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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수도권만 살 수 있을까
지난주에는 빅이슈가 많았다. 12년 만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최근 WBC 야구 한·일전의 결과가 외교에서도 이어진 느낌이다. 그 직전인 14일에는 가덕신공항의 2029년 12월 개항이 확정됐다. 부산시민이 염원해 온 2030부산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이전 가덕신공항 개항이 마침내 가능해진 것이다. 15일에는 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전국 15개 국가첨단산업단지 지정 계획이 나왔다. 이 계획에 유독 부산만 빠져 의아했다. 부산시가 땅이 없어서 신청을 안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부산은 가덕신공항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 좀 빠져 있으라는 의미로 읽혀 찜찜했다.
중앙지가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중앙지란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사가 전국에 보급하는 신문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들에게 지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돌연 공기 6년 단축한다는 가덕도 공항, 믿거나 말거나인가’라는 사설 제목으로 “내년 총선 부산 경남 표를 얻으려고 이런 믿거나 말거나 발표를 한다”라고 몰아갔다.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가덕도 신공항 工期 절반으로 줄이겠다… 이래도 되나’였다. 한겨레신문도 ‘가덕도 신공항 5년 단축, 안전 경시 무리수 아닌가’라며 동조했다. 서울신문은 “도로 물려도 시원찮을 국책사업에 안전성 시비까지 얹어져서는 말이 안 된다. 총선이 다가오니 부산·경남 표밭을 의식한 포퓰리즘이 또 도지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라고 비난을 쏟아부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은 ‘추앙했다’. 조선일보는 ‘수도권에 세계 최대 삼성 반도체 결단, 한국에 마지막 기회’라는 사설 제목으로 찬양했다. 다른 중앙지도 비슷한 태도로 속도전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정부는 반도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제때 공급할 수 있도록 수도권 대학 정원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중앙일보는 “지방 분권에 역행하고 수도권 집중을 강화한다는 비판 역시 극복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인력 양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지율이 하락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라며 돌격대 역할을 자임했다. 한국일보만이 “추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균형발전 저해와 특혜 논란 등을 보완할 실질적인 대책에도 신경을 쏟길 바란다”며 비교적 균형 잡힌 자세를 보였다.
2002년 중국 민항기의 경남 김해시 돗대산 충돌 사고로 출발한 가덕신공항 건설과 관련한 논란이 일단락되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공법을 바꾸고 공기를 단축해 엑스포 전에 안전한 국제공항을 개항하겠다는 계획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으려면 엄청난 부지가 필요해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가 완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벌써부터 수도권 대학 정원을 풀라고 성화다. 속도전은 왜 수도권에만 유효한가.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문을 닫는다’는 말이 씨가 되면서, 벚꽃을 보는 심사가 편치 않다. 지방을 쥐어짜서 서울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일 게다.
서울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 있다. 전국의 출산율이 낮아서 걱정이지만 특히 서울은 지난해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적은 0.59명이란 충격적인 출산율 수치가 나왔다. 두 명이 0.5명을 낳으니 서울은 이미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구학자 서울대 조영태 교수가 얼마 전 아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너무나 엄청난 집중 때문이다. 경쟁이 굉장히 심해 모든 인생이 다 경쟁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진행자가 “저출산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핵심 원인을 수도권 집중에서 보는 이런 시각은 지금 처음 듣는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감탄해서 오히려 놀랐다. 서울이라는 고지에 서면 지방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전기 먹는 하마’라고 불린다. 용인에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우리나라 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의 무려 20%가 소비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력 자급률이 서울은 8.9%, 경기는 60.1%에 불과하다.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어디서 끌어오느라 얼마나 비용이 들지 생각은 한 것일까. 원전을 떠안은 부산의 전력자급률은 200%가 넘는다. 항만, 공항, 대학에 전력까지 풍부한 부산 주변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은 왜 고려의 대상조차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아무리 저출생 대책을 세우면 뭐 하나 싶다. 그 몇 배, 몇십 배의 수도권 초집중 정책이 쏟아지니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이래저래 맘 편하게 벚꽃을 즐기기조차 힘든 봄이다.
2023-03-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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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김장하 보유 도시
지방에는 아직도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보고 새삼 깨달은 것이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경남MBC가 만든 이 다큐는 지난해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2부작으로 경남 지역에만 방송이 되었다. 방영과 동시에 SNS에서 추천 열풍이 불었고, MBC는 이례적으로 지난 설 연휴 전국 방송으로 다시 내보냈다. 그 뒤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이 다큐가 던진 감동에 여러 방송뿐만 아니라 중앙지와 지방지를 막론하고 신문 기사나 칼럼으로 다루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김장하라는 한 개인은 대체 경남 진주에서 그토록 많은 선행을 수십 년간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해 왔을까. 그의 도움으로 수많은 학생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쳤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쉼터가 만들어졌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극단이 안정적인 공연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했고, 〈진주신문〉은 10년 동안 발행할 수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존경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장학금 덕분에 공부를 계속한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감사 인사를 하러 가자 “사회에 받은 걸 주었을 뿐이니 혹 갚아야 할 게 있다면 사회에 갚아라”고 했다.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이에게는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고 위로했다. 장학금을 받고도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다고 미안해할 때는 “그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다”라고 존중했다.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는 재미를 더했다. 그는 야구 구경을 좋아하고 최동원 선수를 참말로 좋아했다고 털어놓는다. “스트라이크 던져서 맞으면 또 그 자리에 한 번 더 던지거든. 쳐 봐라 이거지. 나는 그런 배포가 좋아.” PD가 어디 팬이냐고 묻자 “옛날에는 롯데였고, NC로 갈아탔지”라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큐가 방영된 뒤 배주현 창원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는 “이런 분이 NC 팬인 것이 코리안시리즈 우승보다 더 뿌듯하다”, 진주 사람들은 “김장하를 가진 진주에 산다”고 자랑한다.
