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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사라진 추억의 장소, ‘레코드 부산’에선 살아날지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 추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특별한 추억이 담긴 장소가 사라지면, 애틋함은 배가되죠.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 사라진 장소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집니다. 영원할 것 같던 기억들도 점점 흐릿해집니다.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지만, 추억은 붙들 수 있지 않을까요.
25일 〈부산일보〉는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한데 모은 지도 페이지 ‘레코드 부산(record.busan.com)’을 오픈합니다. PC뿐 아니라, 모바일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추억이 살아 있는 지도, 레코드 부산에서 여러분의 추억을 공유해 보세요.
■ 우리들의 블루스
“1973년도 23세 때 광복동 무아 음악실에서 우리 영감 처음 만나 인연이 되어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지금까지 음악을 사랑하며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요.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 고마운 음악실입니다.(hsuk****)”
3월 시작된 〈부산일보〉 디지털 기획 시리즈 ‘레코드 부산’ 기사에는 독자들의 추억 댓글이 달렸습니다. 추억의 식당 ‘호수그릴’ 편에는 “며칠 전 92세로 돌아가신 울 아부지가 여대생이 된 나에게 양식 먹는 법 가르쳐주신 곳(bene****)”이란 사연이올라왔습니다.
추억의 장소에 담긴 독자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이제는 레코드 부산 홈페이지에서 공유할 수 있습니다. 기뻤던 순간도, 슬펐던 일도, 소소했던 일상도 돌이켜 보면 모두 추억이죠. 여러분의 추억이 담긴 장소는 어디인가요?
■ 추억이 살아 있을지도
홈페이지에 접속해 ‘추억 여행 떠나기’를 누르면 추억 여행이 시작됩니다. 부산 추억의 장소를 배경으로 한 영상이 끝나면, 이 홈페이지의 주인공인 ‘살아있는 지도’가 펼쳐집니다. 이제는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산의 사라진 장소들이 살아 있는 지도입니다. 미화당백화점, 동래동물원, 호수그릴, 마리포사 등 부산 시민의 추억이 담긴 장소 70여 곳이 표시돼 있습니다.
부산닷컴에 간편 로그인만 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댓글은 글뿐만 아니라 사진으로도 올릴 수 있습니다. 지도에 독자들이 소장한 사진을 더한다면, 독자들의 추억 지도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지도 위에 내 추억의 장소가 없다면, ‘추억 더하기’ 게시판을 통해 추천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공감과 추천을 받은 장소는 자문을 거쳐 순차적으로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레코드 부산 자문위원으로는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동길산 시인, 이동현 부산연구원 부산학센터장,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 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 24일까지 다양한 오픈 이벤트도 마련돼 있습니다. 특별한 사연을 담은 댓글이나, 귀중한 사진 자료 등을 제공한 독자를 선정해 시상품을 지급합니다.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을 독자 여러분의 추억으로 가득 채워 주길 바랍니다.독자 여러분이 들려줄 소중한 추억 이야기를 기다리겠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2-10-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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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부산 학원계의 전설, 부산학원 '1타강사'들의 근황은?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요즘은 ‘학원가’ 하면 흔히 서울 강남구 대치동을 떠올리죠.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부산 역시 서울 못지않게 학원가가 성행한 곳이었는데요.
그중에서도 부산진구 범천동에 있었던 ‘부산학원’은 부산의 대표적인 대형 학원이었습니다. 부산학원은 서울대 130여 명 합격, 상위권 대학 1000여 명 합격 등의 무수한 합격 신화를 써 내려간 곳이기도 한데요. 수강생 수도 많게는 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부산에서 가장 많은 수강생을 거느린 학원이었습니다.
당시 부산학원은 화려한 강사진으로도 유명했는데요. 과목마다 '1타강사(학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들이 포진돼 있었습니다. 특히 국어 김광휘, 영어 옥진수, 수학 박영돈·김수석 등 유명 강사의 수업은 열렸다 하면, 금세 마감되기 일쑤였습니다.
레코드 부산 일곱 번째 주제는 '추억의 학원'인데요. 부산학원의 1타강사 출신이자 부산 학원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광휘·옥진수 씨를 만나 그 시절 부산의 학원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김 씨는 1974년 부산학원의 전신인 범일학원 때부터 이 학원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부산학원이 새 출발을 한 1977년부터 함께하다, 1982년엔 서울의 유명 학원으로 스카우트되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에 다시 부산학원으로 내려와 이후 단과반 부원장을 맡았습니다. 2000년에는 부산의 또 다른 인기 강사, 영어과목의 현광식 씨와 함께 '현광학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 서울 종로학원의 브랜드를 따와 부산 종로학원을 운영하기도 했죠. 이후 은퇴했지만, 제자들의 부탁으로 요즘에도 소소하게 강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옥 씨는 부산학원 초창기에 강사진으로 합류했습니다. 몇 년 뒤 서면 제일학원으로 옮겼다가, 전두환 정권의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 다시 부산학원에 복귀합니다. 4~5년 뒤에는 다시 나가 서면문리학원, 한샘학원 등을 거쳐 소수 정예 학원인 성문학원을 차리게 되죠. 현재도 성문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김 씨와 옥 씨는 현역 시절 '1타 강사'가 될 수 있었던 비법도 귀띔했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으로 확인해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10-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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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추억 속 양식당 '호수그릴'을 기억하시나요?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부산 서면에 30년 넘게 자리를 지켰던 양식 레스토랑, '호수그릴'을 아시나요?
