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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관문의 섬' 가덕도, 비상하다
가덕도에 가려면 하단에서 환승해야 한다. 을숙도 지나 명지 녹산 건너 부산신항을 따라가면 그 섬에 닿는다. 낙동강 하구에 떠 있는 섬이지만 뭍과 가까운 대개의 섬이 그렇듯 개발 바람으로 이미 육지화된 지 오래다. 진해 용원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던 기억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고, 가덕도는 부산신항과 거가대교가 들어서면서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이 되었다.
가덕도가 내려다보이면 ‘벌써 한국이구나’ 생각이 든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 대마도가 보이면 절반쯤은 왔고, 가덕도와 낙동강 하구의 섬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오면 부산이고 한국이다. 제주 가는 것보다 더 짧은 비행 거리에 일본이 있고 보면 부산과 일본, 특히 규슈는 만만치 않은 관계라는 사실을 대한해협의 하늘 위에서 실감하게 된다. 가덕도는 국경의 섬이자 경계의 섬인 것이다.
부산이라는 이름 앞에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관문 도시일 터이다. 관문(關門)은 국경이나 요새 따위에 드나들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길목을 뜻한다. 부산을 지켜 온 부산진성 앞 돌기둥에는 동쪽에 ‘남요인후’(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다), 서쪽에 ‘서문쇄약’(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이라는 글귀를 각각 새겼다. 관문도시 부산의 진면목이 거기에 있다.
그 부산진성의 전방에 다대포의 다대진성, 그 앞에 가덕도의 가덕진성과 천성진성이 있다. 특히 천성진성은 근래 부산의 유일무이한 이순신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부산시민의 날인 10월 5일은 부산포해전 승전일인데, 부산포해전 승리를 위해 이순신 장군이 천성진을 적극 활용했다는 게 부산시립박물관의 주장이다. 가덕도 연대봉 봉수대는 대마도 방면 왜구를 감시하던 곳이다. 가덕도는 부산의 최전방, 한국의 지오피(GOP)였던 셈이다.
가덕도는 왜구와 일본군의 수중에도 떨어질 정도로 경계를 오갔다. 눌차왜성을 비롯하여 임란 때는 왜군에 가장 오래 점령됐고, 수시로 왜구의 소굴로 전락했다. 개항 이후로는 일제가 러일전쟁에 대비해 1905년 외양포에 진해만요새사령부와 포병대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해 새바지항에 인공동굴 여러 개를 파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관문 노릇을 했다.
가덕도는 북단에 부산신항의 남컨테이너터미널이 자리 잡으면서 섬의 면모를 일신했고, 터미널은 진해만 쪽으로 계속 매립하여 확장되는 추세다. 남단에는 가덕신공항이 2024년 말 착공하여 2029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가 14일 개최한 가덕신공항 기본계획 수립용역 중간 보고회에 따르면 육·해상 매립 방식으로 가덕신공항이 추진된다. 가덕도는 이제 남에는 가덕신공항, 북에는 부산신항, 가운데는 거가대교가 지나 육로와 해로에다 하늘길까지 갖춘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공항 배치안을 보면 가덕도 남단에서 잘록한 모양으로 마주 보는 대항항과 새바지항은 건드리지 않고 그 아래 국수봉(265m)과 남산(188m)을 절취해 평지로 만들고 해상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공항이 들어선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 발트함대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포진지를 비롯한 외양포 마을과 국수봉 쪽의 화약고·관측소·산악 보루 등 유적지는 사라지게 된다. 동백군락지와 산림도 훼손 위기를 맞는다.
부산 시민의 오랜 염원에 힘입어 착공과 개항 시기를 못 박은 가덕신공항의 정부 로드맵이 마침내 나왔다. 2030부산엑스포 유치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는 데다 4월 2일부터 시작되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를 앞두고 신공항의 개항 시기를 2029년 말로 조정한 것이다. 하지만 환경단체 등 다른 시민사회 쪽에서는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분명하고도 꾸준하게 내 온 것도 사실이다.
가덕신공항이 부산 재도약의 모멘텀이자 지역 균형발전의 상징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개발과 보존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 어려워진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지역사회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단합된 노력으로 가덕신공항 로드맵이 나온 만큼 신공항이 ‘24시간 안전한 남부권 관문공항’으로 자리 잡기를 소망할 뿐이다.
부산의 최남단 가덕도는 봄이 오는 길목이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낸 올봄 초입에 찾은 가덕도는 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봄꽃이 앞다퉈 피는 가운데 뭍의 바닷가처럼 섬의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서 상춘객을 유혹했다. 관문도시 부산의 관문인 가덕도가 이제 비상한 시절을 맞았다. 경계를 넘어 세계로 비상할 가덕도가 교통의 요충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시구처럼 세계와 소통하는 ‘그 섬’이었으면 한다.
2023-03-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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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다시, 동천의 기적
산이 많아 처음에는 부산(富山)으로 불렸던 부산(釜山)의 그 많고 많은 산 중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백양산이 제격이다. 부산의 중심에 자리 잡아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서면 도심과 그 너머 북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까닭이다. 선암사 극락전 앞마당에 서면 백양산에서 발원한 동천의 하구와 만난 바다가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면서 유유한 강줄기로 이어져 절집 이름이 애초에 왜 견강사(見江寺)였는지 짐작게 한다.
바다와 강, 산을 두루 품어 부산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하지만 산을 자주 찾는 이라면 산과 강, 바다는 굳이 나눌 게 못 된다는 것을 안다. 산에서 강이 나오고 그 강이 바다를 이루기에 산은 물이요, 물은 곧 산이다. 산신과 바다의 신 용왕을 하늘 가까운 산에 있는 사찰의 삼성각에서 두루 만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부산은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에 터 잡고 낙동강, 보수천, 동천, 온천천을 비롯한 수영강 등을 젖줄로 삼는다.
독일에 라인강의 기적, 서울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부산에는 ‘동천의 기적’이 있다. 라인강과 한강이 독일과 한국의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의 상징이라면 동천은 한국 산업화와 부산 도시화의 견인차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 LG그룹의 밑거름인 락희화학과 금성사를 비롯하여 조선방직, 동명목재, 성창기업, 국제그룹, 화승그룹, 넥센그룹, BN그룹, 동성화학, 송월타올 등 국내 유수한 기업의 터전이었다. 산업화 물결에 맞춰 도시화도 서면 번화가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진행됐다.
부산의 도심·부심 자리를 놓고 광복·남포동의 보수천 유역과 경합을 펼쳐 온 동천 유역은 ‘똥천’이라는 말에서 보듯 옛 영화를 뒤로하고 몰락의 길을 재촉해 왔다. 한때 부산의 관심은 되살아난 온천천을 비롯하여 센텀시티와 마린시티가 있는 수영강 유역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 악취와 오염의 대명사였던 동천은 백년하청이요, 강변의 문현금융단지도 더디기만 했다. 그렇게 지리멸렬을 거듭했고, 소생 불능의 판정을 받은 듯 시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최근 저녁 자리를 마치고 산책길에 나선, 부산시민회관에서 요즘 핫하다는 전포 카페거리에 이르는 동천변에는 봄밤의 달콤함이 묻어났다. 문현금융단지 앞 보행덱에는 제법 많은 시민이 오갔고, 가벼운 운동을 하며 담소를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BNK 본점, 기술신용보증기금 본점, 뮤지컬 전용 극장 드림씨어터, 증권박물관 등의 네온사인이 낮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안겼다.
올 하반기 부산 이전이 확정된 국책은행 KDB산업은행 본점이 여기에 가세한다면 금융중심지 부산은 날개를 달게 되는 셈이다. 상반기에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고 하반기 공공기관 2차 이전 때는 반드시 부산에 올 수 있도록 정부와 부산시, 산은 이전단을 중심으로 한 치의 차질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출입은행과 수협중앙회 등이 잇따라 부산에 오는 데 미리 탄탄대로를 닦는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2009년 서울 여의도와 함께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부산 문현금융단지는 15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금융중심지라는 이름값부터 하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회사 167곳 중 98%(164곳)가 서울에 쏠린 극심한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국제 금융회사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블록체인 특구 부산에 걸맞게 핀테크와 블록체인 기술, 금융을 융합한 디지털자산 거래 플랫폼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마침 부전천 복원사업도 다시 시동이 걸렸다. “생태하천 사업으로 보기 어렵다”며 2018년 환경부가 퇴짜를 놓았지만 지난해 말 환경부 공모에 선정돼 국비 확보의 길이 열렸다. ‘물관리 일원화’로 환경부가 생태 업무에다 치수 업무까지 맡으면서 사업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광무교~롯데백화점 750m와 영광도서~동해선 굴다리 550m의 복개도를 걷어 내고 하층부는 치수, 상층부는 친수 기능을 각각 맡는 이층식 하천으로 공원화된다. 윗물인 부전천이 맑으면 아랫물인 동천도 맑아지게 마련이다.
2032년 부전천 복원 사업 완공에 맞춰 동천 해수 도수 사업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0년부터 바닷물을 끌어와 광무교, 범3·4호교, 성서교 등 6곳에 방류해 왔지만 목표치인 4등급 근처도 못 가는 최하위 5등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동안 헛돈 345억 원만 날린 셈이다. 오염된 바닷물로 동천을 씻어 내렸는데, 바닷물로 민물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마뜩잖다.
백양산에서 발원한 동천이 생태적인 건강을 회복한 채 서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면 부산의 미래이자 희망이 될 북항의 바다와 만나게 된다. 2030부산엑스포가 유치되면 동천 하구에 있는 미군 55보급창과 자성대부두는 엑스포의 주 무대로 단연 기대를 모은다. ‘다시, 동천의 기적’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다.
2023-03-0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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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북항의 봄, 엑스포 맞으러 가자
북항에도 봄이 왔다. 부산역과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잇는 공중보행교를 따라 걸으면 바다를 배경으로 거느린 북항재개발사업지가 한가득 눈에 들어온다. 보행덱, 보도교로 이어진 친수공원과 경관수로에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봄 햇살이 잘게 부서지고 있다. 랜드마크 부지 내 야생화단지는 벌써 푸른빛을 머금었고, 여차하면 유채꽃 꽃잔디 금계국의 꽃망울을 잇따라 터뜨릴 기세다.
점심시간이어서인지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삼삼오오 북항 친수공원을 걷는 직장인의 모습이 이곳저곳 눈에 띈다. 1876년 개항 이후 146년 만인 지난해 개방되기 시작한 북항은 그동안 야금야금 금단의 땅을 해제해 왔다. 이제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오페라하우스 앞까지 들여놓았고, 영도가 바로 코앞인 그곳 전망대에는 바닷물에 손과 발을 담글 수 있는 ‘친수공간’이 마침내 완성됐다.
올봄에 들어와 친수공원은 더 봄단장에 열중이다. 시민들이 편하게 북항의 바다를 즐기도록 각종 편의시설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이쯤 되면 ‘부산 시민들이 슬리퍼 신고 와서 즐길 수 있는 북항’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어느 정도 현실화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보도교 위에서 내려다보면 해초까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맑은 물빛, 손과 발을 담그도록 유혹하는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는 한때 시민의 바다를 빼앗긴 북항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그런 북항이 어찌 부산 시민만의 것일 수 있겠는가. 부산역을 나와 부산항 하늘광장으로 이어지는 공중보행교를 따라 캐리어를 끌며 북항을 즐기는 외지인 관광객이 적지 않다. 게다가 국제여객터미널도 정상화됐다. 오사카, 후쿠오카, 시모노세키에 이어 오는 25일 대마도 항로까지 열리면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모든 뱃길이 복원되는 셈이다. 텅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터미널 야외주차장도 이제는 제법 차량으로 자리를 채우는 분위기다.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과 국제여객터미널을 끼고 있는 북항은 이제 국내외 관광객들도 즐기는 친수공간이 되었다.
유채꽃이 만발할 4월이 오면 북항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단초를 마련할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개최 후보 도시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이 4월 2~7일 한국을 찾는데, 현지 실사의 주 무대가 바로 북항이다. 특히 유채꽃이 필 해양문화지구의 랜드마크 자리는 부산엑스포의 메인 광장 역할을 할 곳이어서 더욱 이목이 쏠리고 있다.
부산시는 BIE 실사단이 가는 곳마다 스토리텔링을 입혀 부산엑스포 개최의 당위성을 강조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았다. 이번 실사는 엑스포의 운명을 가르는 건곤일척의 승부수가 될 전망이다. 6월에 열리는 BIE 총회에서 실사 결과 보고서가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오는 11월 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에 나서는 171개 BIE 회원국에 전달·공유된다.
2030엑스포의 시간표에서 본다면 11월 투표에 앞서 실사 보고서가 공개되는 6월이 아무래도 분수령이 될 듯하다. 그 6월의 승부를 사실상 결정짓는 게 현지 실사이고 보면 4월 부산 현지 실사에 엑스포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월 6~10일 진행되는 경쟁도시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의 현지 실사 분위기도 반드시 체크해야 할 사항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기에 그렇다. 양 도시 간의 초박빙 경쟁구도를 깰 절호의 기회가 바로 현지 실사다.
그렇다면 현지 실사 때까지 남은 한 달 보름은 천금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총력전 전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걸 다 쏟아붓고 부산과 한국의 미래까지 온전히 걸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엑스포특위를 앞세운 국회가 유치전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연말에 결판이 나는 부산엑스포 유치 여부는 내년 총선의 결과를 미리 알리는 바로미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권자이기도 한 부산 시민, 부울경 주민들은 엑스포를 위해 누가 열과 성을 다해 뛰어왔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엑스포 유치를 향한 대장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엑스포는 부산에 있어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엑스포 유치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걸어야 마땅하다.
북항에 봄이 오고 있다. 어느덧 슬세권(슬리퍼로 생활 가능한 세력권)으로 다가온 북항에 앞다퉈 달려가 엑스포를 맞이할 시간이다. 그곳에서 부산의 미래와 희망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산이라 좋다’(Busan is Good)는 감탄사를 섞은 자긍심을 물려줄 채비를 할 때다. 마침내 그 소망이 이뤄진다면 2023년은 부산의 새 이정표를 세운 찬란한 한 해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2023-02-1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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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변덕스러운 날씨, 표변하는 민심
벌써 입춘이다. 최강 한파로 불리며 기세등등했던 동장군도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게 자연의 이치인 듯하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터라 더 기다려 온 봄이다. 새봄의 문턱인 입춘을 넘으면 여름, 가을 지나 또다시 겨울은 찾아올 것이다. 돌고 도는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차면 기울고, 피었다가는 스러지는 게 세상살이의 섭리다.