롯데 자이언츠는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롯데는 1988년에 선수회를 만들려고 했던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했다. 최동원에 관한 다큐 영화를 만든 감독을 만나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롯데로부터 딱 한 번 전화가 왔는데 “NC의 지원을 받았느냐? 선수협 이야기가 나오느냐?”라는 두 가지만 묻고 끊더라고 했다. 롯데가 지금처럼 애증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큐에는 김장하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쫓는 사실상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영화는 평생을 지역 언론에 몸담은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가 퇴직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취재할지 고민하고, 백팩을 메고 김장하를 아는 100여 명의 취재원을 버스나 기차를 타고 찾아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로드무비처럼 느껴졌다. 김 기자는 30년 전에도 선생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2016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한 대목으로 다룬 〈별난 사람 별난 인생〉을 출간했다. 김 기자는 2015년 〈풍운아 채현국〉을 출간한 뒤 여러 사람들로부터 김장하 선생의 기록을 꼭 남겨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서 7년간 주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고 한다. 종이 매체와 지역방송과의 협업도 눈여겨볼 대목이었다. 김현지 MBC경남 PD는 2년 전 선생의 승낙을 얻지 못해 그때는 포기했지만 이번에는 김 기자와 협업으로 성공했다. 김 PD는 전국 방송에 출연해 “새로운 이야기는 늘 변방에 있다. 그 이야기는 심마니처럼 훑고 다니는 우리가 제일 잘한다. 지역이 지역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줬으면 좋겠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평생 인터뷰를 거절해 온 선생이 이번에는 왜 취재에 응한 것일까. 선생이 “제일 문제점이 뭐냐면 사회가 겁을 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겁나는 데가 없이 설치면 사회가 몰락하거든”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지난해 허구연 KBO 총재는 프로야구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안착 원인을 군사정권의 일 처리 방식에서 찾은 박영길 전 롯데 감독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대기업들이 서로 하고 싶은 대로 서울로 몰려든 게 아니라 지역별로 나누어 맡아서 균형을 이루었고, 그래서 전 국민이 자기 고향 출신 선수들이 뛰는 팀을 응원하면서 프로야구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 훌륭한 출발이었다. 지금은 수도권 구단이 5개로 절반을 차지한다. 위기에 빠진 프로야구 판을 보면서, 지방소멸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2023-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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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너의 길을 만들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800km)에는 새로운 순례객들의 발자국이 날마다 생긴다고 한다. 연간 30만 명이 완주 증서를 받아 간다니 말 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이 길을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꼽는다. 산티아고길 순례자 중에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있었다. 일찍이 코엘료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음반 회사의 지사장으로 잘나갔는데 갑작스러운 해고로 시련을 겪는다. 39세의 코엘료는 1986년에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떠났고 이게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길을 걷고 나서 원래의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어 대표작인 〈연금술사〉와 〈순례자〉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7년 천직이라고 여기던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50세의 나이에 산티아고길을 걸으러 떠난 한국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막바지 여정에서 만난 영국인 길동무의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너는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너의 길을 만들어라. 나는 나의 길을 만들 테니”라는 말은 그녀를 감전시켰다. 고향 제주도로 돌아온 그녀는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이야기다. 올레길(437㎞)은 제주도 여행의 판 자체를 흔들었다. 유명 관광지에만 몰리던 사람들이 올레길을 따라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찾았다. 심지어 제주도에 청년 인구의 유입까지 늘게 만들었으니, 길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올레길의 성공을 목격한 지자체들도 저마다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이 된 제주 올레길과 1200년 역사를 지닌 산티아고길은 지난 7월 우정의 길 협약을 맺고 공동완주제를 도입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스페인과 제주의 길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내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는 ‘코리아 둘레길’(4500km)의 의미를 부각하고 싶어서다. 그동안 시범 개방되던 ‘DMZ 평화의 길’이 내년 4월 개통된다.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비무장지대와 접경 지역을 평화와 공존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 김포, 고양,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 11개 코스가 있다.
코리아 둘레길 가운데 해파랑, 남파랑, 서해랑길은 이미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열린 750km의 해파랑길이 가장 먼저였다. 2020년에는 역시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군 땅끝까지 이어지는 1463㎞의 남파랑길이 열렸다. 해남 땅끝에서 인천 강화를 연결하는 1800㎞의 서해랑길은 지난 6월 개통했다. 2010년 문화체육부가 둘레길 조성에 나선 지 13년 만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위치정보기반서비스 두루누비 앱을 열면 선택한 코스를 편하게 따라 걸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코리아 둘레길을 산티아고길처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걸어 본 사람들은 단조로운 산티아고길보다 바다가 보이는 해파랑길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K컬처가 세계인들의 각광을 받는 모습을 보면 코리아 둘레길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해파랑과 남파랑의 시작이 오륙도이니 부산시도 내년 코리아 둘레길의 완성을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활동에 활용해도 좋겠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 DMZ이라고 한다. ‘평화의 길’도 잘 운용하면 세계적인 명소는 물론이고 남북 긴장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 관계에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가상 열차표 가격이 61만 5000원으로 나와 관심을 끈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만주-시베리아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코리아 둘레길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까지 10년 이상을 이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23년에 대해선 기대보다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짐 오닐은 1997년과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를 경고했고,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을 특히 취약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힘들 때일수록 걷기가 필요하다. ‘동지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는 말이 있다. 밤이 깊고 혹한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의 기운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볼 작정이다.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까지 이어지는 진정한 코리아 둘레길이 완성되는 그날을 기다린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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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늑대가 못 나타났어요
음악도 모르는 내가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를 찾아 들은 이유는 행정안전부가 미는 노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서였다. 덕분에 그의 묘한 매력에 빠져 “동시에 죽어버리자”고 선동하는 ‘환란의 세대’까지 다 듣고 말았다. 지난달 16일 부산에서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늑대가 못 나타나면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사회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은 이랑에게 이 노래를 꼭 불러 달라고 했지만 공연을 3주 앞두고 대신 ‘상록수’를 불러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다. 재단에 예산 지원을 하는 행정안전부가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 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이라는 이름을 상록재단 등으로 바꿀 생각이 아니었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에 책임이 있는 행안부 장관의 말에 절망하고 있다. 행안부 입에서 지금 ‘밝고 희망찬’이란 소리가 나오는가.
정치를 보며 버린 눈과 귀를 요즘은 월드컵에서 정화하는 중이다. 지상파 3사의 시청률 경쟁도 뜨거워지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는 일찌감치 MBC로 채널을 고정했다. 축구 중계라도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그동안 MBC 보도가 항상 공정했던 것도 아니고 청와대 출입기자가 감정을 실은 질문과 말싸움을 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MBC가 밉다고 동남아시아 순방 직전에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막는 조치는 너무 졸렬했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있으면 힘내라고 격려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월드컵 중계 시청률이 MBC가 단연 1등이고, MBC 뉴스도 11월 들어 시청률 1등 자리에 올랐다니 사람들 마음이 다들 비슷한가 보다.
