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덫’에 빠진 세계 ‘불평등 세습화’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세계화는 능력주의 신화를 퍼뜨리는 엘리트들의 놀음일 수 있다. 올해 초 영국이 유럽연합(EU)을 공식 탈퇴하자 런던에 모인 시민들이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을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 부산일보DB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이 8년 만에 출간한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 덫을 해체한다. 능력주의? “우리는 개인이 각자의 출생이나 특권이 아닌 자신의 재능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이 얼마나 정당한 얘기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거다.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리고 있다는 거다. 특히 능력주의가 현대판 세습 귀족제를 만들고 있다는 거다.
이 책의 진단은 미국 사회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현재 미국에는 대학 학위가 없는 이가 전체 인구 3분의 1이다. 이들이 샤이 트럼프주의자로서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능력주의 엘리트가 상층 지배층을 이루고 못 배운 대중을 함부로 무시하면서 오만했기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대선 국면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한심한 족속들”이라고 조롱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대중은 ‘혼자 잘나서 눈꼴신’ 힐러리 대신에 차라리 ‘좌충우돌하는 못된’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줬던 것이다.
못 배운 대중 무시하는 엘리트
재능 신화 속 소득·권력 장악
절제 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위험
복지·경제 민주주의 모색해야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영국 브렉시트 표결에서도 드러났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자국 노동자들을 외국노동자들과 경쟁하게 만들고 그 이익을 챙긴 이들이 영국 능력주의 엘리트라는 거다. 동료 시민들보다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잘 지내는 능력주의 엘리트와 전문가들에게 표심이 반기를 든 것이 브렉시트라는 거다. 이렇게 능력주의에 대한 분노는 전 세계 민주정치 지형을 변형시키고 있다.
이 책은 미국과 세계는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고 진단한다. 미국 남성의 중위 실질소득은 반세기 동안 그 자리다(한국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대신 미국 기업 CEO 보수는 노동자의 그것과 비교할 때 1970년대 말 30배에서 2014년 300배로 늘어났다. 현재 미국에서 하위 50%는 국민소득의 12.5%를 점하지만, 고작 1%의 최상위 계층은 무려 20.2%를 차지한다. 능력주의는 소수에게 확 몰아주는 구조다.
능력주의가 소득과 권력의 불평등을 양산하고, 그 불평등을 세습화한다. 미국 수능인 SAT 성적도 부모 돈 따라 간다고 한다. 1600점 만점에 1400점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이 부잣집 자녀는 다섯에 하나라면, 가난한 집 출신은 오십에 하나라고 한다. 이렇게 불평등은 고착화돼 간다.
미국 사회에선 인종주의나 성 차별주의는 정치적 편견이라며 반대하지만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편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능력주의 신화라는 거다. 지난 40년의 세계화 과정 속에 능력주의 폐해는 여실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한가. 샌델은 말한다. “능력 경쟁을 위해 무장한 사람보다 학위가 없으나 우리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 자신의 일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더 빛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싸가지 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엘리트보다 못 배워도 공동체를 생각하는 시민적 덕성을 갖춘 이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이 책의 전언은 몇 가지로 보인다. 첫째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대단히 위험하다는 거다. 20세기 말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유주의가 절제를 잃으면서 민주주의 가치마저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복지주의, 경제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를 다양하게 모색해야 한다는 거다. 둘째 한국 사회 불평등도 심화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소수의 세습 금수저를 양산하는 사회 구조를 그냥 방치해선 안 된다는 거다. 셋째 허구한 날 이어지는 정치판의 정쟁은 국민을 무시하는 한국 정치 엘리트들, 오만한 그들만의 놀음은 아닌지를 추궁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능력주의의 허점을 꿰뚫으며 다음과 같은 점을 일깨운다. 가난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지위가 갈수록 취약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 체제 아래서 부자와 권력자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만해지고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지음/함규진 옮김/와이즈베리/420쪽/1만 8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