부산 중구 남포동의 '청탑그릴'과 함께 부산의 대표 양식당으로 손꼽히던 곳인데요. 양식 레스토랑이 익숙하지 않던 1972년 문을 열어서 2007년까지, 35년간 운영된 곳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곳에는 손님들의 추억도 켜켜이 쌓여있는데요. 가족 외식부터 맞선, 돌잔치, 회갑연 등 많은 손님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찾은 곳이기도 합니다.
레코드 부산 여섯 번째 이야기는 추억의 식당 '호수그릴'입니다. 호수그릴의 부사장을 맡았던 최승규 씨를 통해 호수그릴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요.
호수그릴은 미군 하야리아 부대 장교클럽 셰프였던 최기수 씨가 문을 연 식당입니다.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서면로터리 인근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진경찰서와 부산진구청이 근처에 있어 직장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습니다. 그 이후로 두 번 자리를 옮겨 영광도서 근처에 자리 잡고, 문을 닫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호수그릴은 1997년까지는 아주 전성기였습니다. 특히 졸업식이 몰린 시즌이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은 1~2층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고, 대기 손님까지 줄을 이었다죠.
그런 호수그릴에도 IMF라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서면점뿐 아니라 송정해수욕장 앞에 문을 연 분점 '호수 바이칼'도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큰 풍파를 견뎌냈지만, 2000년대 초 아웃백, 빕스, 베니건스, TGI 프라이데이 등과 같은 외국계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거센 물결에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의 오랜 향토 음식점, 호수그릴은 35년의 역사를 끝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됐는데요. 이제는 추억 속 식당이 되어버린 호수그릴의 이야기,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10-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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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오피스텔이 될 보수동 책방골목 현우서점, 마지막 인사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최근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보셨나요? 헌책 특유의 쿰쿰하고 정겨운 냄새야 여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듭니다. 오랜 세월 터줏대감처럼 이곳을 지켜오던 책방 입구에 공사장 펜스가 쳐져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죠.
보수동 책방골목은 2000년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인데요. 특히 새 학기만 되면 참고서나 문제집 등을 사러 오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북적이던 곳이었습니다.
레코드 부산 다섯 번째 이야기는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37년간 '현우서점'을 운영했던 김인조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현우서점의 역사가 시작된 건 1984년 1월. 직장생활에 싫증을 느끼던 김 씨에게 지인이 책방을 추천해왔습니다. '유망 직업'이라는 말과 함께요. 큰길 쪽에 빈 점포를 이어받아 서점 문을 열었고, 아동도서와 참고서 등을 주로 다뤘습니다. 몇 년 뒤에는 책방골목 메인 거리의 한 모퉁이로 옮겨 장사를 이어갔습니다. 2020년까지 책장사를 했으니, 햇수로 37년간 장사를 한 셈이죠.
워낙 오래 장사를 하다 보니, 학생 때 드나들던 단골 손님이 성인이 되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아내, 아이와 함께 와서 반가운 인사를 건넬 때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죠.
지인의 추천대로 2000년대까지는 호황이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는 책방골목 전성기였죠. 새 학기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끼니 거르기가 일쑤였습니다. 현우서점뿐 아니라 그 시절 책방골목에는 새 학기만 되면 손이 모자라, 식구들을 총동원해 손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0년 중반부터 변화를 체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책방골목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죠. "옛날에는 '동아 원색 세계대백과사전' 같은 건 선금을 주고서라도 구해달라고 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백과사전 찾아보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터넷 찾으면 다 나오는데."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중고 책 거래를 할 수 있게 되면서 골목의 침체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설상가상, 현우서점이 있던 건물이 통째로 매각되면서 김 씨는 장사를 접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곳에 있던 8곳의 서점도 한꺼번에 문을 닫았죠.
김 씨는 장사를 접은 후에도 시간이 날 때면 한 번씩 책방골목에 와보곤 하는데요. 손님이 없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심정을 알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합니다. 김 씨는 그럼에도 이곳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주변 사장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요. 현우서점의 마지막 인사,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09-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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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그 시절 영화관엔 다 그림 간판이 걸려있었지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극장마다 영화 그림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 기억하시나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가에서는 그림 간판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극장에는 간판을 그리는 '간판장이'들도 있었죠.
그림 간판 자리를 컴퓨터 그래픽이 대체하면서, 영화 그림 간판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부산에서는 부산극장이 2003년까지 그림 간판을 내걸었지만, 결국 컴퓨터 그래픽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레코드 부산 네 번째는 부산의 마지막 간판장이 권오경 씨와 함께하는 추억의 극장 이야기입니다.