풍자는 예부터 사회의 불합리성과 불평등을 비판해 사회적 약자의 박탈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 왔다. 풍자(諷刺)의 자(刺)는 刀(칼 도)와 朿(가시 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찌른다는 의미이니, 당하는 권력자 입장에서는 아플 수밖에 없다. 언론 자유가 낮거나 독재국가에서는 풍자 때문에 탄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통령을 소재로 한 유머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지금도 YS라는 별명으로 사랑을 받는 김영삼 대통령은 ‘이제는 대통령을 놀리거나 욕해도 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YS를 소재로 한 유머 책 〈YS는 못 말려〉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새삼 풍자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최근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제동을 거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2022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윤석열차’라는 제목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 작품이 경기도지사상 금상을 받고 전시된 것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엄중 경고를 하면서 불거진 논란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 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는 윤석열 정부와 영부인 김건희 전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풍자한 만화가 전시에서 유일하게 제외되었다고 한다. 사실 ‘윤석열차’ 논란은 조용히 넘어갔을 일인데 문체부가 개입하면서 사태를 전국 뉴스를 넘어 외신까지 소개되도록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알려진 정보를 억압하려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 정보를 접하도록 역효과를 낳는 현상을 ‘스트라이샌드 효과(Streisand effect)’라고 부른다. 저질 만평이나 싣던 프랑스 3류 언론사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과격단체에게 테러를 당하면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사례를 윤석열 정부는 새길 필요가 있다.
요즘엔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그의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묘사한 부분에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아서 일부를 소개한다. “전두환은 수사를 하다가 대통령에 취임한, 세계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사관이었다. 자신의 직속상관들까지도 모조리 체포하고도 성이 다 차지 않았던지 그냥 자신이 피해자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수사하다가 계속 수사와 체포로 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국정목표가 수사였고, 국정 지표가 체포였던 것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수사만 난무하는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그의 7주기 추모 현장에서 “지금은 모두 거산(巨山)의 큰 정치 바른 정치를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라는 방명록을 남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는 임금이 자신의 약점이던 귀를 마음 편히 내놓고 백성의 소리를 들어 훗날 위대한 성군 중 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민심에 귀를 기울여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2022-11-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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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얼마나 달라졌을까
“수억 번을 동시에 찔린 것 같았다.” 이태원 참사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참담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 ‘자식 잃은 부모’라고는 차마 못 부르겠다. 그래서 참혹할 참(慘)에 슬플 척(慽)을 써서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지난 주말 학업이나 취업 때문에 서울로 간 자식을 둔 부모들은 애간장이 탔다. 전화를 받지 않아 밤새 전화를 건 경우도 있었다. 지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아들이 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그저 고마웠다고 했다. 부울경에 연고가 있는 사망자도 모두 8명이나 되었다.
이태원 참사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부산 시민위안잔치를 새롭게 소환했다. 1959년 7월 1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이날 3만여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하려 좁은 출입구로 몰리면서 67명이 깔려 숨졌다. 당시 〈부산일보〉 7월 18일 자는 ‘시민위안의 밤서 대참사’라는 제목 아래 사고 소식을 전했다. ‘사고를 방지하고자 미리 동원되었던 70~80명의 경찰관은 소란이 일어나자 군중들의 동요를 제지하려고 약 50발의 공포를 쏘았으나 때마침 억수같이 퍼붓는 비바람 속에 사방의 아우성을 멈추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공포의 한 시간이 끝난 뒤에는 어린것들의 시체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으며 많은 신발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이러한 사고는 재작년 10월 제38회 전국체육대회 때에도 일어난 바 있으며, 작년도 시민위안의 밤에도 대혼잡을 이루어 부상자를 내었던 것이다.’ 사고 모습도 그렇고 참사의 조짐까지 너무 비슷해서 놀랄 정도다. 1959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6년밖에 되지 않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81달러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이 가 보고 싶어 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기차역, 공연장, 학교, 거리 등 곳곳에서 압사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왜 후진국형 사고를 반복하는 것일까. 지난 29일 이태원에는 13만 명이 몰렸는데 경찰 병력은 고작 137명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전날인 28일에도 여성들이 인파에 떠밀려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경찰과 용산구청은 CCTV로 이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우기니 억장이 무너진다.
외국에서 들어 온 이상한 축제에 가서 그렇게 된 거 아니냐고 비난하는 일도 제발 삼가자. 그건 외국인 희생자들에게 왜 이상한 나라 한국에 가서 사고를 당했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은 핼러윈데이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 줄 다 안다. 기성세대가 보신각 타종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핼러윈도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세상이 빨리 변하니, 내가 이해 못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BTS 공연장을 인원이 적게 들어가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으로 변경한 것은 참 잘한 결정이었다. 5만 5000명이 몰린 이날 행사에는 보안요원, 자원봉사자, 지자체 공무원, 소방, 민간단체 등 2700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부산경찰청도 공연장 외부 질서 유지와 교통혼잡을 막기 위해 교통경찰 600명, 기동대 8개 중대 400명, 일선 경찰서 경찰관 240명, 경찰특공대 등 1300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아미(ARMY)가 있었다.
부산불꽃축제의 무기 연기도 아쉽기는 하지만 당연한 결정이다. 언젠가 부산불꽃축제에 참가했다 좁은 골목에서 인파에 떠밀려 이태원 참사와 유사한 체험을 한 뒤로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주변에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부산불꽃축제에서 여태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산불꽃축제 재개에 앞서 철저한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 뒤 국민들은 오로지 안전한 대한민국을 바랐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 믿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는 이 같은 사건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기는커녕 공직자의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행안부 장관은 당장 사퇴하는 것이 옳다. 부산에서 압사 사고가 난 1959년은 가난에 허덕이던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을 시도, 서울 인구 집중이 심화되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서울 초집중이 심해지다 보니 좁은 면적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몰려도 사회가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학업과 취업으로 인해 힘든 서울살이를 하던 지방 출신 희생자들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미안하다.
2022-11-0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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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요즘 가족
‘어느 용병의 30년 명절 전투 종전기.’ 추석을 앞두고 지인이 페이스북에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차례 전투가 끝나면 전우였던 동서와 함께 다음 전투를 기약하며 각자의 조국(친정)으로 길을 떠난다. 그럴 때면 며느리는 용병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충성하면서 조국 전투엔 참전을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매년 이 전투를 무사히 치르자 다짐했는데 올해는 남편이 전투 형식에 모순을 느끼더니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없다면서 종전을 선언했다. 연휴에 펜션을 예약했다니 30년 넘게 차례를 지내 온 입장에선 아쉬운 마음도 든다.”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마음에서 온 병이었다.
