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동화] 매력 훔치기 / 이수빈
난 망했다. 하필이면 강하윤에게 들키다니. 이제 내 학교생활은 끝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꿈이길 바라며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지만, 여전히 강하윤은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운동장 나무 아래에다가 그것들을 파묻는 그 장면을 다 본 게 분명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던 강하윤의 등 뒤로 해가 높게 떠 있어서 그림자가 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고개를 드니 강하윤이 쭈그려 앉아 다시 흙을 파내고 있었다.
“역시 지유 네가 훔쳤구나?”
진짜로 망했다. 강하윤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내가 강하윤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훔친 건 강하윤의 물건이 아니다. 강하윤의 매력이다. 강하윤의 매력을 내 걸로 만들기 위해 물건을 훔쳤다는 게 웃기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실이다. 이 모든 건 5월, 친해진 애들끼리 이미 다 친해진 뒤에 강하윤이 전학 오면서 시작됐다.
원래 4월쯤 되면 같이 다니는 무리가 확실하게 나뉜다. 그때까지도 무리를 못 찾거나 같이 다니던 애들과 싸우면 바로 혼자가 되는 게 새 학기의 규칙 같은 거다. 내가 그랬다. 나는 싸우거나 무리를 못 찾은 건 아니고, 무리인 줄 알았던 조하은을 단단히 믿어버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조하은은 첫날부터 내 앞자리에 앉아서는 자긴 아는 애가 없어서 걱정된다고 울상을 지었다. 아는 사람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했더니, 그럼 우리 둘이 다니면 되겠다며 냉큼 하이파이브를 제안했다. 3월 한 달 내내 같이 다닌 조하은은, 4월에 조별 과제를 같이 하며 친해진 애들과 더 자주 노는 것 같더니 이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은 여름이 다 됐는데 조하은과 나 사이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다.
그런 나에게 5월이란 애매한 달에 전학 온 강하윤은 찬스였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찬스, 혼자 다니는 애에서 벗어날 찬스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을 걸 틈도 없이 강하윤은 전학 첫날부터 무려 세 무리에게 합류 제안을 받았다. 하긴, 강하윤은 누구든 같이 다니고 싶어 할 만큼 잘났다. 얼굴도 예쁘고, 좋은 향기가 나고, 목소리도 좋고, 립밤을 발라 입술이 반짝거리고, 필통을 구경하겠다는 애들에게 마음껏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건 가지라고 할 만큼 마음도 넓고, 쪽지 시험에서 항상 일등을 할 만큼 공부도 잘하고, 애들이 다 깔깔 웃을 정도로 웃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친해지고 싶은 애, 그게 강하윤이었다.
그런데 강하윤은 6월이 될 때까지 어느 무리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무리 지어 다니는 애들, 그러니까 항상 밥을 같이 먹고 핸드크림을 나눠 바르고 화장실에 같이 가는 애들을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하윤은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특별히 친한 애가 없어서 붕 떠 있는 애였다. 그게 나에게 용기를 줬다.
“오늘 학교 마치고 뭐해?”
강하윤은 나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뻗어 주변을 둘러봤다. 무리 애들을 찾는 건가 싶어서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혼자라는 건 친구가 없다는 거고, 6월에 친구가 없다는 건 친구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만큼 내가 별로인 애라는 뜻이다. 나는 괜히 무리가 있는 척 다른 애랑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된다더라는 거짓말을 했다. 강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가고 싶었던 소품 가게가 있는데 같이 갈래?”
친구랑 같이 논 게 너무 오래전이라 대체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강하윤이 먼저 갈 곳을 제안해줬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강하윤의 뒤를 따라 도착한 소품 가게는 머리핀과 머리띠 같은 걸 주로 파는 곳이었다. 리본이 달린 분홍색 머리핀이 귀여워서 가격을 봤는데, 무려 만 오천 원이었다. 내 용돈으로는 턱도 없어서 후다닥 내려놓았지만, 자꾸만 눈길이 가고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하윤은 가게를 한 바퀴 돌더니 나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사고 싶은 거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냥 구경하러 온 거야.”