1978년 처음 간판 붓을 잡은 그는 남포동 극장가의 그림 간판을 보면서 운명 같은 끌림을 느꼈는데요. 그림을 배우고 싶은 생각에 무작정 왕자극장을 찾아가면서, 극장과 첫 인연을 맺게 됩니다. 실력을 쌓은 그는 제일극장, 삼성극장 등 부산의 여러 극장을 거쳐서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극장에 들어갑니다. 처음엔 차석으로 들어갔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엔 미술부장 자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영화 홍보 수단이라고는 포스터와 극장 간판, 신문 광고가 전부이던 시절. 간판은 극장 앞에 선 손님들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요. 이 때문에 극장주들은 더 눈에 띄는 간판을 원했다고 합니다. 극장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터미네이터 눈에 불을 넣거나, 간판을 움직이게 하는 각종 화려한 수법이 등장하기도 했다네요.
그림 간판의 시대는 2000년 초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점차 막을 내리기 시작하는데요. 상영관이 하나밖에 없던 단관 극장에서는 그림 간판이 가능했지만, 상영관이 늘어나면서 그림으로 다 그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게다가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하면서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가 없게 됐죠. 권 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2003년을 끝으로 붓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는 지금이라도 영화 간판 의뢰가 온다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요. 20년 넘도록 수천 개 넘는 간판을 그려온 터라 '몸에 뱄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그 시절의 극장 이야기.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09-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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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음악 순례자'들의 성지, 추억의 음악 감상실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개인 오디오가 귀하던 시절, 음악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음악 감상실'로 모였습니다.
음악 감상실은 차도 마시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음악 다방과는 달리, 정말 음악을 듣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극장처럼 의자도 모두 앞을 향해 있고, 조명도 어두운 느낌이었죠. 팝 음악을 주로 다루는 '무아'나 '랩소디' '르네상스' '예그린'과 같은 음악 감상실도 있었고, 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감상실도 있었습니다.
레코드 부산 세 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무아 음악 감상실 출신의 최인락 디제이, 예그린 음악 감상실 출신의 김현민 디제이를 만나 추억의 음악 감상실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1971년 부산 중구 광복동에 문을 연 무아 음악 감상실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는데요. 당시 2만 3000장이 넘는 음반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고가의 오디오, 수준급 디제이들의 음악 선곡으로 '음악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1993년 부산진구 서면에 문을 연 예그린 음악 감상실은 후발 주자에 속했는데요.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뮤직비디오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트렌드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LP보다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시간에 손님들이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친구, 연인이 만나서 갈 곳이 많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의 청춘들은 대부분 음악 다방이나 음악 감상실을 찾곤 했는데요. 리퀘스트 용지에 꾹꾹 눌러 쓴 신청곡이 나올 때면, 괜히 더 특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죠. 비가 오는 날이면, 음악 감상실 앞에 긴 줄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무아에는 1층부터 4층까지 줄이 이어졌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복도에까지 보조 의자를 깔아야 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큰 인기를 끌던 음악 감상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씩 사라집니다.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개인 오디오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모여서 음악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됐죠. 음악 감상실에 대한 수요가 점점 줄어들면서, 결국 무아와 예그린도 경영난으로 인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현민 디제이는 "예그린이 문을 닫기 전 단골손님들에게 '언젠가는 예그린 음악 감상실을 다시 열겠다'고 약속했는데, 20년이 넘도록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아쉬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음악 감상실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라디오 등을 통해 디제이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두 사람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는데요. 부산 음악 감상실의 상징과도 같은 무아 음악 감상실을 복원하는 꿈입니다. 최인락 디제이는 "처음엔 디제이로 평생을 살아온 우리 두 사람이 위안을 받기 위해 행사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동참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우리 다음 세대에도 이 문화를 계속 향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음악 감상실의 추억, 영상을 통해 만나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09-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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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부산대 앞에 최초의 프랜차이즈 카페 '가비방'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부산의 대학가에 있던 커피숍 가비방을 기억하시나요?
가비방은 1983년 부산대 앞 1호점을 시작으로, 부산·경남 일원에 47호점까지 갖췄던 커피전문점입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원조 격인 곳이죠.
상호명 가비방의 뜻은 '옳게 끓인 향기를 서비스한다'라는 뜻. 다방 문화가 익숙하던 시절, 가비방의 핸드드립 커피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하는데요.
여기 1989년 가비방 공채 1기생으로 입사해, 33년째 바리스타 외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레코드 부산 두 번째 주인공은 부산과학기술대학교 바리스타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영승 씨입니다.
가비방의 모토는 '커피 문화 사업의 선구자'였습니다. 그 모토에 걸맞게 그는 끊임없이 '개척자'의 길을 걸어왔는데요.
요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잔 시키면 1잔 공짜'와 같은 커피 쿠폰을 처음 만들었고, 생과일 주스계의 혁신 '딸기바나나(딸바)' 메뉴를 만들었다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도 전해줬습니다. 또 달콤한 향이 나는 '헤이즐넛' 커피를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다고 하네요.
47호점까지 매장을 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가비방. 하지만 1999년 스타벅스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에스프레소 커피의 시대가 오게 되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비방도 점점 쇠퇴하게 됩니다. 가비방은 2010년 해운대점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됩니다.
