은 문양의 디자인에 구멍이 곳곳에 나 있는 형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포장길로 뒤덮인 도시에서 지표수의 원활한 배수를 위해 가장 많이 설치된 맨홀 뚜껑이다.
■공공 디자인 적용
인도 등 보행로에 깔린 각종 맨홀 뚜껑 중에는 각양각색의 보도블록과 조화를 이루게끔 디자인된 것도 있다. 도시 미관을 위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부산 중구 광복·중앙동, 동구 범일동, 부산진구 부전동 등 원도심의 일부 특화 거리는 낡고 오래된 맨홀 뚜껑의 교체가 이뤄지면서 용도에 관계없이 모든 뚜껑에 통합된 공공 디자인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부산시가 아닌 관할 기초지자체 이름과 지역 상징물을 새긴 뚜껑을 설치했다. 중구 남포동 비프(BIFF)광장의 부산국제영화제 로고를 적용한 맨홀 뚜껑이 대표적이다.
■전기용
전기용 맨홀은 한국전력공사(한전)가 관리한다. 여러 회선의 전력 케이블이 매설된 전력구 입구나 전기 배선 맨홀에 설치된 뚜껑에는 주로 ‘한전’ 또는 ‘전기’라는 글자가 크고 작은 크기로 새겨져 있다. 회사명 대신에 한전의 심벌마크가 있는 뚜껑 디자인도 많이 볼 수 있다. 교통 신호등 제어 등을 위한 경찰용 전기 맨홀 뚜껑도 거리에서 자주 보인다.
■통신용
도시의 땅속에는 전화선은 물론 인터넷망, 이동통신 중계국을 연결하는 통신선이 많이 묻혀 있다. 대로변에선 KT와 SK텔레콤, LG유플러스 등 국내 이동통신 3사의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KT가 민영화되기 전인 한국통신, 그리고 그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시기의 로고가 새겨진 뚜껑도 많이 남아 있어 국내 통신기업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 공기업으로 출범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모태가 되는 중앙부처인 체신부에서 설치한 맨홀 뚜껑(중앙에 ‘체’나 ‘체신부’로 표기)까지 지금의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신부→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KT 순이다.
■도시가스용
도시가스관이 지나는 지역 가운데 극히 일부 지점에 관리용 밸브가 있는 맨홀이 있다. 이 맨홀의 뚜껑에는 눈에 잘 띄는 노란색 바탕에 주정차를 금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차량의 주정차는 물론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가스 누출과 폭발 위험이 있는 시설에 대한 안전한 관리 때문일 것이다.
■서면 한복판의 부산대 뚜껑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인근 중앙대로변 보도에 부산대 마크가 찍힌 원형 맨홀 뚜껑이 설치돼 있어 궁금증을 일으킨다. 일반인이 육안으로 보면, 설치 시점과 용도를 알 길이 없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현재 부산경찰청이 신호등 관리 등을 위해 사용하는 시설로 알려졌다. 뚜껑 표면이 꽤 닳은 상태여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맨홀 뚜껑 생산업체가 주문량보다 많이 만들어 놓은 제품의 하나가 다른 공사장의 발주 때 끼어 들어가는 바람에 서면에 설치됐을지도 모르겠다.
2022-07-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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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이제는 지경학적 실리 외교 펼칠 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4개월 가까이 됐다. 장기화하는 이 전쟁을 계기로 주목받는 근대 인물이 있다. 영국 지리학자 해퍼드 존 매킨더(1861~1947)다. 그는 지리적 위치가 국제 정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지정학(地政學·Geopolitics)을 개척했다. 유라시아(유럽·아시아) 개념을 창시하기도 했다. 매킨더의 ‘심장지대(Heartland) 이론’이 우크라이나전쟁을 유발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그가 현세로 불려 나온 것이다.
매킨더는 저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에서 심장지대론을 펼쳤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지(동유럽)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 패권을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동유럽, 즉 심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진하려는 서유럽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간 오랜 갈등 끝에 발발한 게 우크라이나전쟁이라고 판단한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소재한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풍부한 광물자원, 세계 3대 곡창지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향하는 대규모 가스관 밀집 등으로 엄청난 가치를 보유한 국가다. 이 나라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 EU(유럽연합)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는 시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패권적인 러시아가 일으킨 이번 전쟁은 매킨더의 지정학적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는 건 당연할 테다.
우크라이나, 유럽의 격전지로 전락
한반도 역시 장기간 외세에 시달려
한·미·일, 북·중·러 신냉전 구도 형성
평화 구축 위해 슬기로운 대처 필요
‘경제가 곧 안보’ 인식 확산하는 추세
동맹 강화 속 다층적 외교 전개해야
매킨더의 지정학 관점은 한반도에도 적용된다. 예부터 강대한 대륙 세력과 만만치 않은 해양 세력의 간섭에 시달리고 침략도 자주 당했다. 반도 국가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 탓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다’는 ‘새우 콤플렉스’에 늘 짓눌려 지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4개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아슬아슬하게 이어 오는 줄타기 외교가 엄연한 현실이어서다. 열악한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도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장점으로 활용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뤄 내 천만다행이다. 1960년대부터 부산항을 기점으로 오대양을 누비며 무역 강국과 선진국으로 거듭나지 않았는가.
