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개의 펜선으로 품어낸 ‘제주 4·3’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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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받친밭 이야기/김영화
17m 대작 27폭 병풍책에 담아
1948년 토벌 피해 주민 거주한 숲
7개월 답사 후 글·그림 완성 역작
과거·현재 역사 통해 공존 길 제시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책 속 원화 그림. 이야기꽃 제공

<북받친밭 이야기> 덮개와 책 세트. 이야기꽃 제공 <북받친밭 이야기> 덮개와 책 세트. 이야기꽃 제공

매주 문화부로 백 여권의 신간이 도착한다. 한 권씩 살펴보며, 어떤 책을 소개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이 책은 마법에 홀린 듯 강렬하게 시각과 촉각을 사로잡으며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책은 바로 펼칠 수 없도록 책을 둘러싼 덮개가 있다. 덮개에는 아주 가는 펜으로 그린 숲과 까마귀의 그림이 가득하다. 강렬한 이미지와 더불어 벨벳 같이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져 시각과 촉각을 자극한다.

<북받친밭 이야기>라는 제목만으로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덮개 뒤쪽 2명의 추천사에서 단서를 얻는다. “긋고 또 그은 선들이 큰 품으로 모두를 안으려 한다(강요배)” “간절한 세필로 4·3의 기억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역사화(현기영)”라는 두 문장이 덮개 뒤 그림 중간에 새겨 있다. 덮개에서 책을 꺼내면 논의 벼 색깔과 같아 출판계에서 ‘벼색’으로 불리는 표지의 책을 발견한다. 표지 색부터 시작해 책의 판형은 더욱 특이하다. 27폭 병풍 책으로 모두 펼치면 4.2m에 달한다.

책의 모양에 대해 유난히 길게 설명한 건 이 책이 가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획 단계부터 작가와 출판사 편집진이 일일이 의논하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인 ‘북받친밭’은 제주 사려니숲길 인근에 있는 숲이다. 제주 사람들은 ‘시안모루’라고도 하고 4·3 당시 시민공동체 마지막 리더인 이덕구가 최후를 맞은 곳이라서 ‘이덕구 산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48년 12월 대토벌의 광풍을 피해 제주 사람들은 여기서 숨어 지냈다.

병풍의 한쪽은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여름까지 북받친밭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곳에서 피란 생활을 했고 항쟁 끝에 스러져간 사람들의 증언과 당시 모습이 김영화 작가의 펜으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반대 쪽은 2023년 겨울부터 2024년 초여름까지 꼬박 7개월간 수십 차례 북받친밭과 작업실을 오가며 현재의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전한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지 정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사실 책에 담긴 그림은 작가의 작업실 3면 전부에 한지를 붙이고 하루 16시간씩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세필 붓 하나로만 수십만 번의 선을 그어 완성한 대작이다. 높이 2.7m, 길이 17m 크기이며 130개의 붓펜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작업에 몰두했다. 전시회 때 작가가 사용한 붓펜 회사가 감동해 작가 평생 붓펜을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북받친밭은 원래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린 개활지였으나, 세월이 흘러 빽빽한 숲으로 변했다. 어느 조각가가 그 숲에 4·3 영령에게 바치는 제사상 같은 탁자를 놓았고 신령스러운 눈빛의 까마귀들이 수시로 탁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이야기를 담은 면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았다. 4·3 항쟁 공식 보고서에 나오는 증언을 글로 썼고, 검은색 붓펜으로 묘사된 그림은 독자를 당시 현장으로 데려가 주는 듯하다. 피란민뿐만 아니라 무장대, 토벌대의 증언까지 옮겨 독자가 읽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같다.

현재를 담은 면에는 작가가 처음 숲을 찾게 된 계기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그들과 오늘의 우리를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고, 우리의 역사가 평화와 공존의 길로 한 발짝씩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다’라는 걸 깨닫는 길이기도 했다. 숲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솔직한 작가의 감정이 글에 나타나며 직접 경험한 신비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있다. 작업실 열쇠를 숲에서 잃어버렸는데, 다음번 현장을 찾았을 때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 위에 열쇠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그곳의 4·3 영령들이 작가에게 보내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답사 때 작가는 숲이 말을 걸어왔다고 표현한다. “죽는 것이 더 슬펐을까? 잊히는 것이 더 슬펐을까?”

이 책을 만든 출판사 이야기꽃의 김장성 주간은 “병풍 책 판형은 기계가 아닌 손작업으로 진행한다. 그럼에도 이음새가 깔끔하지 않아 2번이나 전량 폐기해야 했다. 책의 덮개는 벨벳 코팅 기법으로 포근한 촉감이 느껴지며 벼색의 표지를 정한 것도 이유가 있다. 희생된 영령에게 올리는 이불과 밥상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

저자는 제주 토박이 작가로 한국출판문화상, 대한민국 그림책상을 받았으며, 이 책은 소장용 아트북으로 가치가 높다. 김영화 글·그림/이야기꽃/54쪽/3만 2000원.

책을 감싸는 덮개와 병풍책 판형으로 만들어진 <북받친밭 이야기>. 이야기꽃 제공 책을 감싸는 덮개와 병풍책 판형으로 만들어진 <북받친밭 이야기>. 이야기꽃 제공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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