부산은 이제 마냥 따뜻한 남쪽 나라만은 아니다. 한때 겨울이면 전국의 노숙자가 부산역으로 몰려온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부산이라고 해서 이상 기후의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가까운 한파라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만 내리면 설설 기는 부산의 눈사태(?)가 재현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외지인에게는 부산의 관문이랄 수 있는 부산역은 더는 추위로부터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막차를 놓친 70대 할머니를 최강 한파의 거리로 내쫓은 부산역 경찰의 비정과 몰인정은 시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면 맨 먼저 고통을 받는 게 어디 명함 내밀기조차 어려운 서민일 터이다. 기후 온난화로 변덕스러운 날씨는 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이고 보면 사람 대접받는 사람 사는 세상이 더 간절해진다.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게 정치 기상도다. 흐렸다 개었다 널뛰기를 거듭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처럼 정치는 민심의 바다 위에 뜬 일엽편주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을 때 변덕(變德)스러운 민심도 하나의 덕(德)이요, 나아가서는 표범의 무늬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표변(豹變)으로 민심은 진화한다. 변덕스럽고 표변하는 민심을 우습게 알다가는 낭패당하기 일쑤다.
봄이 오면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도 찾아왔다. 오는 3월 8일 예정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계기로 내년 4월 22대 총선을 향한 경주에 출발의 총성이 울린 인상이다. 특히 당내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나경원 불출마’가 부른 나비효과까지 겹쳐 민심 아닌 당심도 변덕과 표변을 거듭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천권을 둘러싼 여당발 총선 모드는 정치권 전체를 일찌감치 내년 4월로 시간 이동을 해놓았다.
온실 속 화초처럼 존재감 없는 의정활동으로 비판받아 온 부산·울산·경남(PK) 국회의원들을 향한 민심의 눈길도 곱지만은 않다. 폴리뉴스·뉴스더원·한길리서치가 지난해 11월 19~21일 실시한 여론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에 따르면 PK 유권자 82.5%가 21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잘 못한다’고 평가했고, 84.5%는 ‘절반 이상 교체’를 원했다. 22.2%는 ‘거의 대부분 교체’를 희망했다.
부산은 어떤가. 현역 의원 50% 이상은 교체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부산일보〉가 현행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3대 총선 이후 9차례의 선거 결과를 분석한 결과 현역 국회의원 교체율이 50.1%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공천에서 떨어지든 낙선하든 말이다. 절반은 물갈이된다는 전제 아래 내년 총선을 전망하는 게 보다 이성적인 태도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부산 국회의원을 향한 불만은 차고도 넘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따르면 부산 국회의원들의 공약 이행률은 25.83%로 4개 중 1개만 이행하는 데 그쳤다. 이는 전국 평균(26.95%)에 못 미치는 데다 인근 울산(42.61%)과 큰 차이를 보였다. 지난해 국회 본회의 안건 투표에서 부산 의원 18명 중 3분의 1인 6명은 단 1건의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아 ‘묻지마 찬성’의 안건 거수기로 전락했다거나 국회 발언 수가 전년도의 20~50%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민이 바라보는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회의원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고리원전 안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과 관련해 먼 산만 쳐다보던 국회의원들이 한 당권주자가 “임시저장 시설 용납 불가”라고 하자 일제히 관련 특별법 저지에 나서겠다고 한다. 엑스포 유치전에서 중요 변수가 된 가덕신공항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관문공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면서 2029년 조기 개항에 힘을 모아야 하지만 마찰음만 요란하다. 이러니 부산 국회의원들이 무슨 존재감이 있겠나.
부산 민심은 단순하다. 시민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공감하는 정치다. 부산을 위해 할 말은 하는 국회의원, 정치적 이해타산에 굴하지 않고 지역을 떠받드는 대변자다. 내년 총선까지는 1년여 시간이 남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요, 돌이키기도 힘든 시간이다. 그 속에는 부산의 운명을 건 2030엑스포 유치전도 있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긴 듯하지만 하나도 빠트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고 했다. 정치인의 옥석을 가리는 유권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3-02-0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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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마음은 벌써 고향' 기부제
‘일상의 회복’ ‘명절의 회복’ 기미가 완연하다. 설 연휴를 앞둔 명절 기상도는 한마디로 쾌청이다. 덩달아 귀성길에 오르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일상이 돌아오면서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는 게 효도’라던 현대판 장승은 뿌리뽑힌 지 오래다. ‘이번 명절에는 안 와도 된데이’ ‘불효자는 ‘옵’니다’ 따위의 플래카드가 언제 나붙기나 했나 싶을 정도다.
실내 마스크 의무 해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코로나19 확진자 7일 격리와 더불어 일상을 옥죄던 마스크로부터 해방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방역 당국은 실내 마스크 해제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판단 아래 이달 말께 마스크 착용 여부를 자율에 맡길 참이다.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가 국내에 상륙한 지 3년 만에, 3000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와 3만 3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찾아온 일상 회복이다.
고향 찾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이번 설에 부산 시민 147만 5000명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전망됐다. 부산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337만 명 가운데 43.79%에 달하는 시민이 귀성길에 오른다. 흥미로운 것은 목적지별 예상 인구인데, 경남·울산이 86만 명(58.3%), 경북·대구가 28만 명(19.1%), 서울·경기·인천 수도권이 16만 명(11.2%)으로 집계됐다.
부울경이 본디 하나라는 것을 입증하는 조사다. 가까운 고향을 찾는 시민의 발걸음이 가벼운데다 선물꾸러미까지 더해져 한결 풍성한 명절이 되었다. 새해부터 시행에 들어간 고향사랑기부제 덕분이다. 고향사랑기부제는 개인이 고향에 기부하고 지자체는 이를 모아서 주민 복리에 사용하는 제도로, 기부자에게는 세액공제와 기부한 고향의 답례품이 제공된다. 연간 500만 원 한도로 10만 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 10만 원 초과분은 16.5%를 공제받는다. 기부 금액 30% 이내에서 답례품도 준다.
설을 앞두고 고향(?) 사랑을 실천할 목적으로 ‘고향사랑e음’에 회원 가입을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누리집에서 밝힌 고향의 정의다. 기부자 본인의 주민등록등본상 거주지를 제외한 지역자치단체가 고향이란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살고 있는 시민은 졸지에 타향을 고향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여기서 연대의 필요성이 엿보인다. 기부제 취지가 지방소멸을 방지할 목적이고, 아직 이 제도를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하니 일단은 지역이 합심하여 제도부터 안착시키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부울경 메가시티가 좌초 위기를 맞은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부산 시민 가운데 고향 찾아 떠나는 귀성객의 60% 가까이가 경남과 울산이어서 부울경이 윈윈하는 상생 방안을 찾는다면 지역의 살림살이는 더욱 윤택해질 게 불을 보듯 자명했다. 김두겸 울산시장이 해오름동맹 도시인 경주·포항시 시장과 상호 교차 기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부울경 메가시티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답례품을 둘러싸고 노심초사하는 지자체도 많다고 한다. 고향사랑e음에 들어가 보니 부울경에서는 부산 서구·부산진구, 울산 남구 3곳이 아직 답례품을 준비하지 못했다. 지자체마다 특산품이 사뭇 달라 기부의 ‘부익부 빈익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올 한 해 하고 그만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기부의 연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특산물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역 특성에 맞는 눈길 끄는 답례품을 마련하는 것은 지자체의 몫이다. ‘불멍·별멍때리기’ ‘템플스테이’ ‘벌초 대행’ 등 이색적인 답례품도 이미 상당수다.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지역 현안을 스토리텔링이나 크라우드펀딩과 연결하는 사례를 얼마든지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의 기부만으로 지방소멸을 해결하려는 것은 책임 있는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지자체 평균 재정자립도가 48.7%(2021년 기준)에 그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고, 243개 지자체의 절반 가까이가 지방세 수입으로는 공무원 인건비도 충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재정분권이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8대 2 수준에 그치고 있는 국세와 지방세 비중을 7대 3, 6대 4로 좁혀 나가는 개혁이 절실하다.
고향사랑기부제 시행으로 귀성이 아니라도 마음은 벌써 고향에 닿는 길이 활짝 열렸다. 기부자의 마음을 늘 고향에 머물게 하려면 지자체마다 시민의 마음을 얻는 데 최우선인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답례품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고, 지역을 찾는 기부자를 환대하는 등 연속적인 기부가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2023년 계묘년이 지역 연대와 고향 사랑으로 지방소멸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3-01-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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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살기 좋은, 서로 다리가 되는, 진정한 부산
연말 도서관에서 빌린 대여섯 권의 책을 뒤적이다 연시를 맞았다. 문득 새해 경구로 삼아도 좋겠다는 글을 발견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취모용료급수마(吹毛用了急須磨).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했어도 급히 갈아 두어야 하리’라는 뜻으로, 불교 임제종 시조인 임제의현의 임종게에 나오는 구절이다. 머리카락을 칼날에 갖다 대고 훅 불기만 해도 끊어질 정도로 예리한 취모검이라도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한 뒤에는 급히 갈아 둘 정도로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유교의 사서 중 하나인 〈대학〉을 강의한 책에서 불교의 시퍼런 선기(禪氣)가 뚝뚝 묻어나는 시를 만나니 더 신선했다. 계묘년 독서 목록에 유불도 혹은 유불선을 넣은 것은 꾸준히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는 회복탄력성 혹은 회복력(resilience)이라는 단어의 영향이 컸다. 회복력은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인데,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효율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회복력 시대〉를 지난 11월 출간해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있어 동양의 고전인 유불도가 발밑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란 기대에서 시작한 독서였다.
‘털 한 올’은 강조 어법에 많이 등장한 말이다. 털끝은 물론이고 호말(毫末), 일호(一毫), 호리(毫釐), 추호(秋毫) 등이 그렇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한때 정치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신년 휘호(揮毫)는 붓글씨 문화가 쇠퇴하면서 털끝만큼도 찾기 어려운 세태가 되었다. 자리의 오른쪽에 놓인 쇠붙이에 새긴 글이라는 좌우명(座右銘)도 스마트폰의 캘린더 앱이 대체하는 시대다. 하지만 작심삼일일지라도 새해를 맞으면 마음속 결의 하나를 다지는 것은 장삼이사들의 변치 않는 통과의례일 터이다.
지역이라고 해서 새해 각오가 없을 수 없다. 부산은 무엇보다 올해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유치의 해를 맞았다. 4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 6월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 11월 5차 경쟁 PT와 BIE 170개 회원국 최종 투표의 시간이 예정돼 있다. 투표 결과 엑스포 유치가 확정되면 부산은 대전환·재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부산의 새로운 도시 슬로건도 기대를 더한다. 박형준 부산시정은 ‘다이내믹 부산’을 20년 만에 대체할 새로운 슬로건 선정 작업에 나섰고, 최종 후보 3개를 3일 공개했다. ‘Busan is Good’(부산이라 좋다), ‘Bridge for All, Busan’(모두를 연결하는, 부산) , ‘True Place, Busan’(진정한 도시, 부산). 새 슬로건은 10일까지 온오프라인 투표를 거친 뒤 13일 도시브랜드위원회에서 최종 선정된다.
일단은 ‘다이내믹 부산’만큼 자극적이지는 않다는 게 중평이지만 1만 3000여 명의 시민과 전문가 참여를 거쳐 결정된 만큼 집단지성의 힘을 믿어 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 뉴욕의 ‘I Love New York’이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I amsterdam’도 톡톡 튀는 슬로건은 아니다. 이번 후보작들이 부산에 관한 다양한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개방형이라는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는 하다.
국가적으로도 올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칠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일 신년사에 이어 2일 신년 인사회, 3일 첫 국무회의에서 잇따라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여기다 중대선거구제까지 언급해 개혁 이슈를 대통령실이 선점한 인상이다. 선거가 없는 올해 국정에 성과를 내야 한다면서도 내년 4월 총선까지 겨냥한 셈이다.
노동·교육·연금 개혁은 우리 사회의 이해가 엇갈리는 난제 중의 난제로, 거론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폭발성이 크다. 더욱이 국가 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로 다가온 저출산·고령화와 겹쳐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곧 본격화할 정년 연장 논의를 비롯하여 세대와 진영 간의 이중삼중의 갈등이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균형발전이야말로 난마처럼 얽힌 국가적 현안을 해결할 주효한 카드다. 다가오는 인구 구조 변화에 맞서려면 탈수도권 집중, 균형발전이 특효약이다. 윤 대통령도 “고등 교육에 대한 권한을 지역으로 과감하게 넘기고, 그 지역의 산업과 연계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며 “교육 개혁 없이는 지역 균형발전을 이뤄 내기 어렵고, 또 지역 균형발전은 저출산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신년사에서 강조한 바 있다.
계묘년 새해에는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한 일까지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수행자 같은 회복력의 자세가 요구된다. 이럴 때 부산은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단발성에 기반한 화통의 부산미를 짱짱하게 회복할 수 있다. 부산의 새 도시 슬로건처럼 살기 좋은, 서로 다리가 되는, 진정한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023-01-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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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부산 재도약의 '라스트 댄스'
성탄절과 세밑이 내일모레다. ‘범 내려온다’며 2022년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섰다. 가는 해를 보내는 회한과 새해를 앞둔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의 건널목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되돌아보며 세월의 매듭을 지을 때다. 어느 해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목하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올해도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왔던 게 분명하다.
