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체험한 19세기 조선 감옥 풍경은?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펠릭스 클레르 리델
푸른 눈의 이방인이 체험한 19세기 조선 감옥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거칠게 말하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다. 스스로를 이복명(李福明·1830~1884)이란 우리 이름으로 불렀던 프랑스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가 쓴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유소연 옮김/살림/1만6천원)은 리델이 1878년 1월 28일 서울에서 체포돼 같은 해 6월 10일 석방될 때까지 5개월 남짓 감옥 생활에 대한 수기다.
선교활동 하다 관헌에 붙들려 5개월간 '지옥같은' 옥중 생활
죄수 처우 신분 따라 '차별'…"없는 사람에겐 더욱 힘든 공간"
리델은 천주교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이었고,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인 '한어문전'과 '한불자전'을 편찬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1866년 천주교 박해로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참하게 죽어가자 중국으로 탈출해 프랑스 극동함대 함장인 로즈 제독에게 군사력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병인양요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리델은 1866년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11년 만인 1877년 9월 조선에 다시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다 조선 관헌들에게 붙들렸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5개월 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다 중국으로 추방됐다.
그때 체험했던 조선의 감옥생활이 이 책의 근간이다. 19세기 조선의 감옥과 형벌 문화에 대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책인데, 물론 어쩔 수 없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과 선교사로서의 세계관은 가려 읽어야 할 필요가 있긴 하다.
130년 전 이방인이 본 조선의 감옥 풍경은 당연하겠지만 썩 유쾌하진 않다.
사람이란게 다 그렇긴 하지만 옥졸의 질도 여러 가지였다. 마음에 둔 여자를 가로채기 위해서 무고한 백성에게 엉뚱한 죄목을 붙여 잡아와선 반신불구로 만들기도 했고, 술을 마시고 내키는대로 죄수들에게 철심이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리델은 만일 도둑질한 자들을 모두 체포한다면 옥졸들부터 잡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분개하기도 했다. 반면 포도대장은 리델에게 추위를 막으라고 큰 병풍 하나를 갖다주기도 하고, 탕약도 두 그릇 보내주기도 했다.
죄수들에 대한 처우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요즘 시쳇말로 '개털'쯤으로 해석될 절도범들의 하루하루는 지옥의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밤낮으로 차꼬를 차고 있었는데, 잠을 자는 것도 금지돼 만일 졸기라도 하면 그 즉시 몽둥이 찜질이 가해졌다.
여름은 물론 겨울에도 거의 발가벗고 있었고, 씻을 물도 없어 가끔 허락된 감옥 마당의 악취 풍기는 썩은 웅덩이 물로 몸을 씻었다가 온몸이 습진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앓고 있을 때도 약은커녕 매질에서 면제를 받지도 못했다. 굶주림으로 애타게 기다렸던 밥을 눈앞에 두고도 "나와! 목매러 가자" 하는 벼락 같은 옥졸의 한 마디에 밥알 한 알도 삼키지 못하고 시체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풍경을 묘사한 리델의 서술에 이르러선 먹먹해진다.
요즘말로 경제사범으로 들어온 소위 '범털'들은 밖에서 음식을 받아먹고, 굶주리고 있는 도둑 죄수들 보는 앞에서 대향연을 벌이기도 했다. 대부분 정부 관원 출신이었다.
어쨋든 감옥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힘든 공간이지 싶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