강하윤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슬쩍 계산대 쪽을 봤다. 계산대에 앉은 언니가 지루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강하윤은 나에게 귓속말했다.
“엄청 예쁘지도 않은데 너무 비싸지 않아? 완전 별로야.”
나도 비싸다는 데는 동의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강하윤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건 예쁘지? 자, 너 아까부터 이거 봤잖아.”
강하윤이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리본이 달린 분홍색 머리핀이었다. 만 오천 원짜리 비싼 머리핀, 강하윤은 계산대 근처도 안 갔는데 언제 이걸 산 걸까? 경찰인 우리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내 것이 아닌 건 눈독 들이지도 마라! 이 머리핀은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계속 머뭇거리자 강하윤이 기분 상한 듯 핀을 훽 가져가 자기 머리에 꽂았다.
“싫으면 내가 가지지 뭐.”
그때 강하윤의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더니,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찰랑거렸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가 갑자기 아이돌처럼 예쁘게 흩날렸다. 바람도 안 부는데 바람이 부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움직이니까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머리핀이 강하윤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도 저 머리핀을 하면 저렇게 머리가 흩날릴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엄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내 것이 아닌 건 눈독 들이지도 마라!
그날 이후로도 강하윤은 종종 나에게 선물을 줬다. 선물이면 기분 좋게 받을 수도 있지만, 왠지 자꾸만 그날이 생각나서 대부분 거절하게 됐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안 줘도 괜찮다고 말하면, 강하윤은 화가 난 듯 거칠게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나를 째려보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강하윤 머리의 리본 달린 머리핀은 떨어지지 않고 예쁘게 꽂혀 있었다.
강하윤의 비밀을 알게 된 건 지난주였다. 6월이 끝나가자 이른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계속 비가 와서 우리는 체육 수업을 교실에서 하게 됐다. 책을 읽거나 학원 숙제를 해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조용히 떠들었다. 나는 수학 학원 숙제를 꺼내다 말고 그냥 창밖을 내다봤다. 빗속에서 운동장의 느티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나뭇잎이 다 떨어질 만큼 바람이 세게 부는데도 줄기부터 뿌리 부분은 가만히 서 있어서 나무 위아래로 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멍하니 나무를 보는 사이 강하윤이 어떤 웃긴 이야기를 한 건지 애들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2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보고야 말았다. 강하윤이 짝 조하은의 지우개를 슬쩍 집어 주머니에 넣는 장면을!
내가 조하은에게 선물한 지우개라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지우개는 사촌 언니가 일본에 놀러 갔다가 사 온,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얼굴 모양 지우개였다. 내가 칼로 두꺼운 가로 부분을 딱 반으로 잘라서 조하은에게 우정의 증표로 줬던 지우개가 분명했다. 내가 가진 나머지 반쪽에 대보면 거의 딱 맞을 게 분명한 그 지우개를 강하윤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삐용삐용 울리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조하은에게 가서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멀어진 애에게 굳이 찾아가서 우정의 증표로 준 지우개를 어디 뒀냐고 묻는 것만큼 구질구질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사물함에 교과서를 가지러 갔다가 강하윤이 지우개를 떨어트리는 걸 봤다. 주머니에 있던 립밤을 꺼내다가 실수로 떨어트린 것 같았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본 것 같아서, 나는 후다닥 지우개를 주웠다. 강하윤에게 돌려줘야 할지 조하은에게 돌려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사이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학 시간이 됐다.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본다는 말에 애들이 다 웅성거렸다. 나에겐 수학 쪽지 시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우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더 어려운 문제였다. 대충 답을 적고 이름을 적는데, 김지유라고 적어야 하는 걸 나도 모르게 김지윤이라고 적었다. 계속 강하윤 생각을 해서인 것 같았다. 필통을 뒤적거리며 지우개를 찾는데, 지우개가 없었다. 하필이면 집에다 놓고 온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조하은의 지우개를 꺼냈다. 잘못 쓴 ‘ㄴ’을 살짝 지우는데, 종이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문제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부한 적도 없는데 수업 시간에 대충 들은 내용이 다 떠오르는 거였다. 나는 바로 연필을 들고 슥슥 답을 썼다.