첫째는 지긋지긋했던 코로나19와 마침내 작별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최근 당정협의회에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조속한 시일 내에 해제하겠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그 시점을 내년 1월로 잡았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 각국에서는 이미 실내 마스크를 벗은 지 오래고, 국내 지방자치단체도 잇따라 마스크 해제를 정부에 공공연히 압박하고 있는 참이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의 일상 회복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우리 삶에 스며들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어느덧 사라졌다. 지금은 그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스라하지만 ‘사적 모임 10인·영업 시간 밤 12시’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게 4월 15일이었고, 실외 어디에서든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도 9월 26일의 일이다. 2020년 5월 시작된 ‘거리 두기’의 족쇄에서 비로소 풀려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정치 지형의 변화다. 3·9 대선과 6·1 지방선거가 보수의 한판승으로 끝났다.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를 기치로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고, 부울경에서는 7월부터 박형준 부산시정, 박완수 경남도정, 김두겸 울산시정이 막 올랐다. 진보에서 보수 일색으로, 드라마틱한 정치 지형의 변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파열음이 멈추지 않는 상황이다.
부울경에서는 단체장과 함께 광역의회도 국민의힘이 장악하다 보니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간의 마찰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소야대에다 0.73%포인트 차이의 대선 결과는 중앙정치를 정쟁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협치와 소통은 사라지고 사사건건 대립이다. 여기에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나눠 진영 패싸움을 즐기는, 지나치게 정치 지향적인 민심도 정쟁에 기름을 부었다.
셋째는 기로에 놓인 지역 재도약의 꿈이다. 연초까지만 하더라도 부울경 도약과 비상의 길은 메가시티와 엑스포로 나 있었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급격히 추진 동력을 잃었고, 부산엑스포는 내년 4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와 11월 BIE 총회에서의 최종 투표라는 건곤일척의 일정을 남겨 둔 상태다. 메가시티가 좌절되면서 부산엑스포는 지역 재도약의 ‘마지막 비상구’(Last Exit)이자 ‘라스트 댄스’(Last Dance)가 되었다.
2022년은 ‘메가시티의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망은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행정안전부가 4월 18일 ‘부산·울산·경남 특별연합 규약안’을 승인하고 부울경 3개 시도지사가 이를 고시함으로써 메가시티는 출범의 고고성을 울렸고, 2023년 1월 본격적인 사무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김두겸 울산시장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결국 메가시티는 부울경 초광역경제동맹이라는 알맹이 없는 수사로 탈바꿈했다.
지방소멸 시대를 끝내고 지방 부활을 알리는 축포로 기대를 모았던 부울경 메가시티는 수도권 일극 체제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었다. 인구 800만 명의 부울경이 2040년이면 인구 1000만 명의 동북아 8대 메가시티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꿈이 산산이 조각날 판이다. 메가시티를 좌초시킨 장본인들은 부울경 역사와 주민 앞에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보수정당이 부울경 권력을 싹쓸이할 때마다 불거진 갈등과 분열의 고질병은 언제쯤 치유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30부산월드엑스포는 이제 부산이 재도약할 마지막 카드가 되었다. 카타르 월드컵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든, 아르헨티나에 우승컵을 안긴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라스트 댄스이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집중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부산의 도약과 비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모멘텀이 필요하다. 부산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끌어내기 위해서는 월드엑스포만 한 모멘텀을 현재로서는 찾기 힘들다. 부산을 다시 설계하고 건설하는 키가 엑스포에 있다. 2023년은 부산이 세계를 향해 웅비의 날갯짓을 본격화할 2030년을 향한 첫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절박한 심정으로 2030 엑스포 유치에 전념할 일만 남았다.
2022-12-2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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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돼지고기' '중꺾마' 그리고 2030엑스포
한국 축구 대표팀이 금의환향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민과 함께 ‘16강 축제’를 펼친 태극 전사들의 자랑스러운 귀국이다. 열사의 땅 중동을 달군 이번 월드컵은 ‘돼지고기’로 막 올라 축약어 ‘중꺾마’로 마무리됐다. 밥심으로 뛰어야 하는 한국인에게 회교 율법에 따른 돼지고기 금식령은 악조건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결기로 12년 만이자 방문 월드컵 사상 두 번째로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뤄 냈다.
음식남녀. ‘음식과 남녀, 사람의 큰 욕망은 거기에 존재한다(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고 〈예기〉에서 말한 이는 중국의 성인 공자다. 대만 출신의 영화 거장 리안 감독이 만든 영화 ‘음식남녀’에서도 은퇴한 요리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음식남녀.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능이지. 본능은 피할 수 없어. 평생 경험하는 거지.” 성인이든 거장이든 색욕에 앞서 식욕을 인간의 가장 큰 욕망으로 꼽은 셈이다.
미국 ESPN은 한국 축구의 16강 진출 비결을 조리팀에서 찾았다. “한국 선수단에서 누가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바로 김형채 조리장과 신동일 조리사다.” 2010년 남아공 대회부터 선수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이번에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을 포함한 돼지고기 요리가 금지되면서 식단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탁월한 요리 솜씨로 스포츠 과학과 영양학을 두루 만족시켰다는 것이다.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회교권에서는 돼지를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로 취급한다. 이 또한 마땅히 존중해야 할 이슬람 문화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금기시되는 음식은 있게 마련이다. 중국 고전 〈서유기〉에 나오는 ‘돼지 괴물’ 저팔계의 이름도 불가에서 금하는 5가지 음식과 도가에서 금하는 3가지 음식인 오훈삼염의 8가지를 멀리하라는 뜻에서 팔계(八戒)라 붙여졌다.
밥심을 얻은 태극 전사들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중꺾마’는 취업난 등 역경을 겪는 MZ세대, 나아가 코로나와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희망의 언어가 됐다. 대표팀이 들고 있던 태극기에 적힌 이 문구는 올해의 최고 명언으로 떠올랐다. 주장 손흥민은 귀국 인터뷰에서 “국민들도 인생에서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한국으로서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사실상 이렇게 막을 내렸다. 월드컵, 올림픽, 엑스포 등 3대 국제 메가 이벤트의 다음 차례로 눈을 돌리면 2024년 파리 올림픽,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2026년 북중미(캐나다·미국·멕시코) 월드컵,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으로 이어진다. 공교롭게 2030년에 열리는 월드컵과 엑스포의 개최지는 빈칸으로 남아 있다.
2030 엑스포에 개최지 부산이라는 이름을 올리려면 지금부터 ‘중꺾마’ 정신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 마침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 일정도 잡혔다. 내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BIE 실사단이 부산을 직접 방문해 지난 9월 우리가 제출한 유치계획서를 바탕으로 준비 상황 점검에 나선다. 이번 실사는 내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지를 투표로 가리는 BIE 총회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쟁도시 리야드와 돼지국밥을 소울 푸드로 내세우는 부산은 문화적으로 선의의 경쟁을 치러야 한다. 특히 부산은 회교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그동안 쌓은 관용과 포용의 문화를 통해 2030엑스포 개최지 부산의 너른 품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바다와 산과 강을 품은 삼포지향 부산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팔도문화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문화가 통섭하는 소통의 용광로였다.
특히 한데 섞어 우려 내는 국물 문화를 자랑하는 부산이 점차 ‘미식의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뉴욕타임스가 전포 카페거리를 꼭 가 봐야 할 세계명소로 꼽은 데 이어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2023년 최고의 여행지 35’에 부산을 꼽은 뒤 “부산은 문화와 음식 등 관광자원이 잘 조화를 이뤘다”고 평했다. 부산은 늘 그랬듯 변화와 진보를 마다하지 않는 역사를 자랑한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도시 결정의 날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신세대는 ‘꺾이지 않는 마음’, 기성세대는 ‘불굴의 의지’로 서로를 다독이며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라는 부산 엑스포의 주제를 되새겨야 한다. 부산이 인류의 진보와 화합을 향한 플랫폼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시민의 노력에 달려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게 마련이다.
2022-12-0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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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꿈이 이뤄지는 창업도시 부산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이 어디인가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부산의 모든 것을 궁금해한다. 최근에 만난 한 외교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산의 이모저모에 대해 질문을 쏟아붓다가 이윽고 경제 문제에 다다랐다. ‘부산 대표 기업’을 묻자 말문이 잠깐 막혔다. 언뜻 떠오르는 기업이 없었던 데다 단답형 질문에 굳이 특정 기업 몇을 꼽았다가는 되레 제2의 도시 부산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서였다.
르노코리아자동차, 부산은행, 에스엠상선, 에이치제이중공업, 창신아이엔씨, 서원유통, 하이투자증권, 성우하이텍, 대한제강, 디지비생명보험. 부산상공회의소가 한국평가데이터 신용평가사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의 자료를 활용해 2021년 결산 매출액 기준으로 지난 9월 발표한 부산의 10대 기업 순이다. 부산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인의 귀와 눈에도 낯설 터인데 외국인에게는 더할 것이 분명하다.
부산 기업 가운데 전국 100대 기업에 드는 곳은 유감스럽게도 단 한 곳도 없다. 부산 1등인 르노코리아자동차의 전국 순위는 120위다. 그나마 1000대 기업에 들어간 부산 기업도 고작 27곳에 그쳤다. 2008년 55개 사와 비교하면 반토막 수준이다. 부산 경제는 목하 뒷전으로 계속하여 밀리고 있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751개 사가 몰려 있으니 수도권 공화국의 빛과 지방소멸의 그림자가 뚜렷이 교차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를 놓고 부산과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는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의 방한이 남긴 뒷맛도 씁쓸하기만 하다. 건설에만 670조 원이 들어간다는 ‘네옴시티’라는 제2의 중동 특수를 놓고 정부는 물론이고 대기업도 ‘오일머니’ 앞에 납작 엎드렸다. 국내 주요 그룹의 총수들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엑스포 유치전이 전개되고 있는 터라 부산으로서는 사실상 비상 상황을 맞은 것이나 진배없다. 이럴 때 부산과의 의리를 지키며 꿋꿋하게 부산엑스포 유치에 나설, 부산에 본사를 둔, 부산이 낳고 기른 대기업은 없나 하는 만시지탄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
부산과 특별한 연고도 없는 대기업이 나서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열심히 뛰어온 것만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산 하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가 떠올릴 수 있는 기업을 지금부터라도 시민의 힘으로 키워야 한다는 꿈을 갖게 된다. 기업이 당당히 민간 외교의 한 몫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고, 따라서 부산이 낳고 기른 기업을 통해 부산의 위상을 한껏 드높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2~24일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 창업 엑스포(FLY ASIA 2022)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아시아 창업도시 부산’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돛을 올린 창업 엑스포는 가능성의 씨앗을 품은 ‘비주류’ ‘경계인’의 경제 축제이자 스타트업의 성장과 도약의 꿈을 공유하는 창업의 마켓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부산창업청 설립에도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12월 12~13일 벡스코에서 열릴 예정인 ‘2022 지산학 엑스포’도 부산의 새로운 흐름이다. 부산형 지산학 협력 모델을 찾겠다는 취지를 내건 첫걸음이다. 지방자치단체(지)와 기업(산), 대학 및 연구소(학)가 협력해 지역산업을 육성함으로써 지역 상생 발전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역의 역량을 한껏 끌어올린 지산학은 새로운 창업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자 열쇠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부산이 2030엑스포에 명운을 걸고 있는 이때에 창업 엑스포와 지산학 엑스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잇따라 열리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국제관광도시이기도 한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지스타(G-STAR) 등을 통해 문화축제와 마이스(MICE)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특히 왜관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발판으로 한국 최고의 무역항으로 우뚝 선 부산은 한국거래소가 있는 거래의 도시로 성장했다. 박람회와 부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셈이다.
월드컵 시즌을 맞아 2002년 4강 신화를 이룩한 마법의 주문인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 다시 회자하고 있다. 늘 그렇듯 미래와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게 마련이다. 선비는 사흘 만에 만나도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뜻의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옛말이 있다. 심지어 〈장자〉에는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사이에 일체가 변한다는 교비비고(交臂非故)라는 말까지 있다. 모든 게 가능한 창업도시 부산도 시작이 반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2022-11-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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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동해, 그 빛과 그림자
지난 주말 한 전시장을 서둘러 찾았다. 11월 6일까지 예정된 전시라 더는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희 사진전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 전시장 입구에서는 동해남부선 지도가 먼저 관람객을 맞았다. 부산진-범일-부전-거제-동래-해운대-송정-기장-일광-좌천-월내. 역사의 역사는 부산의 경계를 넘어 서생-남창-덕하-울산으로, 호계-모화-불국사-경주로, 나원-사방-안강-포항으로 이어졌다.
사진 속 동해로 가는(?) 동해선의 역사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은 일출의 동해와 그 바다를 따라 뉘엿뉘엿 달리는 동해선, 그 기찻길을 점점이 잇는 역사의 불빛과 퍽 조화를 이루지 싶다. 동해선을 타고 가면 한반도에서 새해의 빛이 가장 먼저 닿는다는 이곳저곳의 사연을 만나게 되고, 역사에는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저런 삶의 편린들이 명멸하듯 흐른다.
동해는 빛의 바다이지만 그 빛을 잉태한 어둠의 바다이기도 하다. 금강산 관광 초창기인 1999년 초 유람선을 타고 공해를 경유해 남북을 오가며 만난 동해의 밤바다는 낮의 푸르름을 상상할 수 없는 칠흑의 바다였다. 그 어둠 속에서 분단의 명암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육지의 북쪽은 전깃불 하나 없는 암흑천지였고 남쪽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환했다. 전력 사정에 따른 남북의 극단적인 명암은 비정상적인 분단 상황을 증명했다.
2022년 11월 동해는 목하 ‘전쟁의 바다’다.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마구 쏘아 대고 있어서다. 지난 2일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우리 영해 근처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3발을 발사했는데, 이 중 1발은 동해 NLL 이남 26㎞에 떨어졌고, 나머지는 속초 동방 57㎞, 울릉도 서북방 167㎞에 각각 낙하했다. 북한은 이날 10시간 동안 4차례에 걸쳐 모두 25발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고, 울릉도에서는 공습경보까지 발령됐다.
동해남부선을 이용하는 동남권 주민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북한이 울산 앞바다에까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발표를 하면서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2일 함경북도 지역에서 590.5㎞ 사거리로 남조선 지역 울산시 앞 80㎞ 부근 수역 공해상에 2발의 전략순항미사일로 보복 타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우리 군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전략순항미사일은 핵탄두 탑재까지 가능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동해에서 지난 2~5일 진행된 한·미 연합 공중 훈련 ‘비질런트 스톰(Vigilant Storm)’에 맞서 북한은 급기야 3일에는 ‘화성-17형’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발사했다. 9일에도 동해상으로 SRBM 1발을 쏘았다. 이로써 북한은 올해 들어 38회에 걸쳐 미사일 도발에 나섰는데, 이는 2019년 13차례, 2020년 5차례, 2021년 7차례와 큰 차이를 보인다.