그렇게 끊길 줄만 알았던 가비방의 역사가 다시 이어집니다. 박 교수가 상호를 이어받아 부산대 앞에 다시 '가비방'이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연 건데요.
그는 대한민국 최초 커피 프랜차이즈인 가비방의 상호가 이대로 없어지면, 대한민국 커피 전문점의 40년이라는 역사가 없어진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문을 열게 됐다고 합니다. 가비방을 재오픈한 뒤로 50대 이후 분들이 "그때 그 가비방이 맞느냐"고 물어보면서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하네요.
박 교수는 "유럽의 일리커피나 라바짜 커피처럼 부산을 대표하는 커피로 100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가비방이라는 상호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전해왔는데요.
역사 속에 묻힐뻔한 가비방,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09-0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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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짧지만 강렬한, 부산 놀이공원 '미월드'의 추억
*지금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다시 기록하는 ‘레코드 부산’. 그때 그 사람을 만나, 추억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부산의 마지막 놀이공원 '미월드'를 기억하시나요? 미월드 이후에도 '광안비치랜드'가 운영되긴 했지만, 사실상 놀이공원이라 보긴 어려웠죠.
2004년 4월 부산 수영구 민락동에 문을 연 미월드는 9년간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2013년 6월 문을 닫았습니다.
광안리 인근에 있던 미월드는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입장료가 없는 놀이공원이라 정확한 입장객 수를 셀 수는 없었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하루 약 1만 명 정도가 찾는 곳이었습니다. 부산 도심에 있어 규모는 작았어도, 언제든 가볍게 들를 수 있는 놀이공원이었죠. 미월드는 '자유이용권 국내 최저 가격'이란 점을 앞세워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미월드는 2013년, 9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를 뒤로한 채 결국 문을 닫았는데요. 2000년 후반부터 미월드 주변의 아파트에서 '소음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영업금지 가처분 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월드 측이 탑승객에게 마스크를 쓰게 하는 등 궁여지책을 마련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소송에서 패소한 미월드는 결국 운영에 타격을 받게 되는데요. 미월드 코 앞에 또 다른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미월드는 더 이상 놀이공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미월드 전 운영본부장 김태훈 씨는 담담하게 미월드 이야기를 이어갔는데요. 힘든 시간을 함께 해준 동료들과 미월드를 찾아준 시민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영상으로 함께하시죠.
*'레코드 부산'은 <부산일보>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출연=남형욱·서유리 기자
그래픽=이지민 에디터
2022-09-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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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⑩ 주말이면 부산역·조방 앞이 예식장 하객으로 붐볐지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요즘은 결혼식장에 온통 '웨딩홀'이란 이름이 붙지만, 2000년 이전만 해도 모두 '예식장'이었죠.
과거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있었던 부산역과 범일동 중심으로 예식장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또 미남로터리, 연산로터리, 양정로터리, 동래로터리 등 로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기도 했죠. 주말이나 '길일'에는 예식장 밀집 지역이 하객으로 붐볐다고 하죠.
부산에는 새마당예식장, 축복예식장, 행복예식장, 올림픽예식장, 금강예식장, 고려예식장, 새부산예식장, 백조예식장, 영남예식장, 경보예식장 등 수많은 예식장이 있었는데요. 혼인건수가 줄어들고, 결혼식 트렌드가 바뀌면서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곳들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 악재까지 덮치면서 40년 동안 결혼식장 자리를 지켜온 '새마당 예식장'도 끝내 문을 닫게 됐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예식장,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스타일 웨딩홀(구. 새마당 예식장)
2015년 6월에 부산역 앞 스타일웨딩홀에서 결혼했어요. 부모님께서 하객들 오기 편한 곳에서 하길 원하셔서 이곳으로 선택했어요. 친정 언니도 여기서 했고요. 당시 메르스 때문에 걱정했던 기억도 나네요. 업체 측 실수로 결혼식 영상이 녹화가 안 돼서 그때는 엄청 속상하고 화도 났는데, 정중하게 사과 해주시고 환불 처리도 해주셔서 마음이 좀 누그러지긴 했어요. 새마당 예식장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와서 우리 아이도 거기서 결혼했으면 했는데, 없어졌단 소식 듣고는 많이 아쉬웠네요./ 부산 서구 37세 박희진
#경보예식장
저희 부모님은 1991년 4월 7일 북구 구포동에 있는 경보예식장에서 결혼하셨어요. 중매로 만나 보름 만에 결혼하기로 하셨대요. 결혼식 올릴 돈이 없었는데 아빠 동네 모임 분들이 10만 원씩 모아서 200만 원으로 식 올리셨대요. 예식에 손님들이 엄청 많이 왔었다네요. 결혼하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두 분 아직도 알콩달콩 잘 사시는 모습 보면 너무 행복해요!/ 부산 강서구 30세 홍*진
#남태평양호텔 웨딩홀
저희 부모님은 1997년에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남태평양호텔에서 결혼하셨대요. 어머니가 술을 못하시는데 결혼식 정신없이 치르시고 피로연에서 술을 딱 한 잔 마셨는데 너무 취하셔서 그날 신혼여행도 못가셨대요. 그 이후로 저랑 동생 낳으시고 지금까지 사이좋게 잘 지내십니다./ 경남 김해시 24세 이*민
■ 예식장이 웨딩홀이 되기까지
부산 최초의 예식장은 1950년대 말 중구 대청동에 생긴 '대청장 예식장'이었습니다.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이용하던 곳으로, 신부들은 개조한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고 합니다. 대청장 예식장이 생기기 이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로 교회나 절을 이용하거나 '백화당' '미화당' 등 댄스홀을 빌려서 예식을 올렸다고 하네요.