성균관이 올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간소화 방안을 내놓은 걸 보면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낡은 수식어를 점차 덜 쓰는 점도 다행스럽다. 이주민 인권운동을 하는 분으로부터 “민족은 결국 인종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이 표현은 듣기에 불편해졌다. 명절 연휴에 거리에서 만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갈 데가 없는 이방인처럼 보인다. 우리 명절도 크리스마스처럼 모두가 행복한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추석을 앞두고 발생한 몇 가지 일들이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엄마, 사랑해요.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항 아파트 주차장 침수 사고로 숨진 중학생 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한 작별 인사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돈을 더 벌 궁리가 아니라,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남북 간 생사 확인, 서신 교환 및 수시 상봉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 이산가족 회담을 북한당국에 제안해서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일들이 아닌가. 이산가족 생존자 중 80세 이상 고령자가 66.4%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산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마지막 소원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추석 직전 한 통신사가 내놓은 상품에서 변화를 실감했다. SK텔레콤의 신규 유무선 결합상품 ‘요즘가족결합’은 거주지가 같으면 할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동안 법적 가족만 결합 할인을 제공했는데 혈연이 아니더라도 할인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친족가구’는 법적 가족, 혈연이 아닌 일반 가구 가운데 친족이 아닌 남남으로 구성된 5인 이하 가구를 의미한다. 지난해 부산의 비친족 가구원 수는 5만 4796명으로 사상 처음 5만 명을 넘어섰다. 2016년 3만 1067명과 비교하면 5년 만에 76.4%나 급증했다. 비친족 가구가 크게 늘어도 가족처럼 서로 돌보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지원 제도가 전무해서 문제였다. 이들은 주거 대출·주택 청약 등 법률혼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주거 지원을 받지 못한다. 부부에게 제공하는 자동차 보험 할인이나 통신사 가족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장벽이 하나 무너진 것이다.
법률상 가족관계로 인정받지 못하면 동거인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보호자 동의’가 대표적이다. 비혼 동거 가족은 서로가 보호자지만 법적 혼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각국에서 가족의 범위는 확장하고 있다. 우리에겐 낯선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이라는 용어가 일상에서 사용된다. 혈연이나 법률혼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밀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에서 가족돌봄휴가의 대상 가족에는 ‘선택된 가족’ 개념이 적용되는 추세다. 스웨덴에서 정부로부터 돌봄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는 혈연이나 인척 관계가 없는 친구나 이웃도 포함된다. 캐나다는 근로자가 임종을 앞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근로를 하지 못할 경우 임금의 55%를 보전해 준다. 유일한 조건은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가이다.
가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가족 구성원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허민숙 여성학 박사는 “가족이라는 개념의 변화는 이러한 정서적 안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가족 실천의 결과일 수 있다. 가족에게 기대했던 정서적 안정을 가족으로부터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적극적인 가족 선택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족은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2-09-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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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어느 가족'이 왜 그렇게 늘었을까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이 최근 재소환됐다. 인구는 줄었지만 1인 가구와 함께 '비친족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청 '2021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가 나오면서다. 비친족 가구는 시설 등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가구를 제외한 일반 가구 가운데 친족이 아닌 남남으로 구성된 5인 이하 가구를 의미한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같이 살거나,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가구 등이다. 비친족 가구 수는 1년 만에 부산에서 13.7%, 전국적으로는 11.6%나 증가했다. 비친족 가구가 이렇게 늘어난 이유와 함께 이들은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 가족이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나온다. 법적으로는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에 따른 사회의 기본단위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가족의 개념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4인 가족 기준'이라는 말이 지금도 입에 붙어 있지만 정상 가족의 기준이었던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4인 가족은 이미 대세가 아니다. 가구원 숫자로 가구를 나누면 지난해 1인 가구 33.4%, 2인 가구 28.3%, 3인 가구 19.4%, 4인 이상이 18.8% 순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구는 이제 1인 가구다. 전형적인 가족상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은 혼인율의 두드러진 감소세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2021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해 56.3%가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혼 건수까지 감소할 정도로 혼인율이 떨어지고 있다. 2021년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법적인 혼인, 혈연으로 연결되어야 가족'이라는 전제에 대해 51.1%가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혈연 또는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61.7%가 가족으로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밀한 관계라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45.3%가 동의했다. '사실혼, 비혼 동거 등 법률혼 이외의 혼인에 대한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76.9%가 찬성했다.