남북한과 일본에 둘러싸인 동해는 북한이 일본 넘어 태평양 건너 미국을 타깃으로 하는 군사 훈련장이 되었고, 한·미·일로서도 동북아의 공동 안보를 다지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동해로 미사일이 날아간다는 것은 곧 미국 본토를 넘볼 수 있다는 함의를 갖게 됐다. 북한이 미국 중간선거에 즈음하여 잇따라 무력 도발을 하는 건 핵 무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한때 푸른 동해를 따라가는 동해선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었다. 부산-포항의 동해남부선, 포항-삼척의 동해중부선, 삼척-제진역의 동해북부선을 지나면 곧장 북으로 들어간다. 북한의 금강산청년선과 이어져 함경남도 안변역, 나선특별시 나진역을 지나 두만강역에서 러시아 철도로 뻗어나간다. 한반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푸른 꿈이 동해선에 있었다.
그 동해선의 꿈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동북아의 전쟁과 평화는 이제 동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도 시시각각 강팔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전쟁은 이미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러시아와 중국의 권력구조도 날로 강고해지는 분위기다. 이런 사정이라면 동해선 연결은 앞으로 더디게만 진행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부울경 메가시티조차 좌초 위기에 놓여 부산과 울산의 통합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가 아닌가.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의 작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과거는 빛으로 기록된다”며 “이 세상 먼지 하나도 그저 그냥 존재로 머무는 것은 없다”고 팸플릿에 적어 놓았다. 부산을 떠나 동해로 길을 잡은 동해선 기차는 지금 어느 역사쯤에서 시간의 궤적이라는 빛을 깜박이며 제 운명을 부려 놓고 있을까. 동해에 빛보다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깔리는 11월이다.
2022-11-1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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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돈의 자유와 지방 살림살이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정치가 갑갑해질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 이 말은 1997년 15대 대선 때부터 시작된 TV토론의 백미로 꼽힌다. 평소 정치인이 국민에게 늘 물어야 할 질문의 백미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이지 싶다. 사람과 돈이 죄다 수도권으로 몰리는 이 지방소멸의 시대에 지방을 살아가는 국민인 지방민에게 건네는 안부는 더 절절할 수밖에 없다. “지방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습니까?”
내년 나라 살림도 초장부터 파장 분위기가 연출됐다. 25일 국회에서 있은 윤석열 대통령의 첫 시정연설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전원 불참으로 얼룩졌다. 1987년 개헌 이후 첫 ‘반쪽 시정연설’로 헌정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여야가 639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 심사를 위한 일정에 합의하기는 했다지만 예산 정국의 서막이랄 수 있는 시정연설조차 극심한 정쟁 끝에 파행을 겪은 터라 험난한 여정을 예고한다.
나라 살림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는데 지방 살림은 오죽하겠는가. 국회와 중앙정부를 상대로 예산 확보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지방자치단체들은 정쟁 당사자인 여야 정치권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곤욕을 치르게 됐다. 2023년도 예산안에서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원 213억 원, 가덕신공항 건설 120억 원 등 8조 237억 원을 확보해 ‘국비 8조 원 시대’를 처음으로 연 부산시로서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국회에 상주 중인 ‘국비 확보 추진단’을 중심으로 부산시 차원의 주도면밀한 대책이 있어야겠다.
이번 예산 정국에서 단연 지방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게 지역화폐의 지원 향방이다. 기획재정부에서는 지역화폐에 지원하는 국비 전액을 삭감하겠다며 서슬이 시퍼렇지만 이는 지방의 실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지적이 많다. 지역화폐는 현재 17개 광역지자체·173개 기초지자체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그 만족도는 무려 86%가 넘는다. 지방민 63% 이상이 예산 삭감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여와 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민의를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할 것이다.
이참에 정치권의 맹성도 뒤따라야 한다. 지방소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벼랑 끝에 놓인 지방의 살림살이는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방치해 온 정치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국회의원 뽑아 놓으면 중앙 정치판에 휩쓸려 지방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어 왔다. 특히 대선, 총선,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승자 독식의 양당제가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지난해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지 30년을 맞았고, 오는 29일 제10회 ‘지방자치의 날’을 앞두고 있지만 지방자치의 갈 길이 여전히 멀기만 한 것은 정치권이 지방자치제를 안착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정책의 실패에는 재정분권의 실패가 기저에 깔려 있다. 국가재정과 지방재정 비율이 8 대 2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에 그렇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때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 목표치를 6 대 4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했지만 구두선에 그쳤다.
지방재정을 선진국처럼 40%까지 올려놓아야 지방 살림살이의 주름살이 펴진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지방의 재정자주도 또한 현재의 65.7%에서 서둘러 8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중앙집중식 재정 구조도 바꿔야 한다. 지방세 감면이나 비과세의 결정권이 관련 법상 중앙정부와 국회에 있는 것도 손질할 필요가 있다. 재정을 중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는 지방자치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틈만 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유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돈의 자유만큼 일상생활에서 즉각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 자유가 또 어디 있을까. 돈은 우리 사회를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한마디로 피 같은 존재다. 결국 돈은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재화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와 정의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 낸다.
행복한 삶, 나은 살림살이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넘어 깨어 있는 지방민 의식이 이제는 절실히 요구된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등 시시각각 불어닥치는 정치적 물결에 속절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돌 게 아니라 승자 독식의 양당제마저 당당하게 뛰어넘는 지역적 혜안과 결단이 필요하다. 발 딛고 살아가는 지역민으로서의 살림살이가 좋아져야 국민으로서의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 아닌가.
2022-10-2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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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메멘토 모리, 세상의 평화를 위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오래된 속담이면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양 격언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지난 4일 김동길(1928~2022) 박사의 부고를 접하고서다. 민주투사에서 보수 진영의 원로에 이르기까지 양극단을 오갔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그의 삶을 둘러싼 평가조차 부질없게 만들었다.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자택은 누나인 고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1970~80년대 이 땅에서 젊은이로 살았던 사람치고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고인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이 됐다. 그가 강의를 맡은 ‘서양문화사’ 수업은 인근의 여대생들도 불러들일 만큼 늘 열기와 위트로 넘쳤다. “여러분, 백인하고도 연애하고 흑인하고도 연애하세요. 그렇게 다른 인종과 섞여 연애하고 결혼해서 애를 자꾸 낳아야 인종차별이 없어지고, 세상도 평화로워집니다.”
한 페친은 SNS에서 고인을 이렇게 추억했다. 고2 때 그가 마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 친구와 담치기를 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분단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시련이자 축복입니다. 남쪽은 자유, 북쪽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이 둘이 통일하면 이 지구에 자유와 평등이 융합한 새 나라로 우뚝….” 그때의 김동길은 민주투사였고, 그때의 김동길만 기억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유럽의 한 수도원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수도사가 복도를 다니며 라틴어 ‘메멘토 모리’를 외친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반야를 얻기 위한 불교 수행법인 백골관과 닿아 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는 죽음만 한 것이 없다는 뜻일 터이다.
메멘토 모리는 전쟁 혹은 평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식 때 노예를 시켜 뒤에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우쭐대지 말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뜻에서다. 평화는 흔히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일컫는다. 죽음은 전쟁과 평화를 뛰어넘으며, 따라서 메멘토 모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세상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평화에서 전쟁의 시기로 이동 중이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세계의 진영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핵전쟁까지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는 대재앙의 시대를 맞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영토 안전성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국가와 국민 방어를 위해 분명히 모든 수단을 쓸 것”이라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핵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반도 상황은 시시각각 위협의 강도가 느껴지는 실제 상황이다. 북한이 잇단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핵 선제 사용’을 법으로 규정했다. 최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술핵 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에 맞서 남쪽도 ‘핵무장론’이 분분하다. 주한미군 기지 전술핵 재배치, 핵잠수함과 폭격기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상시 배치 논의도 확산일로다.
가깝든 멀든 핵전쟁 위기가 강 대 강으로 치달을 뿐 중재나 타협의 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자칫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적이 우려스럽다. 더욱이 국내 정치권이 보이는 행태는 더 가관이다. 여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안보 문제를 놓고 패를 나눠 티격태격 싸우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특히 한·미·일 연합훈련을 놓고 ‘친일’ ‘친북’ 프레임으로 맞붙어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1945년 8월 역사상 처음으로 핵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살아 있는 학습장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가공할 파괴력의 핵무기는 77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위력이 1kt(TNT 1000t의 폭발력) 미만에서 수십kt 수준으로 국지전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인류는 다시 핵무기 사용의 유혹에 직면해 있다.
메멘토 모리.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라고 늘 일깨운다. 공멸하는 전쟁의 길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섞여 들어가고 한데 융합해 가는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다시 고개를 드는 핵전쟁의 위기 속에서 탐욕과 집착을 벗어던지고 죽음과 의연하게 대면할 수 있는 메멘토 모리 혹은 백골관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2022-10-1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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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일상의 회복, 열정의 회복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명대사다. 요한복음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희망 또한 두려움의 감옥을 견뎌 내고 자유를 쟁취하는 힘을 부여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영화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역병에 자유를 구속당한 팬데믹 시대, ‘코로나 탈출’의 잠언으로 이만한 글을 찾기도 힘들다.
9월 26일, 마침내 마스크에서 해방됐다. 비록 ‘실외’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머지않아 ‘실내’에서도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스크는 사람 사이의 거리 두기였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첫해인 2020년 10월 13일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됐다. 2021년 4월 12일 마스크 착용 의무는 사람 사이가 2m가 안 되는 실외로도 확장됐다. 1년 5개월 만에 트인 장소에서의 거리 두기가 사라진 셈이다.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마스크가 여실히 보여 줬다. 가장 큰 폐해는 사람 간의 불신이다. 전염병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 두기의 간격만큼이나 공동체의 희망 찾기도 멀어졌다. 자기 살길을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도 바쁜 터라 공동체의 꿈은 저만치 밀쳐 놓을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거리 두기가 사라지자 대기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공동체의 꿈을 함께 꾸는 시간이 찾아왔다. 10월부터 부산은 온통 축제의 물결이다. 3년 만에 정상화된 부산국제영화제가 5일 개막하고, 이튿날 가장 공정하다는 부일영화상이 막을 올린다. ‘우리들의 시네마천국’이 역병이라는 역경을 딛고 이렇게 다시 살아났다. 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BTS 콘서트,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등 크고 작은 행사도 잇따른다.
특히 ‘부산시민의 날’이자 ‘세계한인의 날’인 10월 5일 행사에 눈길이 간다. 부산시민의 날은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전일을 기려 제정됐고, 세계한인의 날은 재외동포의 정체성 고양과 권익 신장을 위해 지정됐다. 세계한인의 날 행사가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것은 2030부산엑스포 유치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다. 마침 일본, 대만의 무비자 입국 허용 등 해외여행 빗장도 속속 풀려 부산의 꿈이 세계로 뻗어 나갈 발판도 마련됐다.
일찍이 부산을 ‘용광로’에 비유한 시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 팔도의 문화를 한데 녹인 부산은 이 땅의 멜팅팟(melting pot)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화(化)하고 통(通)하는 화통의 부산미는 이질적인 것이 섞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혼종성과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집단주의적인 신명인 역동성에 기반해 있다. 부산은 모든 것을 녹여 새로움을 제련하는 화통의 도시다.
뜨거운 용광로 같은 부산의 열정이 당장 집중해야 할 곳은 2030엑스포다. 부산시와 정부, 글로벌기업이 앞장서고 있다지만 화룡점정은 역시 시민의 몫이다. 개최도시 시민의 엑스포를 향한 열정이 유치전의 관건이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엑스포를 원해? 부산에 유치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들리는 부산엑스포 홍보대사 이정재의 외침을 세계만방에 전할 소명이 엑스포 민간외교관인 부산 시민에게 주어졌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시민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새로운 엑스포를 부산에 유치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BTS 공연 과다 숙박 요금 자제 캠페인에 동참하거나 BTS 하면 ‘BUSAN EXPO’가 연동되도록 SNS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화통한 부산이 K컬처를 바탕으로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의 적격자라는 입소문을 퍼트리는 데 앞장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남과 울산의 이탈 선언으로 좌초 위기에 놓인 부울경 메가시티의 불씨를 살리는 것도 시민의 몫이다. 전국 첫 특별자치단체연합의 탄생으로 기대를 모은 부울경 메가시티는 누가 뭐래도 800만 지역민의 염원이다. 올해 초만 해도 부울경 시도민의 86.4%가 메가시티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정치적 셈법에 따라 민의를 내팽개친 울산과 경남의 자치단체장은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방소멸의 두려움이냐, 균형발전의 희망이냐. 코로나19에 따른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잦아들고 있는 이즈음에 부산, 나아가 부울경은 지방소멸의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새로운 감염병과의 전쟁에 직면했다. 균형발전과 자치분권을 향한 희망만이 ‘지방소멸 탈출’의 동력이 될 게 자명하다. 다이내믹 부산은 균형발전을 향한 당신의 열정을 지금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2022-09-2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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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피 같은 돈, 지방에도 돌게 하라
9월 15일까지냐, 16일부터냐. 부산 지역화폐 동백전의 ‘추석맞이 더블 이벤트’가 고민거리를 던진다. ‘9월 한 달간 동백전 더블 이벤트로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라는 덕담까지는 좋지만 15일을 기점으로 충전 한도와 캐시백 요율이 나뉘어 혼란스럽다. 이달에는 60만 원을 충전해 4만 5000원을 돌려받지만 15일까지는 충전 30만 원에 캐시백 10%, 15~30일은 충전 30만 원에 캐시백 5%로 다르기에 그렇다.