1960년대에는 중구 광복동을 중심으로 예식장 거리가 생겼습니다. 신신예식장, 청탑예식장, 미화예식장, 서울예식장 등이 이곳에 들어섰죠. 광복동 예식장들은 1970년대 범일동 '옛 조방' 앞에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점점 명맥을 잃어갑니다.
이 시기 시외·고속버스터미널을 모두 갖춘 범일동, 부산역이 있는 초량동 인근에 예식장이 생겨납니다. 금탑예식장, 영남예식장, 동화예식장, 국도예식장, 행운예식장이 생겨났죠.
옛 조방 앞은 80년~90년대까지도 예식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행복 예식장, 축복 예식장이 큰 인기를 끌었죠. 한국웨딩패션협동조합 유동학 이사는 "옛 조방 앞에 있던 행복예식장, 축복예식장은 예식을 30~40분 간격으로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그 예식장에 뷔페가 없어서 식권을 나눠주면 주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엔 갈비탕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예전엔 '결혼식 피로연' 하면 갈비탕이었죠.
게다가 범일동에는 한복과 예물, 혼수품을 파는 부산진시장도 있고, 조금 더 가면 귀금속 상가도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경남 마산, 창원, 진주 등지에서 온 신랑 신부 부모들이 시외버스 타고 와서 결혼식장 둘러보고, 예물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원스톱' 시스템이었다고 하네요.
1980년대 들어서는 지역별로 예식장이 분산됩니다. 부산역 옆에는 '새마당 예식장', 동래역 근처에는 '청기와 예식장', 연산교차로에는 '목화예식장' 등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호텔 결혼식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호텔 결혼식이 국민 위화감을 조성하고, 도심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것이었죠. 부산시도 이 시기에 호텔 업주들에게 예식업을 자진 폐업하라고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호텔 업주들은 "부당한 간섭"이라면서 맞서기도 했죠. 1994년 8월부터는 특2급 이하 관광호텔에서는 결혼 예식업이 허용됐습니다. 1999년 초부터는 특1급 호텔의 예식장 영업도 허용됐죠.
요즘도 예식장을 이용하면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1980년대에도 그랬습니다. <부산일보> 1986년 4월 23일 자에는 이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소비자는 결혼식을 올릴 장소만 이용하려고 예식장을 찾지만, 대부분의 예식장이 예식실 임대의 조건으로 신부 드레스와 미용, 사진 등을 이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빌린 드레스가 깨끗하지 않거나, 결혼식 사진이 잘못 나와서 소비자보호단체에 고발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네요.
결혼식 자체가 경사지만, '이왕이면 좋은 날'을 따지는 경우도 많죠. 흔히 '길일'이라 불리는 날엔 결혼식이 몰리고, 예식장이 밀집된 지역에는 하객과 차량이 뒤섞여 심한 교통난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 1991년 10월 28일 자에 따르면, 전날인 27일은 오복이 겹친다는 '오합길일'이어서 평소보다 2~3배 많은 예식이 치러지기도 했다네요.
반면, '윤달'에는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죠. 여름철도 결혼 비수기죠. <부산일보> 1998년 6월 25일 자에는 예식장업계가 3중 악재로 허덕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예식장업계에서는 '성수기가 한 해 6개월 정도이나 윤달이 끼어 5개월 장사로 줄었다'는 한탄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결혼 트렌드가 바뀝니다. 변화의 중심에는 1997년 문을 연 '금강웨딩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교통의 요충지인 미남로타리 인근에 위치한 데다 유럽풍으로 지어져 당시 아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엔 주말마다 홀 4개 예약이 꽉 차서 '예약쟁탈전'이 벌어졌고, 예식이 있는 날에는 미남교차로 인근에 차가 많아서 유턴을 못 할 정도였다고도 하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식장'이란 이름 대신 '웨딩홀'이란 이름을 쓰는 곳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예스러운 느낌을 바꾸기 위해서 리모델링하는 업체들도 많아졌죠. 그리고 '뷔페'가 점점 중요해집니다. 그러면서 '웨딩홀 사업'은 결국 '뷔페 사업'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부산의 유명 뷔페 브랜드 '더파티'도 'W웨딩'을 함께 운영하고 있죠.