▇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주인공 할머니의 낡은 집에서 서로 남남이지만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가족처럼 지내는 이들이 어느 날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아이를 유괴한 이유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라는 반문이 가슴을 찔렀다. 혈연관계가 가족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포털사이트 다음의 '어느 가족' 네티즌 평점란에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영화평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실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도 있잖아.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건 좋지." "이들이 필요했던 건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진짜 가족보다 낫지요." 자신도 이런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지난해 부산의 비친족 가구원 수는 5만 4796명으로 사상 처음으로 5만 명을 넘어섰다. 2016년 3만 1067명과 비교하면 5년 만에 76.4%나 급증했다. 생물학적인 가족과 같이 살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구가 급증하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
▇ 두 분은 어떤 관계세요
이처럼 비친족 가구가 늘고 있지만 가족처럼 서로 돌보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 대한 지원 제도는 전무하다. 새롭게 구성한 친밀한 관계를 우리 사회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상 가족관계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동거인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도움을 주고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보호자 동의'가 대표적이다(의료기관의 '보호자 동의'는 법률 근거 없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비혼 동거 가족은 서로가 보호자지만 법적 혼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족돌봄휴직·휴가제도도 가족의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들은 주거 대출·주택 청약 등 법률혼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주거 지원도 받지 못한다. 부부에게 제공하는 자동차 보험 할인이나 통신사 가족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등기 우편을 대신 받을 때도 "어떤 관계냐"라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법률상 가족으로 칭할 사람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가족해체로 가족과 교류가 없는 사람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동거인처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보호자 자격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 외국에선 가족 개념 달라졌다
미국에서는 의료 관련 의사결정 대리인을 건강돌봄대리인이라고 부른다. 뉴욕주의 경우 건강돌봄대리인은 법정대리인, 배우자, 동거인, 부모, 18세 이상의 형제자매, 그리고 가까운 친구(a close friend)로 예시하고 있다. 건강돌봄대리인은 당사자의 평소 신념과 바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신뢰 깊은 사람이면 자격이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이라는 용어도 주목할 만하다. 혈연이나 법률혼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밀한 사람을 말한다. 미국에서 가족돌봄휴가의 대상 가족에는 '선택된 가족'과 유사한 가족 개념이 적용되는 추세다. 코네티컷주, 오리건주, 콜로라도주에서는 '가족과 같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는 가족으로 인정되어 근로자의 유급 가족돌봄휴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가족의 범위는 다른 나라에서도 확장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정부로부터 돌봄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는 혈연이나 인척 관계가 없는 친구나 이웃도 포함된다. 캐나다에서는 근로자가 중병에 걸렸거나 임종을 앞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근로를 하지 못할 경우 임금의 55%를 보전해 준다. 유일한 조건은 근로자가 돌봄을 제공하려는 자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 적극적 가족 선택 더욱 증가
가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절반가량이 '가족 구성원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의 가족은 그동안 정서적 안정 역할을 제대로 해 왔을까. 허민숙 여성학 박사는 "가족이라는 개념의 변화는 이러한 정서적 안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가족 실천의 결과일 수 있다. 가족에게 기대했던 정서적 안정을 가족으로부터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적극적인 가족 선택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여성가족부도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규정한 건강가정기본법의 조항을 삭제하고, 가족 다양성을 포용하는 정책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성가족부가 폐지된다니 어쩌면 이러한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한국교회총연합 등 교회단체는 여성가족부의 법률혼 이외 가족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정책에 대해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기도 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2022-08-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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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7말8초’는 연중 가장 붐비는 여름 휴가철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다음 주에 휴가를 간다고 한다. 공무원들 모두 휴가 가라는 의미라는데 이 같은 솔선수범은 잘하는 일이다. 쉬면서 하반기 국정운영 방향을 새롭게 구상하고, 말 많고 탈 많았던 도어스테핑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독서광이었던 전임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휴가 기간 읽었던 독서 리스트가 나돌았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 윤 대통령이라 혹시 휴가철에 다녀간 대통령의 맛집 리스트가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정치 입문 이후 불철주야로 달려왔기에 쉬면서 힘 좀 빼면 좋겠다는 의미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완고한 모습만 보여 주면 서로 좋을 게 없다.
좋은 말도 세 번이면 질린다고 했다. 대통령부터 총리, 장관, 여당 대표 직무대행까지 툭하면 ‘법과 원칙’ 그게 아니면 ‘법치주의(법치국가)’를 입에 올리니 거슬린다. 윤 대통령은 “선진국, 특히 미국은 정부 소속 법조인들이 정·관계에 아주 폭넓게 진출하고 있다. 그게 법치국가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미국보다 더한 법치국가다. 전임 대통령부터 현직 대통령까지, 심지어 여야의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들까지 모두 법조인 출신인 나라다. 21대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은 총 46명으로 전체의 15%를 넘는다. 20대 국회에는 49명으로 지금보다 많았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 ‘쪽수’로 따지면 이만한 법치국가가 세상에 없다.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유혈 사태 없이 마무리되어 천만다행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은 “법과 원칙을 향한 윤석열 정부의 단호한 태도가 극한투쟁에 제동을 걸었다”고 평가했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노사관계에서 법치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면서 공권력 투입 가능성을 시사했을 때는 정말 큰일 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업 불황으로 지난 5년간 30%의 임금 삭감을 감수했다. 조선업이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임금을 회복시켜 달라는 요구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통해 파업이 장기화되는 것을 미연에 막았어야 했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행정안전부 산하 경찰국 신설 논란도 그렇다. ‘검수완박’ 입법 이후 경찰 권력 비대화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회 통과가 필요한 법 개정을 우회해 시행령 개정으로 처리한다면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가.
여야 간 법에 대한 해석 차이가 커서 누구 말이 맞는지 늘 헷갈린다. 법에 대한 정의(定義)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소개한다. 법(法)은 물 수(水), 거할 거(去)를 합친 글자로 물이 흘러가는 길을 말한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늘 낮은 곳을 향한다. 그리고 더 이상 아래로 흐를 곳이 없으면 수평을 이루는데 이것이 평등이다. 물이 흐르듯 힘없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소외받는 사람을 위해 법이 존재해야 하고,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른 물이 수평을 이루듯 모든 사람이 두루 평등하게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진정한 법치국가다. 도사 같은 행색에 한때 공중 부양(?)으로 명성을 떨친 전직 정치인이자 현직 농부의 이야기다.
휴가를 앞둔 대통령에게 지난 4월에 타계한 법조계의 거목 한승헌 변호사의 책을 권해 드리고 싶다. 법치주의 관련해서도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와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두 권이 있다. 이 책들에서 한 변호사는 “한국의 집권자는 법치주의를 하향적 지배 수단으로 잘못 알고 있다. 법치주의가 하향적 지배가 아닌 상향적 권력 견제 장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집권자는 국민에 대한 준법 훈시가 법치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법치주의 또는 법과 원칙을 내세워 묻지 마 밀어붙이기 등 독재를 꾀하는 지도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일갈한다. 또 여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줄여서 ‘민변’, 즉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라는 간판 글씨를 그가 직접 썼다고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권력의 단맛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법대로 하자’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다. ‘옳고 그름을 법으로 판단하자’는 말이지만 ‘싸우자’라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25일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오직 약자에게만 엄격하다”라고 했다. 대통령과 당정은 법치주의라는 명분으로 국민을 윽박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걸 법대로 할 것 같으면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나. 대체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2022-07-2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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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국 곡물 자급률 20%, 이대로 괜찮을까
어쩐지 아직 초여름인데 너무 덥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평균기온이 역대 세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심지어 6월 하순 평균기온은 전국적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았다. 부산의 도심 건널목에 고정형 파라솔이 흔해진 것도 갈수록 더워지기 때문이다. 6월 세계 평균기온 역시 관측 사상 세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2019년과 2020년에 이어 세 번째였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세상이 갈수록 뜨거워지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올해가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월 중에서 가장 시원한 해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나니, 가슴속으로 냉기가 들어온다.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일까….