동백전은 이처럼 덜컹거리는 게 제 운명인 듯하다. 올해만 하더라도 50만 원 충전 한도에 10% 캐시백으로 가다가 8월 1일부터 충전 30만 원, 캐시백 5%로 바뀌었다. 이달 들어 계산도 두 배 복잡한 더블 이벤트가 나왔다. 10월부터는 어떤 정책이 나올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동백전의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지역화폐 국가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국 지역화폐를 중앙정부 예산으로 지원한 부분에 관해 학계 등 전문가의 많은 지적이 있어 원점에서 점검하는 중에 있다”고 운을 떼더니 2023년 예산안 발표 브리핑에 나선 기재부 예산실장은 “지역사랑상품권은 효과가 특정 지역에 한정되는 온전한 지역사업”이라며 지역화폐 국가 예산의 전액 삭감을 발표했다. 지역화폐의 적들이 기재부를 앞세워 지방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한 셈이다.
효과가 특정 지역에 한정되면 국가 예산을 줄 수 없다는 반지방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이쪽에 지원하면 저쪽에서 반발한다는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의 분할통치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툭하면 지방끼리 싸우게 하더니 이젠 특정 지방에 그 특정 지방민의 혈세조차 돌아가지 못하게 옥죄고 나섰다. 지방은 안중에도 없는 국가주의는 효율과 경제 논리를 앞세운 수도권 중심주의로 귀착된다.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을 통해 지방의 피 같은 돈을 수도권으로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지역화폐를 통해 골목상권과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지방정부에 중앙정부가 딴지를 걸고 나선 셈이다. 기재부 관리나 국가주의자들은 한 번이라도 지방의 골목이나 시장을 찾아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의 말을 경청한 적이 있는가. 국가와 정부화폐가 엄연히 있는데 지방과 지역화폐라니, 괘씸죄를 적용하겠다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기획재정부가 13일 부총리 주재로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어 “엄격한 예타(예비타당성) 제도 운영을 통해 예산 낭비를 방지하는 ‘재정의 문지기’로서 예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 천명한 것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방균형발전을 위해 국가정책적 추진이 필요한 사업을 예타 면제로 끌어올린 지방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 사업 규모·사업비 등의 세부 산출 근거가 있고 재원 조달·운영 계획, 정책 효과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사업이어야 한다며 예타 면제 요건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기재부는 경제성(B/C)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다. 인구가 적은 지방보다 사업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 수도권이 매번 높은 점수를 받아 수도권 집중을 가속한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됐다. 실제로 예타 제도가 시행된 1999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231조 839억 원의 예타사업을 확정했는데, 부울경 3곳을 합쳐도 예타 통과 사업비가 수도권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3조 446억 원(9.97%)에 그쳤다.
최근 기재부의 서슬이 시퍼렇다.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관계자)이나 검핵관(검찰 출신 핵심관계자) 못지않게 요직을 꿰차고 있어서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물론이고 국무조정실장,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등이 줄줄이 기재부 관료 출신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에도 기재부 출신의 조규홍 후보자가 내정되자 ‘기재부의 나라’ ‘모피아’(MoFia)라는 말이 회자한다.
지역화폐 지원 국가 예산이 지난해 1조 522억 원에서 올해 6050억 원, 내년 전액 삭감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월 100만 원 충전, 캐시백 요율 10%를 목표로 출범한 동백전은 그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예타 면제가 필요한 지방사업도 줄줄이 문턱조차 넘기 어렵게 됐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국정에 지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거셌는데, 이제 지방의 돈줄마저 마를 판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라 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으로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어디 인체만 그러하겠는가. 지방도 나라도 경제의 실핏줄인 돈이 제대로 돌아야 산다. 지방에 돈줄이 막히면 나라라고 해서 어디 성하겠는가.
2022-09-1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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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BTS와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天高馬肥)는 가을이다. 여름의 해운대를 벗어나 가을이 오는 동해로 길을 잡으면 갈맷길은 해변열차와 함께 달린다. 미포~청사포~송정의 그린레일웨이를 걷노라면 방탄소년단(BTS) 정국(본명 전정국) 생각이 난다. 그의 팬클럽이 생일인 9월 1일에 맞춰 지난해 블루라인파크 입구에 축하 꽃길을 만들고, 해변열차를 ‘해피 정국 데이(Happy JUNGKOOK Day)로 랩핑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은 까닭이다.
한국이 K팝을 이끄는 BTS를 보유하고 있다면 부산은 BTS의 지민(본명 박지민)과 정국을 보유한 글로벌 팬클럽 아미(ARMY)의 성지다. BTS가 2030부산세계박람회 홍보대사가 된 데도 부산이 고향인 지민과 정국의 부모가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해변열차에서 동해선을 갈아타면 도착하는 일광에서는 10월 15일 2030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 ‘BTS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이 열린다. 단체 활동을 중단한 지 7개월 만에 신곡 ‘옛 투 컴’ 발매와 함께 돌아온 BTS는 ‘아직 오지 않은 최고의 순간’에 부산의 꿈도 함께 녹여 냈다.
부산과 BTS가 아직 오지 않은 최고의 순간을 함께 꿈꾸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2030 부산엑스포로 가는 길도 BTS 참여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린다. 경쟁상대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오일 머니’를 무색하게 할 강력한 문화의 힘인 BTS를 대한민국의 부산이 장착했기 때문이다.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인 170개국보다 많은 197개국의 BTS 팬클럽 아미는 천군만마다.
최고의 순간은 내년 가을까지 그 성패가 결판난다. 그 1년이 부산의 10년을 좌우하며, 나아가 부산의 미래 100년을 파종한다. 시간표는 부산엑스포와 가덕신공항을 따라 흘러간다. 9월 7일 부산엑스포 유치계획서 BIE 제출, 11월 3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 내년 3월 현지 실사, 내년 11월 5차 PT와 170개 BIE 회원국 투표로 이어진다. 때맞춰 ‘가덕신공항 건설사업 타당성평가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이 1년간 진행된다. 가덕신공항 2029년 조기 개항도 여기서 판가름 난다.
앞으로의 1년이 부산의 장래에 있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시간이다. 엑스포와 가덕신공항이라는 양 날개를 활짝 편 채 세계를 향해 부산이 도약할 수 있도록 지역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때다. 총력전뿐만 아니라 시간을 전략적으로 사용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를 허투루 보내는 일도 결코 없어야 한다. 금쪽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부산은 ‘글로벌 허브 도시’로 나아가느냐, 주저앉느냐 기로에 서 있다. 부산의 정치·경제·사회·문화계를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지난달 30일 벡스코에서 열린 ‘스케일업 부산 컨퍼런스 2022’에서 부산의 위기와 기회를 공유했다. ‘혁신의 시대’ ‘엑스포 부산 유치’ ‘창업 도시로 가는 길’ 3개 섹션으로 나눠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가덕신공항과 엑스포를 통해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나아가는 길에 BTS라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부산 시민이라면 부산의 운명을 결정할 1년간 BTS와 영욕을 같이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와 관련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숙박비와 안전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난관을 정면에서 돌파하는 자세가 요망된다.
한편으로 희망의 뉴스도 교차한다. 31일 국회 국방위원회가 BTS 병역 문제에 관해 빠른 결단을 촉구하자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데드라인을 정해 놓고 결론을 내리라고 했고, 여론조사를 빨리하자고 지시를 내렸다”고 화답했다. 그러자 BTS의 소속사인 하이브 주가가 전날 대비 6.76% 급등하는 등 시장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섰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엑스포 개최 도시 시장으로서 고심 끝에 윤석열 대통령에게 BTS 대체복무제도 적용을 건의한 데 이어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원들도 대체복무에 지지의사를 잇따라 표명하고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1992년생인 진(본명 김석진)은 올해, 1993년생인 슈가(본명 민윤기)는 내년까지 입대해야 하며, 이후 RM(본명 김남준), 제이홉(본명 정호석), 뷔(본명 김태형), 지민, 정국이 차례로 입대하게 된다.
“나라의 부름이 있다면 언제든 응하겠다”는 게 BTS 입장이지만 부산엑스포 글로벌 홍보에 나서는 것도 분명 나라를 위한 길이다. BTS와 부산, 국가가 윈윈하는 길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때다. 주목할 건 BTS와 함께라면 부산이 훨씬 쉽게 글로벌 허브 도시로 가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22-09-0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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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지방시대냐 수도권 시대냐
만법귀일. 중국 송나라 때 불교 선승들의 선문답을 모은 〈벽암록〉에 나오는 ‘1700 공안’ 중 하나다. 모든 것이 마침내 한군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한 수행자가 당대의 선승 조주를 찾아와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라고 물은 데서 유래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지방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윤 정부의 국정에 ‘지방은 없다’는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지역언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지방 없는 국정’을 일제히, 그것도 매섭게 질타하고 나섰다. 지역 대표 언론의 사설만 대충 훑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방마다 사는 처지가 사뭇 다를 터인데, 지역 민심이 이렇듯 하나로 모인 것은 일찍이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17일 윤 대통령 취임 100일 회견에서도 ‘지방’ 혹은 ‘지역’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국민의 뜻”이라며 “민심을 겸허히 받들겠다”고 했다. ‘지방 없는 국정’에 등을 돌린 지역은 ‘국민’과 ‘민심’이라는 대통령의 말에서도 지방의 설 자리는 없다는 데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사방에서 지방이 안 보인다고 아우성치는데, 앞으로 국정은 어떻게 될까.
양두구육. 중국 송나라 때 불교 선종의 역사를 다룬 〈오등회원〉에 나오는 말이다. 집권당 대표가 대통령을 저격하면서 세간에 회자하는데,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羊頭狗肉)는 뜻이다. 원문의 소머리가 양머리로, 말고기가 개고기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여권에서는 때아닌 개고기 논쟁이 한창이다. 〈능엄경〉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나’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역 민심에서도 양두구육이 읽힌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는 대통령과 집권당 원내내표의 ‘내부총질’ 문자에 양두구육으로 응수했다. 그는 “양두구육이라는 탄식은 저에 대한 자책감 섞인 질책이었다”며 “(선거 과정에서)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가장 열심힌 판 사람은 바로 저였다”고 고백했다.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남발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지방 곳곳에서 ‘지방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 가지만 윤 대통령 취임 전에는 ‘지방시대’라는 수사가 차고도 넘쳤다. “지역발전이 국가 발전” “지방시대라는 모토를 가지고 새 정부를 운영할 생각”이라던 윤 대통령은 마침내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6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내걸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균형발전을 위해 묶어 둔 수도권 규제의 빗장을 풀고, 반도체 인재 양성을 이유로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늘리는가 하면 부총리급 독립부처 신설을 내건 지방시대위원회는 자문기구로 쪼그라들 판이다.
“수도권 시설을 지방으로 강제 이전해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는 정책은 실패했다”며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반기를 들고, “수도권과 지역을 나누는 이분법을 버리고 전 지역을 수도권화해야 한다”고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장단을 맞췄다. 지방시대가 아니라 ‘수도권 시대’에나 가능한 말이다.
균형발전. 고전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오늘에 펄펄 살아 있는 화두다. 가까운 일본에서부터 멀리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중앙집중과 지방소멸이 있는 곳이라면 균형발전(均衡發展)은 어김없이 정책 대안으로 등장한다.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총인구 50.3%, 청년인구 55.0%, 일자리 50.5%, 1000대 기업 86.9%가 쏠린 한국(산업연구원 2022년 보고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국의 지방언론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도 지리멸렬한 균형발전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윤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지방시대가 아니라 수도권 시대, 균형발전이 아니라 수도권 초집중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외면하고 있다”는 거다. 이어 2차 공공기관 이전과 초광역 지방정부 구축을 통해 지방시대를 이끌 부총리급 정부 전담 부처 설치를 강력히 촉구했다.
지방소멸 시대에 국정이 가야 할 길은 당연히 균형발전이다. 국정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지자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윤 대통령은 “초심을 지키며 국민 뜻을 받들겠다”고 했다. 당장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전부터 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진정 엑스포 유치를 바란다면 가덕신공항 건설 계획, 공법, 사업자 선정 등을 국토부가 아닌 부산시가 주도하도록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제안한 박형준 부산시장의 요청을 전격 수용해야 한다. “내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겠다”는 것은 윤 대통령이 시장·도지사 간담회에서 직접 한 말이다. 지방시대냐 수도권 시대냐, 대통령이 분명하게 응답할 차례다.
2022-08-1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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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여름휴가 단상
코로나 이후 다시 찾은 바닷가
부산 해수욕장 ‘물 반 사람 반’
확진자 발생 2년 6개월 만에
일상 회복 알리는 피서지 풍경
전·현직 대통령도 나란히 휴가 중
‘정치적 평온’ 되찾는 계기 기대
“기자가 휴가가 어딨어?” 신문사에 들어와 여름휴가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데스크로부터 돌아온 말이다. 입사 초기에는 연간 통틀어 사흘 정도 휴가를 갔던 것 같다. 오래전의 일이 문득 떠오른 것은 티브이 뉴스를 보고서다.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서 잠시 일터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도 휴가 사유를 적어 내야 하는 직장이 적지 않다는 보도였다. 5인 이상 근로자는 유급휴가를 법으로 보장받는 데도 휴가 사유가 필요한지, 황당하다는 뉴스였다.
일이 휴가이고 휴가가 일인 시절이 있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나마 이것도 어디냐며 다들 반겼다. 문화부 일선 기자 때는 ‘산사 여름 수련회’가 그런 경우였다. 쌍계사, 통도사에서 사나흘씩 열린 수련회에 참가했는데, 취재도 하고 쉬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여름휴가는 산사에서’ ‘호젓한 산사에서 참나를 찾아’라는 안내문은 솔깃하기만 했다.
한번은 통도사에서 멋모르고 ‘수련회 체험’에 나섰다가 혼쭐이 났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절집 시간표에 맞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108배는 기본이고 묵언에다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마주 잡는 차수(叉手)를 해야 하는 등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수련회를 마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머리 깎고 중이나 해야겠다는 말, 다시는 안 할 거다”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사를 떠나 속세로 갔다.
여름휴가를 알리는 신호는 역시 여름 노래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키보이스가 1970년 발표했고, 1997년 DJ DOC이 리메이크하면서 세대를 뛰어넘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라디오방송마다 앞다퉈 이 노래를 틀기 시작하면 여름이 온 것이다. 그리고 왠지 해변으로 휴가를 가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세월 탓인지 바뀐 세상 탓인지 ‘해변으로 가요’라는 노래가 부쩍 들리지 않는다 싶었는데 부산 해수욕장은 이미 ‘물 반 사람 반’이라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해운대, 광안리, 다대포, 송정, 송도, 일광, 임랑 등 부산지역 해수욕장 7곳이 전국에서 몰려든 피서객들로 모처럼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7월만 하더라도 해운대해수욕장에 285만 928명, 광안리해수욕장에 183만 8168명이 찾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배가량 많았다고 한다.