백 점. 3학년이 되고 처음 받아보는 점수였다. 나 말고는 백 점이 한 명도 없었다. 강하윤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시험지를 꼭 쥐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숫자는 60이었다. 아무리 어려웠어도, 늘 많아야 두 문제 정도 틀리던 강하윤이 갑자기 60점을 받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강하윤의 공부 잘하는 능력이 나에게 넘어온 것처럼. 집에 가니 엄마는 엄청나게 기뻐했지만, 나는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한 번 더 시험해보기로 했다. 만약 내가 강하윤이 갖고 있던 지우개를 써서 백 점을 받은 거라면, 강하윤의 다른 물건을 가지면 또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온종일 강하윤 쪽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회는 2교시 체육 시간에 왔다. 강당에서 수업한다는 말에 강하윤이 머리를 묶다가 머리핀이 신경 쓰였는지 책상에 놔두고 화장실에 갔다. 나는 강하윤 책상 옆으로 가서 떨어진 연필을 줍는 척 머리핀을 집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가 뭐 하는지 지켜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핀을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에 달면 누구든지 이게 강하윤의 머리핀이라는 걸 알 텐데, 제발 주머니에 든 걸로도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지유 너 머리했어?”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애들이 말을 걸었다. 같은 반이지만 대화는 많이 안 해본 애들이었다. 머리핀의 효과인 걸까? 그 애들은 한참 내 머리를 만져 보더니, 양쪽에서 팔짱을 꼈다. 강당까지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강당까지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강당에 있던 강하윤의 묶은 머리가 오늘따라 덜 예뻐 보였다. 좀 엉킨 것 같기도 하고, 전처럼 예쁘게 흩날리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나에게 찬스가 온 게 분명했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애가 될 찬스가!
지난 주말엔 결혼식에 갔다. 강하윤의 머리핀을 머리에 딱 꽂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찰랑찰랑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분홍색 치마랑 잘 어울리는 핀을 꽂아서인지 내가 보기에도 내가 정말 예뻤다. 나는 강하윤처럼 귀 뒤로 머리를 슬쩍 꽂아 넘겼다. 강하윤처럼 눈이 다 접히게 웃어도 봤다. 다음번에는 강하윤의 핸드크림이나 립밤을 가져와야지, 생각한 순간 외출 준비를 마친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나를 슥 보더니 말했다.
“처음 보는 머리핀이네? 샀어?”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도둑질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경찰이 될 거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척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엄마는 잠시 나를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결혼식에선 모두 나를 보고 예뻐졌다고 말했다. 나는 강하윤이 된 것처럼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삼촌이야말로 오늘 옷 멋있네, 언니야말로 오늘 엄청 예뻐, 이렇게 말이다. 원래 나였으면 하지 못했을 말이지만, 강하윤의 매력을 훔쳐 온 것 같던 그 날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월요일에 학교에 오자마자 아직 등교하지 않은 강하윤의 책상 주변을 기웃거렸다. 애들이 뭐하냐고 물어보면 떨어트린 걸 찾는다고 둘러댔지만, 내가 찾는 건 강하윤의 물건들이었다. 머리핀이나 지우개 같은, 강하윤의 손길이 닿고 강하윤의 매력이 담긴 물건들을 주워야 했다. 그렇게 나는 강하윤의 립밤과 핸드크림, 수첩을 주웠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화장실에 가 몰래 립밤을 열어 봤다. 연한 분홍색이 도는 립밤은 촉촉하고 반짝거렸다. 나는 넷째 손가락에 살짝 립밤을 발라 입술에 문질렀다. 미끌미끌한 립밤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간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애들은 내게 몰려들어 말을 걸었다. 핸드크림을 바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 얼굴도 예쁘고, 좋은 향기가 나고, 목소리도 좋고, 립밤을 발라 입술이 반짝거리고, 쪽지 시험에서 일등을 할 만큼 공부도 잘하는 애가 되어 있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친해지고 싶은 애, 그게 나였다. 이제 수첩을 펼쳐 보면 어떤 매력이 나에게로 넘어올까? 꼼꼼한 필기 실력? 동글동글 예쁜 글씨체? 재미있게 농담하는 능력? 나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 수첩을 열어 보고 싶었다.