이탈리아, 이달 초 40도 안팎 폭염
알래스카, 산불로 9700㎢ 피해
밀가루·식용유 등 가격 크게 올라
수입 곡물 가격, 하반기 폭등 조짐
국내 농지, 50년간 30% 이상 감소
곡물자급률, 2020년 기준 20.2%
식량 안보, 국가적 어젠다로 격상
글로벌 곡물 공급망 다변화 필요
■ 심상찮은 폭염·산불의 의미
요즘 세계 각국의 기상이 심상치 않다. 일본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6월을 보냈다. 도쿄 도심의 최고기온은 연이어 닷새 동안 섭씨 35도를 넘었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도쿄에서 열사병 사망자만 52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달 초 40도 안팎의 폭염으로 최고 단계의 경계경보인 열파 적색경보가 발령됐다. 열파(熱波)가 어린이·노약자는 물론 건강한 성인에게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어서였다. 지난 4일에는 이탈리아 알프스의 돌로미티산맥 최고봉인 마르몰라다 정상(해발 3343m)에서 빙하가 무너지면서 눈사태가 발생했다. 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실종되는 대형사고였다. 지난달부터 이탈리아 전역에서 지속된 폭염의 영향으로 만년설과 빙하가 녹은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는 올해 5월부터 현재까지 산불로 9700㎢의 면적이 불에 타 역대 최악의 피해 기록을 경신 중이다. 지난해에는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 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짧은 여름 기간 발생한 이 산불로 한반도보다 더 큰 면적이 불에 탔다. 이처럼 기후가 매년 나빠져서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기후는 비가역성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전까지의 자연재해가 시기나 지역이 국한된 단발성이었다면, 최근에는 농업 등 연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복합 재해의 성격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기후위기가 유발하는 식량위기에 대해 시급하게 대비해야 할 때다.
■ 하반기엔 곡물 가격 더 뛴다
2분기 생활필수품 가운데 밀가루(31.3%)가 최고, 그다음으로 식용유(23.9%)가 많이 올랐다. 밀가루와 식용유가 없으면 안 되는 빵집, 중국집, 치킨집은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고 있다. 물가 폭등 시대를 맞아 업주는 식당을 운영하기가 힘들고, 소비자는 외식 한 번 하기가 겁이 난다. 3분기 수입 곡물 가격은 전 분기보다 10% 이상 오를 수밖에 없다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고점을 찍은 시기(3~6월)에 구입한 물량이 3분기에 국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세계 밀 공급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진 변수가 세계 2위의 밀 생산국인 인도다. 지난 5월 인도는 밀 수출을 연말까지 전면 금지했다. 세계 곡물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자국의 식량 안보를 우선한 결정이었다. 122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인도의 밀 생산량이 올해 최대 절반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대체 인도가 올해 얼마나 더웠는지를 찾아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수도 뉴델리의 5월 기온은 연일 섭씨 49도를 기록했다. 지속되는 폭염에 새까지 탈수 증상과 체력 고갈로 연이어 떨어질 정도였다. 올해 세계 각국이 내린 식량 수출 제한 조치는 57건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45건(78.9%)의 제한 조치가 집중됐다. 각국의 수출 제한으로 영향을 받는 곡물은 칼로리 기준으로 세계 전체 수출량의 16.9%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 당장 식량 안보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농지 줄며 식량자급률 추락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곡물 시장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농지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매년 여의도 면적 52배에 달하는 농지가 전용될 정도로 식량 생산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적정한 식량 생산에 필요한 농업진흥지역 우량농지만큼은 확실히 지키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70년 229만ha였던 농지는 2020년 156만ha로 줄었다. 50년간 30% 이상의 농지가 사라진 것이다. 이러니 1970년대 86.2%였던 식량자급률은 45.8%로 40.4%P나 하락했다. 쌀을 제외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20년 기준 밀 자급률은 0.8%, 옥수수 3.6%, 콩 30.4%에 불과하다. 곡물자급률은 2020년 기준 20.2%에 그쳤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곡물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농지 위에는 아파트, 도로, 산업단지 등이 들어섰다. 부산에서도 명지 개발로 ‘명지대파’가 사라졌고, 대저 신도시 개발로 ‘대저 짭짤이 토마토’가 그 뒤를 이을 전망이다. 더 이상의 농지 훼손을 막지 않으면 식량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온 지 오래다. 하지만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때마다 ‘농지법 위반’은 여전히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지난해 LH 사태 때를 돌이켜 봐도 그랬다. 농지는 투기 세력의 먹잇감이었다. 2010년 이후 시도별 농지전용 현황을 보면 경기도가 전체 농지전용 면적 가운데 24.1%(2만 6361ha)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 강대국은 식량위기 맞서 백년대계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OECD 국가 중에서 식량 대란이 벌어지면 가장 심하게 당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사실 한국의 식량 해외 의존도는 너무 높다. 식량을 가진 나라가 자기들 먹을 것도 없다고 안 팔면 못 사는 것은 간단한 이치다. 최 교수는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식량위기 대한민국〉을 출간한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식량 위기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곡물자급률이 20% 미만인 한국이 10년 안에 겪게 될 문제다"라고 구체적으로 전망한다. 사실 가뭄, 산불, 전쟁 등 글로벌 위기가 겹쳐서 발생한다면 식량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백년대계를 세워 놓고 있다. 미국은 항공우주국(NASA)이 농업 관련 인공위성을 활용해 세계 주요 작물의 재배 면적을 추정해 생산 현황을 분석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을 통해 경쟁력이 생긴 중국의 밀 수입 의존도는 2.9%에 불과하다. 우리처럼 해외 식량의존도가 큰 일본도 2014년 호주와 경제파트너십 협정(EPA)을 맺을 때 향후 곡물 수출 금지 시 일본을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이미 취했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무려 170개국에서 식품을 수입한다. 전략적인 수입선 다변화의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식량 안보라는 의제 자체가 아직 낯설다.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려야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쌀이 과잉이고 콩, 밀, 보리, 옥수수 등 다른 작물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남 소장은 "더 늦기 전에 식량 안보를 국가적 어젠다로 격상시키고 글로벌 곡물 공급망을 다변화해 식량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간곡하게 이야기한다. 올해 우크라이나의 밀 파종량이 줄었으니 밀가루 가격 폭등은 최소한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다. 2005년 중동 각국의 혁명으로 번진 ‘아랍의 봄’은 세계 식량 가격 상승이 촉매제였다. 식량 안보를 무시하면 난리가 난다.