8월에는 각종 축제까지 준비되어 있어 더 많은 피서객이 부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7일까지 해운대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다대포해수욕장, 일광해수욕장 등지에서 다채로운 바다축제가 열려 여름휴가는 정점을 찍을 전망이다. 가장 핫한 여름 휴가철은 역시 8월 초라는 명성을 올여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올 여름휴가가 각별한 것은 코로나19로부터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래 그동안 팬데믹에 휩쓸려 여름휴가를 비롯한 모든 일상이 중단됐다. 재유행 우려가 상존하고 있지만 ‘보복 여행’이든 어쨌든 부산 바다를 찾아 해수욕을 즐길 만큼 일상 회복이 가능해진 것이 어딘가 싶다.
여름휴가 단대목인 8월 초, 장삼이사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휴가’도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1일 제주도로 휴가를 떠났다. 1주일간 제주에 머문다고 하는데 벌써 올레길을 걷고 물놀이하는 사진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덕분에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도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지난 5월 퇴임 이후 사는 곳을 떠나 휴가에 나서자 욕설 시위도 중단된 것이다.
윤석열 현 대통령도 공교롭게 지난 1일 휴가를 떠났지만 ‘휴가 같지 않은 휴가’로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지방 휴양지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자택에서 오랜만에 푹 쉬면서 정국 구상을 한다는 게 대통령실의 전언이다. 야당에서는 지지율 20%대의 대통령 휴가를 두고 “한가하다”고 하고, 여당 일부에서는 “서울에 있으면서 펠로시 의장을 왜 안 만나느냐”고 딴지를 건다. 유럽 정상들은 3주 동안 여름휴가를 보낸다는데, 닷새 휴가를 보내면서도 이쪽저쪽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한국 대통령의 현실이다.
문 전 대통령은 평산마을의 평화를 위해 앞으로 자주 휴가를 가시라. 부산에 아파트도 한 채 세를 내 오며 가며 자주 들러야 동네가 덜 시끄러울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첫 휴가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두 번째 휴가부터는 속 편히 다녀올 수 있도록 이번 휴가 끝나고 돌아오면 참신한 국정 쇄신책을 내놓았으면 좋겠다. 여름휴가도 이제 절정으로 치닫는 때라서 하는 말이다.
2022-08-0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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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국정 심기일전, 실기해선 안 된다
민심의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그것도 배를 삼킬 듯 사납고 거세다. 화를 더 자초하는 것은 격랑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짐짓 모른 척한다는 점이다. 사달이 나도 단단히 일어날 조짐이다. 국정 동력을 잃어 가는 윤석열 정부 이야기다. 취임 두 달여 만에 자중지란에다 보수언론이라는 우군마저 돌아섰고, 정가에는 레임덕을 넘어 탄핵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벼랑 끝 대통령 지지율이 이를 웅변한다.
3·9대선에서 48.56% 득표로 2위인 이재명 후보를 0.73%포인트 차이로 따돌리고 신승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급전직하다. 5월 10일 제20대 대통령 취임 이후 53%까지 올랐던 대통령 직무 긍정률이 6월 셋째 주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꾸준하고도 착실한 하향세 끝에 최근에는 32%대에 이르렀다(한국갤럽 조사). 국민 세 사람이 모이면 그중 한 명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형국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 32%대 급락
30% 무너지면 국정 동력 상실
지지 기반인 PK 민심도 돌아서
“지지율 의미 없다” 인식 바꿔야
여야 넘나드는 정치력 복원 절실
정책 다듬고 거국내각도 고려해야
윤 대통령은 “지지율은 의미 없고 국민만 생각하겠다”지만 정치에 밝은 사람들은 국정 지지율 30%의 의미를 잘 안다. 통상 30%는 마지노선이다. 30%대에서는 40%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그나마 있지만 20%대로 내려앉으면 사실상 회복 불가능이라 본다. 국정 지지율 30%대면 야당이 말을 안 듣고, 20%대면 공무원 조직이 안 움직이며, 10%대면 측근마저 떨어져 나간다는 게 정가에서는 상식처럼 통한다.
지금은 이런 상식에 맞설 때가 아니라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하고 특단의 대책을 세워 나가는 게 이 정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 자세다. 대통령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라고 할 PK(부산·울산·경남)에서도 이달 들어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52%)가 처음으로 긍정 평가(40%)를 크게 앞질렀을 정도로 민심은 악화일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사 난맥·권력 다툼·전 정권 공격 등 국정 지지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일들은 차고도 넘치지만 지방 살리기, 민생고 해결, 코로나 대응 등 뭐 하나 제대로 된 정책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정권의 과오는 까발리면서 미래로 가는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정권 내부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듯하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자칫하면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했고, 윤 대통령도 “대통령은 안 보인다는 얘기가 나와도 좋으니 장관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해서 정책을 알리라”고도 했다.
사실 윤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지역 발전이 국가 발전”이라며 “지방 시대라는 모토를 가지고 새 정부를 운영할 생각”이라고 천명했을 때만 해도 지역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두 달이 지났지만 ‘지방 시대’가 뭔지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다. 지방을 살린다면서도 쥐꼬리만 한 지역신문발전기금부터 깎겠다는 방침도 나왔다. 그것도 소외계층 구독료 지원 4억 5000만 원과 지역신문활용교육 예산 6억 원을 줄이겠다는 거다.
지역신문만 지방 시대라는 수사에 헛물을 켠 것은 아닌 모양이다. 위기의 지역대학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최근 반도체 인재 15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지역대학의 반발이 거세다. 반도체 산업이 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수도권 대학의 증원까지 허용하면 지역대학 공동화가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지역의 미래가 걸린 지역대학과 지방 살리기 어젠다를 제시하는 지역신문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게 지방 시대인가.
더 늦기 전에 국정의 심기일전(心機一轉)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흔들리는 국정의 중심부터 잡을 일이다. 정치력 복원이 그 지름길이다. 현재 우리 사회 위기의 근저에는 정치 부재가 자리 잡고 있다. 이해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고 두고만 보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여와 야는 사사건건 대립 중이며, 국회는 21일 현재 53일째 개점휴업 중이다. 정치가 밥값을 제대로 해야 한다.
정치력 복원을 통해 통합과 협치를 국정의 동력으로 삼아야 할 때다. 통합과 협치는 정부·여당의 겸손과 양보에서 싹튼다. 윤 대통령은 정치 입문 1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진기록을 세웠지만 이는 정치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검사의 문법보다 정치의 문법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집권여당은 자기 정치의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정책으로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
안팎으로 경제와 안보에 비상등이 켜진 이때 국정이 키를 잃고 표류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다. 정부 정책을 정교하게 다듬고, 필요하다면 거국내각 구성도 고려할 때다. 성난 민심 앞에 정치권이 공멸의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변화와 쇄신으로 거친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한다.
2022-07-2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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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2030엑스포 유치전, 마지막에 누가 웃나
손흥민 선수가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최고의 경기’를 묻자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독일전을 꼽았다. 당시 2전 전패로 조 최하위인 한국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독일을 맞아 2-0 승리를 거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종료 직전 역습 상황에서 두 번째 골로 승리를 확정 지은 손흥민은 “(독일에서 겪은) 인종차별을 복수해 줬다”고 밝혔다. ‘카잔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날 승리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여러 차별 속에 한참 뒤처지던 거북이의 회심의 역습이었던 셈이다.
“정정당당해야 할 운동장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는 아버지 손웅정 씨의 말처럼 페어플레이가 강조되는 스포츠라고 해서 늘 공정한 것만은 아니다. 오죽하면 축구 경기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는 토끼의 방심과 거북이의 노력을 비교해 교훈을 주지만 거북이가 진정 페어플레이 정신이 있다면 토끼를 깨워 함께 가야 하지 않느냐는 데로까지 진화 발전하기도 했다.
현재 판세 ‘뛰는 리야드, 기는 부산’
한국 잇단 선거로 뒤늦게 출발
앞으로 1년은 엑스포 대장정
시작인 만큼 비관·낙관 모두 금물
신공항 조기 개항 등에 한목소리
부산 중심으로 유치 열기 모아야
‘차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유난히 오버랩되고 있는 게 최근 불붙고 있는 2030월드엑스포(세계박람회) 유치전이다. 부산의 한국과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내년 연말 개최지 최종 결정을 앞두고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다. 현재 판세는 ‘뛰는 리야드, 기는 부산’으로 요약된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사우디가 토끼처럼 앞서 질주하고 있다면 부산은 뒤늦게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추격하는 양상이다.
6월 21일 국제박람회기구(BIE) 파리 총회에서 열린 2차 프레젠테이션(PT)에서 이탈리아와 사우디에 이어 마지막 주자로 나선 한국은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를 주제로 인상 깊은 발표를 선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정부도 “현시점에서 리야드가 앞서 있다”고 했고, 〈부산일보〉의 사우디 언론 분석 결과도 리야드가 BIE 170개 회원국 가운데 70여 개국의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아직 예측불허다. 내년 연말 개최지 결정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남았다. 길고도 험한 엑스포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관계의 불문율처럼 한국과 사우디의 외교 지형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결승선에서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다. 그것도 페어플레이로 상대의 마음마저 얻는 진정한 승부여야 한다.
먼저 비관도, 낙관도 금물이다. 한국은 사우디에 비해 출발이 많이 늦었다. 전제군주제 국가인 사우디는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를 비롯한 왕족을 앞세워 지지국 확보에 공을 들여왔다. 한국은 3·9 대선과 6·1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이제야 출발선에 섰고, 내년 연말까지는 선거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지지국 숫자에도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지지 선언이라는 게 외교적 수사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나라 밖보다는 내부의 장애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1국 1표의 비밀투표에 나서는 170개 회원국을 설득하려면 한국의 부산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 엑스포를 통해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지, 국가와 국민의 유치 열의는 어떠한지 웅변해야 한다.
이용객의 편의를 돕는 충분한 기반 시설은 그런 열의를 재는 바로미터다. 리야드 킹칼리드 국제공항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공항으로 손꼽히는 상황에서 가덕신공항의 2029년 조기 개항은 당연지사다. 지금은 가덕신공항 개항 시기를 놓고 부산시와 국토교통부가 한가하게 딴소리나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그다음으로는 부산이 엑스포 유치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엑스포에 관한 전국적 관심이 기대 이하인 것은 마냥 다른 지역 탓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그럴수록 부산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치 열기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여기에 민관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가덕신공항 추진 때처럼 엑스포 유치에도 부산 정치권 모두가 여야 없이 나서야 한다. 실패 땐 국정이나 시정을 맡은 집권여당뿐 아니라 야당에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부산의 시민사회도 엑스포 유치가 지역은 물론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이라는 소명 아래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엑스포 유치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시민들이 함께 찾고 같이 문을 두드릴 때 엑스포로 가는 길은 마침내 열린다. 8일 2030엑스포 유치를 총괄할 민관합동기구인 ‘부산세계박람회유치위원회’가 신설돼 본격 가동에 들어간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듯, 유치전은 이제 시작이다.
2022-07-0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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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각자도생의 시대, 정치는 어데 갔나
팬데믹이 끝나니 ‘퍼펙트 스톰’이다. 코로나19에 따른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2년 만에 출구를 알리는 빛을 보이자마자 이번엔 ‘경제 위기의 세계적 대유행’(Perfect Storm)이 들이닥친 것이다. 작은 태풍도 다른 기상 전선과 겹치면 유례없는 대형 폭풍이 된다는 기상 현상에서 나온 퍼펙트 스톰은 글로벌경제 복합위기를 뜻한다. 그 영향권에서 한국도, 부산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감염병이나 경제난 등 부정적인 면에서 ‘세계는 하나’ ‘지구촌’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건 비호감이지만 세계는 이제 국경과 이념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보듯 지구촌은 진영을 나눠 분열하고 적대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글로벌경제 위기와 분열은 각 나라 안의 경제난과 권력 지형의 변화를 부추긴다. 민생고가 심화하면서 정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 통과하니 퍼펙트 스톰
글로벌 복합위기 지구촌 강타
나라마다 권력 지형 변화 뚜렷
부산 영세민 30% 가까이 급증
정치는 민생 외면, 국민 신뢰 상실
당장 협치 나서고 민심 보듬어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뒤진다는 조사 결과가 처음으로 나왔다. 야휴 뉴스 등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만약 오늘 또 다른 대선이 실시된다면 어떤 후보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에 참여자 42%는 바이든 대통령, 44%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도 취임 후 처음으로 부정평가(47.9%)가 긍정평가(47.6%)를 앞섰다는 여론조사가 22일 나왔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부산의 사정은 어떨까. 팬데믹과 퍼펙트 스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곳이 부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부산의 기초생활수급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발생 직전인 2020년 1월 16만 7933명에서 2022년 4월 기준 21만 6129명으로 26개월 만에 28.7%라는 기록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 30~50%로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영세민을 일컫는다. 이들에 대한 생활비 지원은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 교육급여 등 네 분야에 걸쳐 이뤄진다. 이런 기초수급자가 팬데믹 동안 부산 전체 인구 334만 명 대비 6.5%로 2020년 1월 4.9% 대비 1.6%포인트 늘었는데, 증가 폭이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다. 전국 비율은 4.5%에서 5.5%로 1%포인트 느는 데 그쳤다.