과거엔 양가 부모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이 진행됐다면 요즘엔 신랑 신부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죠. 주례 없는 결혼식, 신부 단독 입장, 신랑 신부가 직접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것도 요즘 트렌드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또 특히나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이 생겨나면서 웨딩홀별로 가격이나 조건이 한눈에 비교가 되면서 웨딩홀들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게 됐는데요. 2020년부터는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나 결혼 문화가 또 한 번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죠. 10년 뒤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 그때 그 사람
부산역 인근에는 40년 동안 자리를 지킨 예식장 업계의 '터줏대감'이 있었습니다. 1981년 도시철도 부산역 4번 출구 앞에 문을 연 '새마당 예식장'이죠. 새마당 예식장은 스타일 웨딩홀로,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로 이름이 바뀝니다. 취재진은 새마당 예식장의 후신, 스타일 웨딩홀의 이사였던 송병윤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송 씨는 새마당 예식장 상담 실장이었던 어머니를 도와 대학생 때부터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 새마당 예식장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부산역과 가깝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죠. 요즘은 예식 시간이 70분, 90분으로 길어지는 추세이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예식 시간이 40~50분 정도로 짧았는데요. 송 씨는 “홀이 5~6개 정도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토요일에는 하루에 40~50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풀타임으로 예식이 돌아갔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결혼식 문화가 급변합니다. 예식장에서 웨딩홀로 이름이 바뀌는 추세였죠. 이름뿐 아니라 트렌드에 따라가려면 뷔페도 운영해야 하고, 시설도 리모델링해야 했습니다. 당시 새마당 예식장의 임채수 대표는 상담실장인 송 씨의 어머니에게 예식장 운영을 맡깁니다.
새마당 예식장은 2000년 후반에 스타일 웨딩홀로 재탄생합니다. 새마당이란 이름은 1910~20년대에 부산역 일대가 매립되면서 이곳을 새마당이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하는데요. 정겨운 데다 이미 사람들에게 친숙하기도 해서 예식장 이름을 바꿀 당시에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점 세련된 결혼식장을 찾는 게 시대의 흐름이었기에 결국 스타일 웨딩홀로 이름을 바꿨죠. 그래도 한동안은 ‘구 새마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붙였다고 합니다. 토목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였던 송 씨는 웨딩홀 운영을 돕기 위해 2013년부터 웨딩홀 운영 전반을 도맡았죠.
2010년대 이후부터는 웨딩 트렌드가 더 빠르게 변했습니다. 2010년 중반에는 ‘하우스 웨딩’이 인기를 끌었죠. 대규모 하객을 받기보다는 소규모로, 더 고급스럽게 하는 결혼식 형태를 일컫습니다. 더 고급스러운 예식장을 만들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도 새롭게 바꾸고, 2017년엔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외관도 완전히 새롭게 바꿨죠.
“결혼식 트렌드는 서양 문화를 많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서울로 가장 먼저 유입이 되고, 다시 지역으로 내려오는 구조였죠. 벤치마킹하려고 서울도 자주 가고, 좋은 곳도 많이 갔는데 트렌드가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씨는 웨딩업에서 손을 떼고 다시 토목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블래어 하우스웨딩 자리에는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이 들어왔죠. 웨딩홀 운영은 좀 더 젊은 감각의 대표가 맡고, 송 씨의 어머니는 뷔페를 운영했습니다. 웨딩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운영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잘 버텨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이 넘도록 일상을 멈추게 한 코로나19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지난해 이곳마저 문을 닫으면서, 새마당 예식장의 4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까 어머니가 새마당에서 결혼하시고, 따님이 또 웨딩홀에 결혼하러 오신 케이스도 있었어요. 오래된 예식장이다 보니 건물이 낡기는 했지만, 이 자리를 지킴으로써 어떤 분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었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봤을 새마당 예식장. 터줏대감의 퇴장에서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끝-
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2022-05-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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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 ⑨ 맛은 잊었어도,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식당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외식이 일상이 된 시대. 요즘은 ‘집밥’마저 식당에서 사 먹곤 하죠. 하지만 국민 소득이 높지 않던 시절,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할 수 있는 행복한 사치이기도 했습니다. 외식이 흔치 않은 기회였던 만큼, 그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기도 하죠. 그 맛은 잊었어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식당에 대한 기억들은 남아있습니다.
부산에는 지금까지 잘 운영되는 '노포'도 많지만, 이제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식당도 셀 수 없이 많은데요.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식당,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호수그릴
초등학생 때 같은 반 단짝 친구가 '호수그릴' 사장 아들이라 가끔 갔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그릴'로 끝나는 레스토랑 몇 군데 있었지만 호수그릴이 단연코 최고의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죠. 평범한 식사 자리로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주로 어르신 회갑 잔치나 졸업식 때 한 번 가볼 정도였습니다. 유럽풍 샹들리에와 피아노 연주가 인상적이었고요. 웨이터들은 깔끔한 양복 차림의 멋진 아저씨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패밀리 레스토랑이 우리나라에 밀려오면서 이제는 추억의 식당이 됐지만 지금 그런 레스토랑이 다시 탄생해도 아주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산 부산진구 61세 문상구
#일 마레
서면 동보서적 위에 ‘일 마레’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있었죠. 당시 서면 소개팅 명소로 유명했어요. 저도 20대 후반에 여기서 두 번 정도 소개팅했는데 잘 안된 덕분(?)에 지금 아내 만났네요. 식당 들어가면 벽 기대앉는 자리엔 여성분들만 다 앉아 있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아는 선배도 여기서 소개팅했는데 자리를 헷갈려서 다른 분 앞에 앉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네요. / 부산 동래구 42세 김*준
#알렉산더
초등학생 때 달맞이 언덕에 있던 알렉산더 가끔 갔던 기억이 나네요. 축하할 일이 있는 특별한 날에 가는 곳이었어요. 음식보다는 공간이 특별했던 레스토랑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어떤 음식을 팔았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외관도 화려했고 내부 공간이 이국적이어서 어릴 때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촌이랑도 같이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부산 해운대구 34세 이*영
■ 외식이 ‘일상’이 되기까지
과거 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할 수 있었죠. 졸업식이나 생일, 기념일 등에 큰마음 먹고 가곤 했습니다.