이런 가운데 남북 관계는 미·일·중·러 4강에 휘둘리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해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북핵을 반대하는 한·미·일과 북·중·러 진영 간 대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수년 전 시작된 미·중 양국의 세계 패권 경쟁이 촉발한 신냉전 구도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자리 잡은 셈이다. 자칫 한반도가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격전장이 된 우크라이나 같은 처지가 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한반도에 닥친 신냉전 시대를 잘 헤쳐 나가기 위해 지정학을 넘어선 지경학(地經學·Geoeconomics)적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지경학은 지리적 특성이나 인구가 경제, 특히 대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살피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해 유라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물류·경제 중심지로 성장한다는 전략은 지경학적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이에 힘입어 동북아에 남북을 고리로 한 경제공동체가 형성돼 세계 최대의 신성장 지대가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 싶다. 북한의 무력시위에 철저히 대응하되 대화의 노력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지난달 22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새롭게 출범시킨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한국이 동참하게 됐다. 또 나토가 오는 29일 스페인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에 우리나라를 글로벌 파트너 국가로 초청해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안보·외교 연대를 강화하고, 세계 중추국으로서 위상을 높이며 역할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반면 남북 평화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중·러의 반감을 사고 경제 제재가 이어질 우려가 있다.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안보 태세와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지경학적 외교 자세가 요구된다. 지난달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반도체 강국인 한국을 일본보다 먼저 방문해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서둘러 찾은 까닭을 참고할 만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차질에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미·중 기술 패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안보·경제’가 한·미 정상회담의 최고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안보’란 인식의 확산으로 지경학적 접근이 절실해졌다. 윤석열 정부가 다층적 실용 외교로 대처할 때다.
2022-06-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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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칼럼] 민주주의는 어떻게 농락당했나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1919년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 헌법 제1조의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나라 헌법 제1조와 흡사하다. 이는 1948년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바이마르 헌법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이다. 이 헌법은 독일 최초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자유와 인권에 대해 규정하는 등 근대적 헌법의 전형이 돼 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역사학자 벤저민 카터 헷 뉴욕시립대 교수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라는 저서가 있다. 바이마르 헌법에 기초해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독일 민주주의가 왜 무너졌는지를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현실 불만 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의 이기적인 음모가 결합된 민심이 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선출했다고 말한다. 또 히틀러가 무법적이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독일 국민을 불행으로 내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급격히 파괴했다는 게다.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민주적으로 붕괴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히틀러 독재 탓 바이마르 헌법 실종
민주당 전횡에 ‘반민주적’ 비난 쇄도
다수당 힘 과시 편법·꼼수 동원 잦아
‘검수완박’ 입법 추진 강행이 대표적
정권 교체로 이어진 현실 직시해야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 혁신 필요
이같이 뼈아픈 민주주의의 상처는 먼 나라 얘기거나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집권당에 의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촛불 민심에 힘입어 탄생한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이 걸핏하면 절대다수 의석의 위력을 행사하며 안하무인격으로 독주해 온 행태가 그렇다.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워 온갖 편법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능멸한 경우가 여러 차례다.
최근 들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입법화하겠다며 보여 준 무리한 폭주 행보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중대 입법인데도 국민 의견 수렴과 공감대 형성 같은 사전 절차를 묵살했다.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마련한 법안이 허점투성이여서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4월 국회 처리를 강행하려고 들었다. 엄청난 부작용이 예상되는 졸속 법안이라고 지적한 각계의 반발과 반대 여론이 거세져도 의석수만 믿고 입법 추진을 밀어붙이려 한다. 문재인 정권의 각종 비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원천 봉쇄할 속셈으로 의심될 정도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하는 절차적 정의를 짓밟는 반민주적 폭거라는 비난이 무성한 이유다.
급기야 지난 22일 검수완박을 둘러싼 여야 간 충돌을 우려한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이 나오기 직전에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위장 탈당하는 꼼수까지 등장했다. 민주당이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 안건조정위원회의 무소속 몫까지 차지해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낼 목적에서다. 오죽하면 당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범여권인 정의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테러”라고 규탄했을까 싶다.
민주당은 2020년 12월에도 여권인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을 야당 몫 안건조정위원으로 선임하는 방법 등으로 야당의 강한 반대를 뚫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안건조정위는 여야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자는 취지에서 최대 90일의 숙려기간을 두고 도입됐다. 민주당이 이를 입법 독주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는 셈이다. 앞서 2019년 12월 민주당은 공수처법 제정안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시행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회기 끊어 가기 수법으로 제1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강제로 무산시켰다. 특히 2020년 3월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해 스스로 만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때그때 정국에 따라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 모든 처사는 민주주의를 농락한 흑역사로 평가될 만하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민주당이 정작 정치 민주화에 역행해 대의 민주주의를 망치는 4류 수준 정치를 펼친 꼴이다. 당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비민주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9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다음 달 10일 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야당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동안 민의와 동떨어져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내로남불’에 익숙한 정권 입맛에 따라 입법 횡포를 부린 결과임을 직시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곧 출범할 윤석열 정권은 히틀러의 독재가 낳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죽음과 민주당의 전횡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오로지 국민의 뜻에 관심을 두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해야 마땅하겠다. 이는 또한 여야 양쪽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상적인 국회 운영과 협치로 대의 민주주의 정신을 살려 나갈 때 국민의 신뢰와 지지는 저절로 뒤따르지 않겠는가. 높아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의 혁신이 절실하다.
2022-04-26 [1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