부산의 빈곤층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안전망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이다. 정기 수입이 없는 일용직과 단기 일자리 노동자들이 팬데믹에 이어 퍼펙트 스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전망의 부재, 곧 생활고에서 벗어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전망이 무너지면서 어떻게든 지금 여기의 현실을 각자가 알아서 버텨 내야 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렇다면 정치는 도대체 어데 쓰는 물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대를 충분하게 하며,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중 무엇부터 포기해야 하나 되묻자 공자는 군대, 식량을 차례로 꼽은 뒤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는 뜻의 ‘무신불립’(無信不立)을 강조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민초는 비빌 언덕이 없게 된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는 원 구성 협상의 지지부진으로 한 달 가까이 문을 걸어 잠근 채 민생은 뒷전이다. 다음 달에 가야 국회가 문을 여나 싶지만 7월 초까지 외유를 계획한 국회의원이 298명 중 54명이나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러고도 세비를 반납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6·1 지방선거로 판 갈이를 한 지방정치도 7월 1일 새 출발을 예고하지만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부산 울산 경남의 명운이 걸린 메가시티 추진과 관련해 박완수 경남지사, 김두겸 울산시장 당선인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적이 우려스럽다. 심지어 김 울산시장 당선인은 “맑은 물 확보가 안 되면 반구대암각화 세계유산 등재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발언까지 내뱉어 대구·구미 등 낙동강 수계 지자체 간 약속이 무산될 판이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판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라도 국정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약속한 ‘협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지난 21일 용산 대통령실에 초대받은 국민의힘 상임고문단이 야당과의 협치를 윤 대통령에게 집중적으로 요구했을까. 중립성과 독립성을 흔든다는 비판을 들어가면서까지 검찰과 경찰의 개편을 서두를 게 아니라 지금은 야당을 끌어안고 민심을 보듬을 때다.
2022-06-2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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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바뀐 세상, 결국엔 경제에서 결판난다
세상이 바뀌었다. 3·9 대선에서 대통령 교체로 여야가 바뀌더니,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실시된 6·1 지방선거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대선이 미풍이었다면 지방선거는 가히 태풍급 위력을 발휘했다. 변화를 요구하는 민심이 바닥으로, 풀뿌리로 갈수록 더 거세고 뜨거웠던 셈이다. 마침내 부울경 권력은 완전히 교체됐다. 특히 부산은 ‘싹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수 완판’이다.
민심의 바다는 거칠었고, 그 파고는 배를 뒤집을 만큼 높았다. 5년 만에 대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4년 만에 지방권력도 진보에서 보수로 물갈이, 판 갈이 됐다. ‘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를 뜻하는 민생(民生)이 흔들리자 민심은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이번 선거를 복기한다면 앞으로 4년 후, 혹은 5년 후를 전혀 장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2년 후 총선도 안갯속이다. 다만 예측을 불허하는 민생의 강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대선·지방선거 승리 만끽하기에는
국내·세계 경제 지표 너무 엄중
민생 불확실성 날로 증가 추세
다음 선거 판도도 바뀔 가능성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위정자 늘 가슴에 되새겨야
여기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국정, 시정, 도정에 걸쳐 새로운 권력을 선출한 민심은 당분간은 당연히 기대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신문사의 대통령 취임 축하 광고가 예전보다 배나 많게 지면에 실린 것은 이런 간곡한 기대의 반영이다. 민심의 지지를 업고 당분간은 권력이 순항할 것이다. 취임 초의 소위 ‘밀월’이란 것도 있고, ‘새 빗자루가 잘 쓸린다’는 속담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까지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기대와 교차하는 우려도 민생에서 발아한다. 대선이 끝난 후 만난 한 기업인은 ‘정권교체’라는 말부터 꺼내 좌중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보수정당의 열렬한 지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주장인즉슨 현재의 경제 지표로 봤을 때 5년 안에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지리라는 보장이 없고, 그렇기에 다음 대선에서는 정권이 또 교체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현실 정치에 바로바로 평가를 내리는 민심을 지켜본 터라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최근 들어 사방에서 경제가 엉망이라는 아우성이 넘쳐난다. 민생을 가장 위협하는 게 물가다. 통계청이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4%인데 금융위기 때인 2008년 8월 이후 14년 만에 최고치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들의 올해 평균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지난해 12월 예상했던 4.4%의 배인 8.8%로 대폭 올리고 나섰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치솟으니, 민생이 흔들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가는 그렇다 치고 경제는 성장할 것인가. 1970년대 오일쇼크 때처럼 경기 침체 속에서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 50년 만에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공포가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세계은행(WB)은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1월 4.1%에서 최근 1.2%포인트 빠진 2.9%로 크게 낮췄다. OECD도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2월(4.5%)보다 1.5%포인트 낮은 3.0%로 낮춰 발표했다.
지난 1분기(1~3월) 한국 경제는 0.6% 성장하는 데 그쳤다는 통계도 나왔다. 한국은행은 연말까지 남은 분기마다 0.5%씩 성장해야 올해 성장률이 한국은행의 전망치(2.7%)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OECD는 나아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20년 2.4%, 2030년 1.3%, 2033년 0.9%로 낮아질 거라는 전망을 내놓아 새 정부 경제팀에 비상이 걸렸다.
새 정부, 새 시정, 새 도정이 선거 승리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한국 경제, 세계 경제가 말이 아니다. 그나마 다음 선거가 2년 후에나 있는 게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민생은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다. 지금부터 정신을 바싹 차리지 않으면 민생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다. 경제 살리기에 실패하면 다음 선거도 없다는 결연한 각오가 권력을 위임받은 위정자들이 새겨야 할 시대정신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0%대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책 기조 전환과 함께 공공·노동·교육·금융·서비스 등 5대 부문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중앙 정부, 국회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부산 현안 해결에 앞장섰고, 부산시 경제 정책에도 높은 이해를 보여 줬다”며 이성권 부산시 정무특보를 경제부시장으로 내정했다.
옛말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 , ‘의식이 풍족한 다음에야 예절을 차리게 된다’고 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선거 때 유행시켰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경제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먹고사니즘’의 민생부터 해결할 일이다.
2022-06-0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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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지방선거라는 아트페어, 그 흥행의 열쇠
홍콩 아트바젤에 갔을 때 정작 놀랐던 건 ‘구름관중’이다. 개장 시간 훨씬 전부터 입구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관람객을 보면서 아트페어가 돈 많은 컬렉터만을 위한 게 아니라 미술축제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시장에서 걸어 이동할 수 있는 바닷가 천막에 마련된 위성 페어인 ‘아트 센터럴’은 젊고 도전적인 전시로 축제의 공간을 확장했다. 사람과 장소, 작품 모두가 열려 있어 ‘가장 상업적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아트페어’라는 아트바젤의 명성을 새삼 확인했다.
홍콩에 맞짱을 뜰 아시아 미술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게 아트부산이다. 5월 12~15일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제11회 아트부산은 12일 VIP 프리뷰에 1만 2000명, 13~15일 일반 관람에 9만 명이 다녀가 관람객 수가 10만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올해는 예상 판매액 600억 원을 훌쩍 뛰어넘는 746억 원의 판매 성과를 거뒀다는 게 주최 측의 집계다.
올해로 11회째 맞은 아트부산
축제의 대중성 진지하게 고민해야
지역민의 삶이 예술로 승화되는
정책·공약 겨루는 선거도 아트페어
축제의 화룡점정은 유권자 몫
투표로 삶의 질 제고에 나서야
아트부산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서 홍콩 같은 열기가 이번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 풍경에서부터 흥행의 기미가 포착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작품을 산 뒤 들고 다니는 컬렉터의 모습도 좀 아쉽다. ‘비엔날레가 패션쇼라면 아트페어는 백화점’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트페어는 쇼핑 그 이상의 축제여야 하지 않느냐는 인식 때문이다. 일반 관람이 허용된 날 일찍이 전시장에 들렀지만 이미 전날 VVIP, VIP 프리뷰에서 작품이 팔려 미처 관람할 수 없는 작품도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쳐서다. 전시장도 벡스코 한 곳뿐이다. 축제로서의 대중성을 아트부산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부산에서는 지금 또 다른 아트페어가 한창이다. 그것도 전국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마켓이다. ‘삶이 곧 예술’이라는 존재미학의 눈으로 봤을 때 선거는 아트페어이자 참여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이다”는 탄성을 자아내는 수준 높은 삶의 질을 선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선거이기 때문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정책과 공약은 입후보한 출마자에게 육화한다. 그것도 4년에 한 번 서는 장이다.
6·1 지방선거는 ‘지금 여기’의 삶 그 자체다. 우리 동네를 바꿀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을 뽑고, 나아가 광역단체를 이끌고 감시할 단체장과 의원을 가린다. 지금 여기의 삶을 결정짓기에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는 게 지방선거다. 특히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는 지방으로서는 수도권에 맞설 강고한 연대가 필요하다. 그 중심에 부산, 나아가 부울경 메가시티가 자리 잡아야 한다.
선거를 닷새 앞둔 27일부터 이틀간 사전투표가 실시된다. 사전투표는 아트페어로 본다면 프리뷰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다른 관람객에게는 작품을 구경할 기회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미술시장과 달리 사전투표는 아무리 많이 참여해도 후보와 공약이 사라지는 염려는 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어서 사전투표가 되레 쾌적한 투표권 행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작품을 즐기고 선택하는 데 자유로운 아트페어의 장점은 십분 활용하는 게 좋다. 특정 갤러리에서 내놓은 작품이라 해서 믿고 바로 구매할 수 없듯 정당만 보고 ‘묻지마’식으로 후보를 고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처럼 정당 색깔이 파란색이든 빨간색이든 가리지 않고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선택하면 된다.
올해 부산 선거가 인신공격용 흑색선전보다는 정책과 공약 중심으로 차분하게 치러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변성완 후보의 ‘글로벌 메가시티 중심도시’,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의 ‘시민행복 15분 도시’, 정의당 김영진 후보의 ‘월 1만 원 무제한 대중교통’이 유권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시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와 보수 교육감을 자처하는 2명의 후보가 ‘미래냐 학력이냐’를 놓고 맞붙었다.
기초자치단체로 가면 정책과 공약이 더 구체적이다. 정당마다 선거 판세의 우위를 주장하는 처지라 선거전은 갈수록 열기를 더한다. 그동안 지방선거 때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정당정치가 풀뿌리 민주주의에서도 풀뿌리인 기초선거에서는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염원이 있기에 그렇다. 정쟁보다는 지역민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정책과 공약을 놓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지방선거는 아트페어이자 축제다. 화룡점정(畵龍點睛), 그 축제의 피날레는 유권자의 선택으로 장식된다. 발 딛고 사는 우리 동네, 우리 부산의 미래가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삶이 예술이 되는 명랑한 부산 생활을 꿈꾼다면 투표장부터 찾을 일이다.
2022-05-2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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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다이내믹 코리아, 시대와 진영을 넘어
‘다이내믹 부산’(Dynamic Busan)은 부산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남이가’ ‘화끈하다’ ‘진취적이다’라는 부산 사람들의 감성적 기질이 잘 묻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부산시는 이듬해 시민 공모를 통해 다이내믹 부산을 도시 브랜드 슬로건으로 선정했다. 다이내믹 부산은 시정은 물론이고 부산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부산은 다이내믹한가. 부산 사람들의 감성적 기질인 역동성이야 어디 쉽게 바뀌겠는가마는 도시의 활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지방소멸을 떠올릴 정도로 인구는 줄고, 특히 청년 유출과 노인 증가는 다이내믹 부산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2029년 가덕신공항 개항 등에 기대가 모이는 것은 부산이라는 도시에 새로운 전기가 필요해서다.
새 대통령 취임과 전 대통령 귀향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중앙정치
국민적 관심 속 흥행몰이 성공
좀체 달아오르지 않는 지방선거
‘다이내믹 부산’도 옛날 말일 뿐
유권자가 자치 역동성 되살려야
다이내믹 부산보다는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라는 말이 더 실감 나는 이즈음이다. 6·1 지방선거가 13일로 스무날도 남지 않았지만 좀체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는 지방 정치판과 비교한다면 중앙 정치판은 역동적이다 못해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은 5월 10일을 반추하면 ‘다이내믹 코리아, 시대와 진영을 넘어’라는 제목의 잘 만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킨다.
아침 일찍부터 ‘동시상영’으로 막 오른 5월 10일 중앙 정치극장은 흥행몰이에 대성공을 거뒀다. 10일 0시 용산 대통령실 지하벙커에서 합동참모본부 보고를 받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은 서초동 자택 휴식,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거쳐 오전 11시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취임식을 했다. 오전 7시 74년 만에 전면 개방된 청와대 모습도 취임식장에 생중계됐다. 윤 대통령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용산 집무실로 향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경남 양산 평산마을 사저로 갔다. 한국 최고 권력의 부침이 클로즈업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흥미진진한 후속편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 전 대통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막 올린 여소야대 정국이 파란을 예고한다. 통합과 협치는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가운데 168석의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여당이 사사건건 ‘강 대 강’ 대치를 보이는 판국이다. 인사청문회, 반쪽 내각, 추가경정예산 등 현안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시대와 진영은 달라져도 중앙 정치는 이제 더는 놀랄 것도 없다 할 정도로 파란의 연속이다. 대통령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 대통령 구속, 5년 만의 정권 교체 등 앞으로도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3·9 대선에서 정치 입문 1년의 ‘0선 대통령’이 등장했고, 전격적인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단행됐다.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두 달 만에 옮긴 만큼 집무실을 다시 행정수도인 세종시로 옮긴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2024년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도 예측 불허다.
유권자의 정치 심판은 더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4류로 꼽히는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심각한 데다 표심은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고 정처 없이 출렁인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요동치는 국제 정세까지 가세해 정정 불안은 심화한다. ‘드라마틱 정치’요 다이내믹 코리아다.
엊그제가 부처님오신날인데 불가에서는 인과의 윤회가 갈수록 빨라진다는 말을 곧잘 하고는 한다. 전생 현생 내생 따질 것 없이 이생에서 지어 이생에서 바로 과보를 받는데, 그것도 시대 변화에 맞춰 LTE나 5G 속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변화무쌍한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정권이나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 갈수록 즉각적이고, 그것도 단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팽팽 돌아가는 중앙 정치판에 비한다면 지방 정치판의 변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중앙의 변화에 따라 지방도 요동치는 것은 맞지만 간접적이고 수동적이라 훨씬 더디게 느껴진다. 더욱이 지방 정치의 중앙 예속화가 심각한 데다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이 지방선거 공천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이어서 역동성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지방선거의 주인공도 중앙처럼 유권자일 수밖에 없다.