2022-07-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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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세상에 안 예쁜 얼굴은 없어요
제주도에 가고 싶어졌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끝났지만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관심 있게 지켜보고, 외로운 노인들을 부모처럼 돌보는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이런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혼자라도 살만하겠다 싶었다. 다운증후군인 쌍둥이 동생 영희가 오래 그려 온 그림들을 보고 영옥이 오열하는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실제로 다운증후군인 정은혜 씨가 영희 역으로 나왔다는 소식은 놀라움과 함께 감동을 줬다. 자신의 드라마마다 장애인을 주요 배역으로 써 온 노희경 작가는 언젠가 “세상을 조금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을 했다. 세상을 바꾸는 글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뜻이 담긴 ‘바보’나 ‘병신’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던 과거를 반성한다.
다운증후군 작가 정은혜 씨
2000명 이상 캐리커쳐 그림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가능
장애 불편에 집에만 있으면
건강·교육·노동권 등 악순환
장애인 이동권 문제 해결을
지난 일요일에는 영화의전당 소극장에 다큐 영화 ‘니얼굴’의 GV를 보기 위해 갔는데 하마터면 못 볼뻔했다. 독립 다큐 영화의 매진은 영화의전당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은혜 씨가 다큐 주인공이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 초반부에 은혜 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에만 있는 우울한 모습으로 나왔다. 이날 함께한 어머니 장차현실 씨는 “은혜 핸드폰으로는 전화가 오지 않고 걸 곳도 없어 전화요금이 몇 달간 0원이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혼자서 울고, 웃고, 싸우는 모습이 보기에 딱했다. 그림에 재능을 발견해 캐리커처 작가가 되었지만, 그 재능은 결국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꽃을 피울 수가 있었다. 주말마다 플리마켓에 나가 모두 2000명 이상을 그렸다니 그동안 만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세상 속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렸기에 기적처럼 오늘의 은혜 씨가 있게 된 것이었다.
2020년 기준 등록장애인은 263만 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1%나 된다. 하지만 거리에서 혹은 대중교통에서 은혜 씨 같은 장애인을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어디서 뭘 하고 있기에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장애로 인한 불편 때문에 잘 돌아다니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크다.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도 외출하지 않는 장애인 비율이 8.8%나 되었다. 장애인 5명 중 1명은 거의 집에만 머무르는 실정이다. 운동이나 외출은 고사하고 병원에 한 번 가기도 힘드니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나쁨’이라고 답한 비율이 절반이나 됐다. 장애인의 자유로운 이동은 교육·노동권과도 맞닿아 있다.
몇 달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서울 지하철 시위로 장애인 이동권은 뜨거운 논란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이 관심 가지고 보지 않고 듣지 않았을 뿐이지 전혀 새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은 무려 21년째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확보 및 관련 예산 확대를 요구하며 최근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재개했던 전장연에 대해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경찰이 이들에게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라고 말했다니, 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이고 또 어느 나라 경찰인지 묻고 싶다.
나이가 들며 점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흐릿해짐을 느낀다. 기자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국가가 아직 장애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보호자가 없으면 혼자서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는 장애인이나 마찬가지다. 65세 이상 장애인 비율은 49.9%에 달한다. 노화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으로 되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80%는 질환이나 사고로 인한 ‘중도 장애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올해 유독 발달장애인 가족들의 극단적 선택이 많았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발달장애인 지역사회 24시간 지원체계를 구축해달라’며 지난달 전국에 분향소를 설치한 이후에도 비극이 그치지 않고 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엄마와 가족의 인생까지도 모두 바뀌고 만다. 부모가 장애인 자식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너무 무거운 부담감을 이제는 사회가 조금씩 나누어야 한다. 비극을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이다. 정치도 갈라치기를 할 게 아니라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편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손님들이 “예쁘게 그려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은혜 씨는 늘 “세상에 안 예쁜 얼굴은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평소 그렇게 예쁜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은혜 씨의 말을 믿고 노력은 해 볼 생각이다.
2022-06-2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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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누구를 위한 지방선거인가
오월도 중순이 지나며 초여름의 햇살이 제법 따갑다. 19일부터 6·1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으니 비로소 후끈한 선거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겠다. 그동안 선거 분위기가 너무 뜨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2017년 대통령 탄핵과 뒤이은 궐위선거로 선거 일정이 꼬인 탓이다. 대통령선거를 치른 지 석 달도 안 돼 지방선거를 맞이하니 올림픽 직후의 전국체전처럼 시시하게 느껴지기 쉽다. 게다가 이재명,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김동연이라는 대선 주자들이 이번 지방선거 혹은 동시에 열리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모두 뛰어들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연일 시장통에 지방행으로 동분서주하니 대선 2라운드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다. 한때는 좋아했던 대선 주자급 정치인들이 지방선거의 가치를 오염시키는 현실이 유감스럽다.
대선 2라운드 분위기 휩쓸려
지방선거 가치 오염돼 유감
부울경 특별연합은 선도 모델
당리당략으로 제동 걸면 안 돼
지역일꾼 제대로 가릴 시간
지방소멸 막을 기회 잡아야
이번 선거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 경기도다. 지난 대선에 나섰던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가 되어 각축을 벌이는 모습은 여러모로 주목의 대상이다. 문제는 대통령 후보와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국가균형발전 공약을 발표했다. 부울경 등 전국 다섯 지역에 서울 수준의 메가시티를 구축하고, 충남권 이남으로 이전하는 기업에 법인세를 추가 감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경기지사 후보가 되더니 규제로 성장이 제한된 경기 동북부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한 공약을 내놨다. 경기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경기북부 특별자치도 설치도 약속했다. 몇 달 만에 수도권 규제 강화에서 사실상 수도권 규제 완화로 백팔십도 바뀐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선과 이번 지선·보선에 연이어 나선 누구도 이 같은 딜레마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수도권 초집중과 지방소멸에 대한 공약 제시가 미흡하다고 지적받았다. 새 정부가 산업은행 부산 이전까지 국정과제에 포함시켜 추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공화국이라는 철옹성이 호락호락하게 금은보화를 내어줄 리 만무하다. 산업은행 노조를 포함한 임직원, 서울 소재 언론사, 서울시장 후보들까지 나서서 반대 목소리를 키우고 있으니 한 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이들의 논리는 모든 게 다 서울에 있으니 나눠먹기식 지방 이전은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서울에 있어서 지역균형발전을 하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오래전 자신들이 먼저 요구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0년 부산시장에 출마했던 민주당 김민석 의원이 산업은행 부산 이전 철회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당시 김 의원은 “부산을 바꿔 서울을 능가하는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라고 외쳤다. 부산은 안 바뀌었는데 사람이 바뀌었다. 부산을 떠나 분당에 출마하려다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난 박민식 전 의원에게서 철새의 말로를 본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도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을 지방선거 결과를 통해 더 확실히 추진해야 한다”는 애매한 조건부 발언을 삼가야 한다.
