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힘은 `번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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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마 마사오 외

메이지 시대는 서구 문명을 적극 받아들이려는 '번역의 홍수' 시대였다. 사진은 유럽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 모습.

문민(.civilian) 사회(.society) 철학(.philosophy) 자유(.freedom),.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말들이다.

그런데 그 말뜻이 썩 다가오는 편은 아니다."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근대에 들어온 서양말로 번역 과정에서 갈고 다듬은 고민의 흔적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일본에서 번역한 말을 그대로 차용한 탓이다.

"문민"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자.일본 귀족원은 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가 헌법 초안에 넣기를 요구한 조항중 "civilian"이라는 단어의 번역을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평인 범인 문인 문화인 민인 문인 문신 등 다양한 제안이 나왔다.근대 일본의 "민"은 관민이라는 짝개념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데 그런 구조 속에서 새로운 법적 자격을 갖춘 "문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오늘날 일본헌법 제5장의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국무대신은 문민이어야 한다"는 구절은 이렇게 탄생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마 마사오 외 지음/임성모 옮김/이산/1만원)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문답으로 펼치는 흥미진진한 일본 번역의 사상사를 다루고 있다.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양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번역 열기 때문이었다고 진단한다.실제 메이지시대는 "번역의 홍수"를 이룬 시기였다.수만권이 번역되어 나왔고 분야도 역사 지리 법률 정치 화학 등 모든 영역이 망라됐다.

그러나 번역과정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허버트 스펜서의 "Social Statics"를 엉뚱하게 "사회평권론"으로 번역하여 급진적인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으로 만들기도 했다.또 번역주의의 열기는 일본어만으로는 서양문명을 온전하게 일본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어 국어화론"을 외치는 목소리도 일어났다.

우리는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해 사용할 때 전통사회에까지 이 용어를 남발하고 있다.그러나 일본은 고유한 의미인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된 인간집단"이라는 적확한 의미로 사용한다.일본화하기까지의 치열한 번역정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책은 진지한 고민없이 번역에 나서는 우리 지식사회의 문제를 되새겨주는 한편 "베끼기" 차원이 아니라 서양문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는 일본 지식사회의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임성원기자

forest@p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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