점차 국민 소득이 오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식생활 양식도 변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외식 문화가 익숙해진 거죠.
1989년 1월 26일 자 <부산일보> 기사는 '새 풍속도로 자리 잡는 외식지대'라는 기사에서 청소년층, 대학생층, 가족단위 음식점을 나누어 소개했는데요. 부산 서면 학원가를 중심으로는 작은 분식점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당시 500원 단위로 분식을 먹을 수 있는 '5백냥 하우스'가 인기를 끌었다네요. 또 서면역~부전역 지하상가와 남포동 지하상가 분식점도 청소년의 아지트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산 대학가 앞에는 대학생들의 기호를 맞춘 식당들이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500원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저렴한 음식점에서부터 고급 레스토랑까지 종류도 다양했다고 하네요. 특히 80년 후반에는 대학가 앞에 전통 주점이 즐비했습니다. 학생들도 이곳에서 술 한잔 기울이곤 했죠.
이 시기에는 가족 단위 외식도 크게 늘어났다고 하는데요. 보통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금정산성 쪽에는 80여 곳의 염소 고기 집이 들어섰다고 하고요. 수영구 광안동 일대에도 불고기, 갈비, 양곱창, 횟집 등의 외식촌이 형성됐다고 하네요. 해운대 지역에는 갈빗집이 주류를 이뤘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외식 문화가 익숙해졌다지만, 가족 외식 평균 횟수는 1회 미만이었습니다. 1990년 1월 24일 자 <부산일보> '과소비 "과대광고·방송 책임 크다"'라는 기사는 '소보협'이라는 소비자 단체의 외식 관련 조사 결과를 인용했는데요. 조사 결과, 가족과 함께하는 외식이 월평균 0.978번으로 나타났습니다. 외식 한 번에 드는 비용은 평균 2만 5650원이었다고 하네요.
1990년대 중반부터는 외식 문화가 활발해지는데요. 식당의 종류도 더 다양해집니다. 피자, 치킨,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스테이크나 스파게티와 같은 양식 요리에도 더 익숙해지죠.
1997년 한국음식업중앙회에서 성인남녀 1500명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음식문화에서도 세대 차가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하는데요. 이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74.1%는 '식사는 꼭 밥이 아니어도 된다'고 응답했습니다. 반면, 40대 이상에서는 과반 이상이 '아직도 식사는 밥'이라고 응답했네요.
이 조사에 따르면 외식 유형도 선호하는 취향이 다르게 나타났는데요. 젊은 층은 한식보다 양식을 선호하고, 비싸더라도 맛있고 소문난 집을 찾아다닌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연령이 낮아질수록 '외식에 사용하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고 하네요. 요즘도 비슷한 추세죠?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외식비부터 줄이기 마련이었는데요. IMF 직후인 1998년 9월 16일 자 <부산일보>에는 '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 결과가 실렸는데요. 지출을 크게 줄일 세부항목에 대해서는 '외식비, 의료보건비, 의류비, 교양, 오락 문화비 순으로 줄이겠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000년 중반엔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이 과열 양상을 보입니다. 2005년 10월 27일 자 <부산일보>는'서면지역 외식상권 경쟁 뜨겁다'는 내용의 기사를 다뤘습니다. 빕스를 비롯해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베니건스, T.G.I 프라이데이스 등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이 모두 서면에 모였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서면 상권에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가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상권 안에서 2개의 점포를 운영했고, 빕스도 서면점에 이어 쥬디스 태화점을 추가 오픈해 '과열 양상'이라는 분석이 나왔죠. 패밀리 레스토랑 업체들은 서면 지역을 선택한 이유로 1·2호선 환승역으로 유동 인구가 많고,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집객 효과가 뛰어난 점을 꼽았습니다.
2000년 후반에는 다양한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는 뷔페가 인기를 끕니다. 2007년 자갈치시장 현대화 건물 5~6층에 대형 해산물 뷔페인 '오아제 부산점'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해운대 신시가지에는 '드 마리스'라는 곳이 문을 열었죠. 이듬해에는 부산진구 전포동 밀리오레(현재 NC백화점 서먼점) 1층에 초대형 해산물 뷔페 '토다이 서면 밀리오레점'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한식뷔페, 고기뷔페, 스시뷔페 등이 등장하기도 했죠.