12~13일 후보 등록을 시작으로 6·1 지방선거가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공식 선거운동은 19일부터 31일까지이며 사전 투표는 27~28일 이틀간 진행된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식었다지만 선거판의 분위기 메이커는 역시 지역주민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다이내믹 부산으로 정치판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전적으로 유권자 몫이다. 선거의 역동성이 되살아난다면 부활 30주년을 넘긴 지방자치도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2022-05-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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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정당 없는 지방선거' 가능할까
부산 시내는 지방선거전이 한창이지만 TV는 온종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다. 출퇴근길 교차로와 건널목에서는 지방선거 후보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는 그냥 지나가기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즈음이다. 종편 방송을 비롯하여 언론은 딴판이다. 검수완박을 둘러싼 여야 대치를 시시각각 생중계하거나 대서특필한다. 거리 유세와 검수완박 정국 중 어느 쪽이 지방선거 표심에 더 영향력을 행사할까.
1991년 부활한 지방자치제가 30주년을 넘겨 오는 6월 1일 실시되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라도 제대로 된 지방일꾼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유권자로서는 실로 난감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다지도 중요한 지방선거를 앞두고 웬 소동이냐며 중앙정치판을 나무랄 수도 없다. 국회에서는 국회의 일을 하고, 선거 시즌을 맞은 지방정치판은 자기 일을 알아서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뒷맛이 영 씁쓸하다.
‘검수완박’에 가린 6·1 지방선거
중앙정치판이 이슈 싹쓸이
‘지방 없는 지방선거’ 재현되나
‘정당보다는 인물’ 변화 조짐
특정 정당 독식 구조 깨질까 관심
중앙 예속 벗어나야 자치 ‘활짝’
지방선거를 위한 판이나 제대로 깔아 준 뒤라면 여야가 정국 주도권 싸움으로 날밤을 새우든 말든 상관없다. 시한을 넘기고도 공직선거법 개정안 통과를 계속 미룬 것은 국회의 직무 유기다. 그 바람에 27일에서야 부산시의회가 ‘부산시 자치구·군의회의 의원 정수와 자치구·군의원 지역선거구의 명칭·구역 및 의원 정수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방선거 딱 35일 전이다. 기대를 모았던 중대선거구제 확대도 사실상 무산됐다. 시기와 내용 모두 기가 찰 노릇이다.
지방정치판이 중앙정치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은 이번 부산시의회의 선거구 획정안 통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부산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더불어민주당이 정치개혁에는 관심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됐다. 시의회는 부산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10곳으로 제안한 4인 선거구를 1곳으로 축소하고, 9곳은 2인 선거구로 쪼갰다.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민주당도 정치개혁의 대상이라는 게 진보 정당의 입장이다.
이쯤 되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향식 민주주의에 가깝다. 부산시의회는 의원들 자신이 속한 정당의 지시에만 충실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앙정치는 지방정치를 정권 쟁취를 위한 장기판의 졸로 여길 뿐이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거대 양당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정치판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거대 양당은 권력에 관한 한 초록은 동색이었다.
되돌아보면 지방선거판은 지역에서의 정당 부침에 따라 크게 출렁거렸다. 2014년 지방선거까지는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부산시, 시의회, 기초자치단체장을 독식했다. 2018년에는 민주당이 싹쓸이했다. 지방권력의 쏠림 현상이 심각했지만 어느 쪽도 중앙정치로부터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방자치제 부활 30년을 넘기고도 여전히 지자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정치구조 탓이다.
‘정당 없는 지방선거’라면 지방자치제를 앞당길 수 있을까. ‘정당 없는 정치’라는 말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우문이지만 대안 없이 그 나물에 그 밥인 거대 양당 중심의 지방선거판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소수정당의 진입을 아예 차단하는 양당의 ‘밀당’에서 한국 정치는 물론이고 지방정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대선 전에는 정치개혁을 외치던 민주당이 선거가 끝나자 양당 구도의 기득권으로 돌아가는 게 현실이다.
정치의 주인이 유권자라면 정당 없는 지방선거가 가능하다. 정당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정당을 무력화하거나 무시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그런 기미가 느껴진다. 뉴스토마토와 미디어토마토가 지난 5~6일 ‘6월 지방선거 투표 기준’을 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한 결과, ‘소속 정당’이라고 답한 부울경 응답자는 23.3%에 그쳤다. 대신 ‘정책’(26.2%), ‘인물’(21.3%), ‘능력’(15.4%)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현장의 분위기도 일맥상통한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승리한 이후 6·1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힘 낙승 전망이 우세했지만 최근 들어 개인기를 앞세운 민주당 후보들의 약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지방선거 때마다 부산에서 불던 특정 정당 독식 구도가 이번에는 깨질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 지방선거가 부산의 정치 변화를 가늠할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의 적은 늘 중앙권력이었다. 지방권력의 약화가 곧 중앙권력의 강화를 뜻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지방자치제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중앙정치의 뿌리 깊은 예속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다. 이번 지방선거만이라도 정당을 보지 않고 인물을 보고, 정책을 보고 투표할 수는 없을까. 정당마다 이쪽저쪽 진영을 갈라 패싸움을 붙이는 정치판이 이제 지겹지도 않은가.
2022-04-2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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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검수완박 정국, 거리 두기의 정치학
‘검수완박 정국’이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첫 글자를 딴 검수완박이 정국을 집어삼켰다. 개헌 말고는 다할 수 있다는 172석의 거대 미래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출범조차 기다리지 않고 정국 주도권의 승부수를 던졌다. 취임을 전후해 새 대통령에 우호적인 ‘밀월’ 따위는 없다는 선전포고다. 권력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여야 대치를 지켜봐야 하는 수고로움과 성가심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었다.
언론의 시각으로 봤을 때 권력은 뉴스거리의 강력한 생산자다. 이슈를 주도하는 게 권력이고, 권력이 세면 뉴스를 독점한다. 오후 9시 시보의 ‘땡’ 하는 소리에 맞춰 전두환 대통령이 텔레비전 뉴스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땡전 뉴스’가 대표적이다. 3·9 대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 내각 조각 등 뉴스를 ‘몰빵’ 한 새 정부 측이 검수완박이라는 회심의 일격을 맞았다. 민주당이 존재감 부활을 통해 뉴스의 영토를 넓히면서 점차 스포트라이트에서 멀어질 판이다.
내달 윤석열 정부 출범 앞두고
민주당, 정국 주도권 승부수 던져
여소야대 정국 조기 본격화 조짐
6·1 지방선거에도 변수로 작용
유권자, 정쟁에 거리 두기 필요
정치 관찰자·비판자로 남아야
총장에서 일선 검사에 이르기까지 검찰의 조직적인 반발을 검수완박 추진 동력의 불쏘시개로 삼은 민주당은 17일 부활절 지나 다음 주부터 국회에서 본격적인 입법에 나설 참이다.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 통과를 4월 안에 마무리 짓고, 5월 3일 국무회의에서 입법을 공포한다는 게 ‘부활절 공세’의 시간표다. 새 정부 조각의 백미(?)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 지명은 이에 대한 맞불로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5월 10일 취임을 앞둔 윤 대통령 당선인으로서는 복병을 만난 셈이다.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이라는 예상된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전격적인 한 법무장관 후보자 발탁이나 안철수 인수위원장과의 공동정부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측근들로 내각을 구성한 데서 당혹감이 엿보인다. 안 위원장은 이번 내각에 단 한 명도 장관으로 추천하지 못함으로써 또다시 ‘철수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새 대통령의 시간이냐, 의회의 시간이냐. 김오수 검찰총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검수완박에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청와대는 “의회의 시간”이라는 말로 선을 그었다. 퇴임을 엿새 앞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겠지만 앞으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한 의회의 시간에 주목해야 한다는 행간이 읽힌다. 다음 총선인 2024년 4월 10일까지 전개될 2년간의 ‘여소야대 정국’이 파란을 예고한다.
중앙 정치판에서 지방으로 고개를 돌리면 또다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방선거가 50일도 채 남지 않았지만 영 활기가 없어서다. 지방선거를 중앙당에서 좌지우지해 온 전력으로 봤을 때 검수완박 정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완전히 분리하는 검수완박에 여론의 반응이 차가운 상황이라 일단은 민주당 후보에 불리해 보인다. ‘강 대 강’ 정국에 따른 지지층 결속 효과가 나타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방선거 선거구 획정을 매듭짓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회의 직무 유기가 아닐 수 없다. 당리당략에 골몰한 정치권이 1개 선거구에서 기초의원 3명 이상 선출하도록 해 소수정당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는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을 머뭇거리고 있어서다. 이번 6·1 지방선거에서는 시범실시하기로 뒤늦게 합의했다고 하니 15일 본회의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깔끔하게 처리할지 두고 볼 일이다.
마침 15일에는 마지막 거리 두기 조정안이 발표된다. 현재로서는 18일부터 사적 모임과 영업시간 제한 등 시민의 일상을 옥죄던 규제가 풀릴 것으로 전망된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제 거리 두기는 사실상 막을 내리는 셈이다. 그렇다고 ‘거리 두기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마냥 온당한 일만은 아니다.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거리 두기를 스스로 늘 내면화하는 게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유권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정치에도 일정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겠다. 정치권의 이전투구식 권력 다툼에 섣불리 마음을 주었다가는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정치의 곁불을 쬐려 하거나 SNS에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이 당 저 당 진영별 응원전을 펼치려 들다가는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검수완박 정국에서 거리 두기의 정치학이 필요한 이유다. 정국 흐름으로 볼 때 협치와 통합은 벌써 물 건너갔고, 다음 총선 때까지 새 정권과 거대야당의 물러설 수 없는 진검승부가 내내 펼쳐질 공산이 크다. 정치가 감염병 같은 바이러스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 유권자에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깨어 있는 정치 관찰자 혹은 비판자로 남는 게 투표로 정치를 심판하는 유권자에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2022-04-1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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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생활정치의 꽃, 지방선거
지방 깔보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돈과 권력이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리는 오랜 중앙집권제로 지방은 소멸 위기에 놓였지만 그렇다고 서울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는가. 인구 과밀화에 따른 집값 상승에다 교통지옥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은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채 날로 팍팍해질 뿐이다. 지방과 수도권의 균형발전이 왜 중요한지 값비싼 대가를 치른 오늘에 와서야 정치권, 나아가 새 정부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그런데도 정치는 여전히 중앙에 쏠려 있다. 지방선거라 해서 지방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국회가 있는 서울을 본거지로 한 정당이 방방곡곡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치가 지역주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권력 쟁취를 위한 정당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한때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고려했던 정치권이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를 놓고 샅바싸움이 한창이다. 여야가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거대정당이 독식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거대담론 저물고 생활정치 부상
지방선거도 ‘동네 생활권’ 주목
쾌적한 공동체 조성 이바지해야
권력 다툼에 골몰하는 중앙정치
지역주민의 행복엔 관심 없나
정치 혁신은 지방에서 시작돼야
새 정부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만 해도 그렇다. 지방에서 보기에 청와대든 용산으로 옮기든 왕조시대 도성의 안과 밖 차이일 뿐 같은 서울 하늘 아래라 오십보백보다. 정부 부처가 죄다 옮겨 간 행정수도 세종시는 멀찌감치 놔두고 행정 수반인 대통령이 굳이 한양을 지키겠다는 게 영 마뜩잖다. 동네 생활권인 ‘15분 도시’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터에 KTX를 타고도 2시간 30분 넘게 걸리는 ‘한양 천 리’ 밖의 일이 지역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동네가 이만큼 쾌적해진 것은 그 팔 할은 지방자치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자제가 부활한 1991년 이전과는 상전벽해의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도로는 차만 쌩쌩 달릴 뿐 보행자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보도조차 충분하지 않았고 도심에서는 마땅히 걸을 길도, 꽃과 나무도, 쉴 만한 공원과 숲조차 찾기 어려웠다. 지자제 이전 그 많던 시민 세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는 한 대선 후보의 슬로건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지방자치는 생활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생활이 되는 생활정치다. 그 생활정치의 꽃은 역시 지방선거다. 15분 도시이든 21분 도시이든 의료, 보육, 문화, 생활체육 등 각종 편의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쾌적한 생활권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지방일꾼을 뽑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활정치에까지 정당이 끼어들어 권력 다툼의 장으로 물을 흐려서는 안 될 일이다. 기초의회 의원과 기초지자체 단체장의 정당공천 폐지론이 꾸준하게 나오는 이유다.
20대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일상의 행복을 찾는 생활정치가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인상이다. 거대담론의 시대가 가고 일상의 작은 담론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어서다. 겉만 번드르르한 이념 지향에서 벗어나 먹고사는 문제, 작은 권리 찾기, ‘지금 여기’ 우리 동네의 발전 등 일상생활로 정치가 파고들었다. 정치가 더욱 세심하고 전문화된 정책으로 유권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살아남는 시대다.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정계 은퇴의 변이 이 대목에서 겹쳐진다. 그는 ‘정치를 그만둡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고 일상의 행복입니다”라고 밝혔다. “선거만 있으면 출마하는 직업적 정치인의 길을 더 이상 걷고 싶지는 않다”고도 했다.
3·9 대선과 6·1 지방선거 사이에서 정치지형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86그룹(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의 퇴진과 세대교체는 예견된 터였다. 더불어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낳은 ‘87년 체제’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 개헌이라는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정치 혁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릴 이번 지방선거에서 특히 여성과 청년의 정치 참여가 기대를 모은다.
지방선거가 변해야 한국 정치에 희망이 있다. 지방자치제는 풀뿌리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뿌리째 바뀌어야 우리 정치가 바뀐다. 지금까지의 하향식 중앙정당 정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풀뿌리 정치여야 비로소 정치 혁신과 개혁을 말할 수 있다. 지방이 바뀌어야 나라가 바뀌고, 나라 또한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지방선거를 통해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정치 재목을 찾는 것도 유권자에겐 쏠쏠한 즐거움이다. 정치 지도자는 무릇 지방선거에서 발굴되고 키워져야 한다. 권력만 좇는 정치가 아니라 민의를 떠받드는 정치는 지방이라는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길러져야 마땅하다. 따라서 정치 혁신과 개혁의 진정한 주인공은 지역주민이며, 그 출발선은 지방선거일 수밖에 없다.
2022-03-31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