집까지 가는 길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벗어 던지고 바로 수첩을 열어 봤다. 수첩에는 아주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삼거리 화장품 가게 : 연분홍 립밤
-골목 향수 가게 : 샘플 핸드크림
-리본 핀 소품 가게 : 분홍색 리본 머리핀
-김지유 지우개
-조하은 지우개(어디 갔지?)
아무리 봐도 이건 강하윤의 물건 목록이었다. 그러니까, 강하윤이 훔친 물건! 내 지우개가 어디 갔나 했더니, 강하윤이 훔쳤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강하윤이 떨어트린 조하은의 지우개를 줍고, 그래서… 이 비밀을 알게 된 거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는 것 같았다. 내 것이 아닌 건 눈독 들이지도 마라! 하지만 이미 가져와 버린 건 어떡하지? 나는 고민하며 슥슥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뒤쪽엔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하은 : 생일 3월 15일, 초록색 좋아함, 김지유랑 화해하고 싶어 함, 욕을 좀 많이 함, 화장실에 같이 가주는 걸 좋아함.
-김지유 : 분홍색 리본 머리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안 받았음. 다른 걸 줘봐야지!
거기엔 우리 반 애들의 이름과 좋아하는 것, 생일, 취미 같은 게 쭉 적혀 있었다. 강하윤은 그냥 모두가 좋아해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었다. 모두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던 거다. 동글동글한 글자는 꾹꾹 눌러 써서인지 뒷장까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둘투둘하게 남은 자국들을 만지는데, 손가락에 분홍색 물이 든 게 보였다. 립밤의 색이 물든 것 같았다. 내 얼굴도 손가락만큼이나 붉게 물들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수첩은 꼭 돌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학교에 오자마자 강하윤의 서랍에 수첩을 넣어뒀다. 다른 것도 모두 넣어두고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강하윤이 훔친 걸 강하윤에게 돌려주면, 물건들의 원래 주인은 어떡하지? 그렇다고 내가 모든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남의 것에 눈독 들인 대가를 이렇게 치르다니. 엄마 말 좀 잘 들을 걸 그랬다.
고민 끝에 나는 내 비밀과 강하윤의 비밀을 몽땅 땅에다 묻어버리기로 했다.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리거나 비밀을 드러낼 일 없을 것 같은 단단한 흙 아래에다 말이다. 그렇게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흙을 파내고 지우개와 립밤과 핸드크림과 머리핀을 묻었는데, 몽땅 강하윤에게 들켜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알아챈 건지, 언제부터 서서 지켜본 건지도 모르겠다. 강하윤이 흙을 파헤치고 리본 머리핀을 꺼냈다.
“이건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선물하고 싶었어.”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할 말은 해야 했기에 입을 열었다.
“계산한 게 아니면 선물이라고 할 수 없어. 내 것이 아닌 건 눈독 들이지도 말랬다고.”
강하윤이 나를 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훽 귀 뒤로 넘겼다.
“그런 너도 내 거 가져갔잖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강하윤이 말했다.
“근데 수첩은 왜 돌려준 거야? 그거야말로 증거잖아.”
나는 강하윤을 올려다봤다. 강하윤과 눈이 마주쳤다. 강하윤은 얼굴이 새빨갰고, 계속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귀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가져왔다가, 배배 꼬았다가 잡아당겼다. 나는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노력한 게 거기 있잖아. 훔친 거 적어둔 거 말고, 그 뒤에.”
강하윤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쭈그린 채로 있었다.
“전학 다니는 건 지겨워.”
강하윤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나뭇가지가 흔들렸지만, 우리가 쭈그려 앉은 나무 아래쪽은 다른 세계처럼 고요했다. 우리는 다시 흙을 파냈다. 나는 강하윤에게 말했다.
“내 생일은 11월 16일이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켜 교실로 가고 있었다. 조하은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수첩에다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쓸 것이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리본 핀 소품 가게로 갈 것이었다. 누구도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맞잡은 손에서 같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