2010년대 이후부터는 SNS가 발달하면서, 맛집 찾기 열풍이 입니다. 양보다 질,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문화가 됐죠. 맛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도 맛 못지않게 중요해졌고요. 또 특별한 대접도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기를 직원이 구워주는 곳도 많아졌죠. 100% 예약제로 소수의 손님만 받는 식당도 많아졌고요. 요즘은 '오마카세(주방 특선)' 식당이 부쩍 많아진 것 같죠?
최원준 맛칼럼니스트는 이같은 현상을 "과거 부산은 피란민들이 모이던 곳이어서 저렴한 돈으로 푸짐하게 음식을 내어주는 문화였지만, 소득이 높아지면서 점점 고급화되고 다이닝화 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 그때 그 사람
서면 영광도서에서 서면문화로를 따라 140여m 떨어진 곳에 '호수그릴'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하야리아 부대 장교 식당의 셰프 출신인 최기수 씨가 운영하던 곳이죠. 취재진은 창업자 최 씨의 아들이자 호수그릴 부사장이었던 최승규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아들 최 씨를 통해 부산의 3대 그릴로 불렸던, '호수그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스테이크를 파는 양식당에는 '그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부산에는 남포동 청탑그릴, 서면 호수그릴, 범일동 석화그릴이 3대 그릴이었다고 합니다.
호수그릴은 1972년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서면교차로 현 부산은행 건물 근처였습니다. 30평 남짓한 작은 건물에서 시작했죠. 바로 근처에 당시 부산진경찰서와 부산진구청이 있었습니다. 외식 문화가 익숙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주변 관공서 덕분인지 장사가 잘됐습니다. 3년 뒤엔 롯데호텔 맞은편 큰 길가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 당시엔 롯데호텔이 아닌 부산상업고등학교가 있었죠. 영광도서 근처로 자리를 옮긴 건 1980년쯤이라고 하네요.
호수그릴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고급 양식 레스토랑이었는데요. 식당에 들어가면 샹들리에 장식이 있었고, 그랜드 피아노도 놓여 있었습니다. 서빙은 양복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전문적으로 했죠. 스테이크류는 식지 않도록 소 모양의 철판 접시에 담겨 나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특수강으로 제작된 철판이었다고 하네요. 식당 분위기가 좋다 보니, 이곳에서 선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서면 일대가 상업 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손님을 대접하는 '비즈니스맨'들이 주로 찾기도 했습니다. 2층엔 단체석도 있었는데요. 동창회나 회의, 모임 등을 이곳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로타리 클럽'도 매주 두 번 이곳에서 오찬 모임을 했다네요.
호수그릴은 해운대구 송정동에도 분점인 '호수바이칼'을 오픈하는데요. 당시 송정이 떠오른다는 기대감에 문을 열었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간 탓이었을까요. 송정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가졌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나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본점의 매출로 버티면서 운영을 이어갔죠.
다행히 본점은 잘 버텨줬습니다. 호수그릴이 생긴 이후로 '그릴'이라는 이름이 붙은 양식당 네 곳이 더 생겼지만, 이곳만큼 오래도록 명맥을 이어가진 못했죠.
하지만 본점도 위기를 만납니다. 최 씨는 폐업 때까지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IMF와 광우병 파동,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의 등장이었죠. 앞서도 언급했지만, 2000년 중반 베니건스, 아웃백, 빕스 등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이 서면에 들어섰죠. 다른 위기는 다 넘겨냈지만, 쓰나미처럼 몰려온 기업형 프랜차이즈들은 개인의 역량으로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최 씨는 "아웃백 매장에 손님들 얼마나 있는지 가서 보기도 했어요. 저희가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 거죠"라며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호수그릴은 결국 2008년쯤, 35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습니다. 이제 부산 호수그릴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호수그릴의 1대 총괄주방장이 고향인 경남 사천시에서 운영 중인 '호수 레스토랑'인데요. 호수그릴의 방식대로 야채스프, 함박스테이크, 경양식 돈가스 등을 팔고 있다네요. 올해 초 이곳을 찾은 최 씨가 인증하길, 그 시절 호수그릴의 맛과 비슷하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직접 메뉴를 개발하셨어요. 스테이크 소스도 아버지 레시피라서, 다른 곳에서는 이 맛을 느끼기가 어렵거든요. 이제 이곳에만 호수그릴의 흔적이 남아있죠."
최 씨는 올해 2월, 자신의 블로그에 호수그릴 사진이 담긴 포스팅을 올렸는데요. 그 게시물에는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방문자 조회수가 찍힌다고 합니다. 최 씨는 아직도 호수그릴을 기억하는 분들을 보면 신기한 마음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서면 맛집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왔겠거니' 생각했는데, 검색어 통계를 보니까 '호수그릴'을 검색해서 들어온 분이더라고요. 문 닫은 지 10년이 더 넘었는데, 아직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새마당예식장, 새부산예식장, 금강예식장, 행복예식장 등 이제는 사라진 부산 예식장에 담긴 독자 분들의 추억을 들려주세요. yool@busan.com 메일함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2022-05-21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