어느 곳에 살거나 공정한 기회를 누리는 지방시대! 김병준 전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위 위원장이 주창한 새 정부의 모토다. 서울공화국의 식민지로 수탈당하다 빈사지경에 이른 부울경은 메가시티라는 전기를 마련했다. 부울경 특별연합은 전국 최초의 특별지방자치단체이자 지역균형발전의 선도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특별연합이 출범하자마자 지방선거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국민의힘 울산 시장 김두겸 후보, 경남지사 박완수 후보가 “부산에 흡수될 우려가 높다, 서부 경남이 소외되었다”는 이유로 원점 재검토까지 거론되어서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부울경 특별연합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겼다. 모든 지표는 물론이고 전문가들까지 지방은 이대로는 소멸하고 부울경처럼 뭉쳐야 산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지방선거가 되레 지방을 죽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30 부산월드엑스포 전에 가덕신공항을 완공하면 되지, 공사를 어떤 공법으로 할 것인가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선거로 공사 공법을 정하는 경우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나. 부산시장 후보들은 ‘올림픽 유치’나 ‘아시아 10대 행복도시’ 같은 장밋빛 목표 말고 피부에 와닿는 정책으로 대결을 펼치면 좋겠다. ‘아동·청소년 부모 빚 대물림 방지 지원 조례’는 부산 중구의회에서 처음으로 제정되어 전국 70여 개 지자체가 벤치마킹했다. 청소년들이 부모 빚을 대물림받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역 일꾼이 필요하다. 누구를 위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는지 생각할 시간이다.
2022-05-1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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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지역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한국 드라마 일색인 일본의 넷플릭스 인기 순위에서 ‘신문기자’는 올해 가장 뜨거운 화제작이다. 같은 감독이 3년 전에 만든 동명의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하고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요즘 한국 영화나 드라마 가운데 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온 경우가 거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한국 영화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폭로도 동영상을 인터넷에 뿌리는 식으로 연출된다. 기자가 등장한다면 권력과 결탁해 부패한 ‘기레기’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영화는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서울, 지방을 식민지로 여겨
산업은행 이전도 반대 목소리
지역 여론이 이끈 가덕신공항
국가균형발전 위한 초석 놓아
7일 제66회 ‘신문의 날’ 맞아
지역신문 역할 되새기는 계기로
내일이 제66회 ‘신문의 날’이다. 1896년 4월 7일에 발간된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기념해 1957년에 제정했다. 전국의 모든 신문이 이날 휴간을 하고 오붓하게 벚꽃놀이를 즐기던 호시절도 있었다. 신문이 사양 산업이 되었다는 냉혹한 현실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느낀다. 종이라고는 죄다 택배 포장 박스뿐. 신문은 폐지조차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오랜 전통의 신문사들이 속셈이 뻔한 건설업체 등에 넘어가는 모습은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아직도 신문사를 사겠다는 자본이 있으니 다행이라는 냉소적인 시선도 있다. 언론계는 기자들의 이직과 전직이 이어지며 뒤숭숭한 분위기다. 한 기자 후배는 고등학생인 아들이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알아듣게 잘 타일렀다고 ‘웃픈’ 이야기를 전했다.
종이 신문은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다. 어쩌면 슬퍼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종이 신문이 사라진다고 세상에서 뉴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언론이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사실 그렇게 여럿일 필요가 없다. 특히나 아까운 나무를 베서 만드는 신문의 경우는 더 그렇다. 용산으로 이전 추진 중인 대통령 집무실 문제도 그랬다. 찬반 논란이 극심했지만 이참에 대통령 집무실을 세종으로 옮겨 실질적인 행정수도를 완성시키자는 상식적인 주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정부 세종신청사는 오는 8월이면 완공된다. 국회 세종의사당도 2027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의회·행정 기능 분산으로 인한 행정·사회적 비효율이 2016년 기준으로 연간 2조 8000억~4조 8800억 원에 이른다. 윤 당선인도 대선 직전 “세종시를 실질 수도, 진짜 수도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대통령 집무실을 세종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조선·중앙·동아·한겨레·경향을 비롯해 한국일보·서울신문 등 주요 신문의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된다. 이들의 본사와 근거지는 한결같이 수도 서울이다. 세종과 충청 지역 일부 신문에서 세종 이전을 주장해도 영향력이 너무 미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 대해 반발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한 칼럼에서 “기업·금융사·금융당국·국회가 다 서울에 있다. 나눠 먹기식 지방 이전은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라고 반대 목소리를 대변했다. 모든 게 서울에 있어서, 지역균형발전을 하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어서 이러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이제야 본격 추진되는 가덕신공항에 대해서도 서울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던가. 고추나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된다면서 비아냥댔다. 조선일보는 힘들게 뚫은 부산~헬싱키 노선 개설에 대해서도 “핀란드 항공사에 유럽 승객 다 뺏긴다”고 기업의 편을 들었다. 서울 본사 언론사는 그동안 지방을 사실상 서울의 식민지로 대했다.
〈부산일보〉는 부산시민들과 함께 가덕신공항을 지켜 냈다고 자부한다. 날이면 날마다 공항 관련 기사·사설·칼럼을 쏟아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가 아니면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곳이 거의 없어서 그랬다. 강고한 기득권 서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덕신공항을 성취한 결과가 2030 부산월드엑스포·LCC부산 본사 추진, 나아가 지역균형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일보〉는 때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지역 신문사의 역할을 새롭게 익혀 가고 있다. 〈부산일보〉 역시 위기 속에 있고 독자들 눈에 차지 않는 부분 또한 많을 것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떠올린다. 지역언론이 살아야 지방이 살고,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끝으로 점차 잊혀 가는 신문의 날을 맞아 영화 ‘신문기자’의 실제 주인공인 도쿄신문의 기자 모치즈키 이소코가 항상 마음속에 소중히 새기고 있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전한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으로 인해 자신이 바뀌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문기자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자문한다.
2022-04-05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