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뉴스] 해양노마드 11/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 페이스'
바이킹상인 휘저은 바다 한자상인이 대를 잇다
노스페이스Northface가 한국에서는 등산복의 대명사이지만 노스페이스란 이름은 말 그대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벽, 북벽이다. 북반구에서 산의 북쪽 벽은 햇볕이 들지 않아 얼음으로 뒤덮여 있으며 춥고 등산하기 힘이 들다. 세계의 3대 북벽으로는 마테호른 북벽, 그랑드 조라스 북벽, 아이거 북벽을 꼽는데 일반적으로 ‘노스페이스=아이거북벽’ 쯤으로 여긴다.
노스페이스는 19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더글라스 톰킨스와 딕 클롭이 창업했을 당시엔 등산 장비와 의류를 판매하는 작은 소매점에 불과했으나 1968년 봉제기계 몇 대를 두고 등산용품 제조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것이 국내에 소개된 지 불과 20년이 채 못 되어서 노스페이스=학생들 일상교복, 스트리트 복, 출근복, 국민복으로 되어 버렸다. 일각에서는 나이키나 각종 골프의류도 실현하지 못한 위업이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옷이 아웃도어 의류인데도 대부분 실내에서 줄기차게 착용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사실 북 유럽인들이라면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덴마크와 독일북부를 포함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얼굴은 매우 입체적인 편이고 체형과 신장이 크고 피부 및 모발색깔이 밝다. 특히 눈 색깔이 파란 사람이 많다. 덴마크나 핀란드, 스웨덴 사람들은 거의 날씬하며 팔다리가 가늘고 머리 작아서 인지 왜소하단 느낌이 들지만 노르웨이 남자들은 대부분 신장이 긴 편이다. 바로 중세시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바이킹의 후손들이다. 바이킹의 얼굴도 여기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뺏거나 바꾸거나
지구상에서 북해와 발트해보다 거친 바다는 거의 없다. 이곳은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수온이 영도 이하로 떨어지는 황천이다. 대구가 돌아오는 1월에서 4월엔 거친 폭풍이 바다에 휘몰아치고 이때 극권은 낮이 거의 밤처럼 보인다. 검게 들끓는 바다와 배의 거친 움직임에도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고 배의 돛을 움켜쥔 거친 손, 깊게 주름이 팬 얼굴, 거의 말이 없는 그들은 자연의 거대한 힘을 일상으로 겪고 살아온 바로 그 바이킹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엔 천연 자원이 부족했다. 포도주와 차, 금과 은, 비단이나 노예 등은 모두 외국에서 구해야 했다. 차가운 밤과 강한 폭풍우와 거친 바다를 지배한 ‘북구의 얼굴’들은 계절 따라 대구가 떠나고 항해하기에 좋은 따뜻한 계절이 오면 더 빠르게 교역과 약탈의 항해를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수백 년 동안 항해기술을 숙련한 바이킹, 배를 타고 나가면 저 먼 육지의 해안에서 ‘뺏거나 바꾸거나’ 식량을 만들 수 있음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말, 모피, 가죽, 목재, 무기 등을 팔고, 또 동서간의 교역, 사로잡은 노예 매매의 중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바이킹은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한 대 항해를 하게 되었다.
금발에 흰색피부 파란 눈의 장대한 키에 조그만 얼굴을 가진 북구의 사람들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300년간 폭풍처럼 밀려와 북해의 거친 바다와 발트해 그리고 유럽내륙의 강을 휘젓고 다니면서 교역과 때로는 약탈을 하고, 새로운 시장을 세우면서 북유럽 바다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된다.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우리 바다Mare Nostrum’로 불렀듯이 바이킹시기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발트해를 ‘동쪽 호수’라 불렀는데 이로 인해 스칸다니비아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바다를 ‘동해’라고 부른다고 한다.
동해의 주인공, 시장경제 원칙 세우다
전문화된 항해 기술로 무장, 북쪽에서 날렵한 배를 타고 온 북구의 낯선 얼굴들은 해외로 진출하던 모험 정신을 바탕으로 정착한 지역에서 빠르고 적극적으로 융화했다. 이어서 그들은 약탈을 위해 황천을 항해할 수 있던 배를 만들던 탁월한 조선 기술로 약탈과 교역품을 가득 실은 더 큰 ‘롱쉽’과 ‘크나르’를 만들고 시간이 흘러 그 후예들인 한자도시의 상인들은 더 많은 상품을 적재할 수 있는 본격적인 상선인 ‘코그’선을 만들어내었다. 이배는 지식집약과 기술우선에 철저했던 바이킹 조선기술의 확대선상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착한 지역에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거래를 하려면 공정한 거래와 규칙이 필요했다. 여기엔 선상생활에서 익힌 상호 신뢰의 정신과 공정한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적 합의는 교역기준들을 세우는데 그대로 녹아들었다.
거기다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왕성한 자주 독립 정신과 강렬한 개인주의는 비즈니스에서 자유무역의 동력으로 발휘된다. 또한 거친 바다에서 익힌 상하관계가 단순한 슬림화된 조직과 구성원의 컨센서스를 중시하는 위임형 리더십 등은 교역에서 신속한 판단과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그대로 적용되었다.
‘북구의 얼굴’들은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지의 분야와 영역으로 나아간 ‘모험가’였고, 리스크를 면밀하게 계산해 최소의 리스크로 최대의 수확을 얻는 전략과 조직력 그리고 법으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이며, 자유교역과 합리적 분배를 숭상하는 ‘시장경제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당시만 해도 미개했던 발트해와 북해 연안은 물론 정치적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있던 서유럽의 모든 상권을 장악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땅, 노예, 금, 그리고 은을 찾아서 무력점령을 한 뒤엔 곧바로 통상망과 상품 유통 조직을 만들고 정기시와 대시를 형성하면서 점령지를 물류와 교역의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바이킹들의 교역품목은 호박, 바다표범이빨, 순록의 뿔, 곰, 수달, 담비의 모피 등이었지만 제일 수지맞는 교역은 노예거래였다. 덕분에 대양을 향해 돛을 올렸던 스웨덴의 비르카와 예테보리, 노르웨이의 베르겐, 덴마크의 하데비와 로스킬드 등의 도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트해의 새로운 물류중심으로 등장한다.
공회에 익숙한 북구의 상인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는 바이킹이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바이킹 사회에선 왕이 입법권이나 사법권이 없었다. 그런 권한은 공회에 있었다. 공회는 자유민들의 회의체로 부락, 지역 단위로 있었다. 이런 공회는 연간 한두 번 열렸고 공개적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재판도 이 공회가 맡았다. 기소된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이런 모임을 열어 문제를 해결하는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보고 독일인들은 “그들은 왕이 없으나 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노르웨이사람들은 아이슬란드를 점령한 다음 서기 930년에 ‘알싱’이란 의회를 열었다.
한편 바이킹 사회는 노예와 부족장이 있긴 했으나 자유민이 주축이었다. 이들 자유민은 당대의 유럽 사람들보다 훨씬 큰 자유를 누렸다. 그들은 평등성에 기반을 둔 민주성, 민주성에 근거한 역동성을 기반으로 유럽곳곳을 누볐다. 더군다나 바이킹은 가족애가 강하였다. 가족의 일원에 대한 모독은 가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되어 보복을 불렀다.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을 가장 가혹한 형벌로 여겼다.
공회에 길들여지고 가족애가 강했던 바이킹 상인들은 모험과 정복의 시대가 끝나고 무력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집단의 장막이 필요했다. 위급한 경우, 실패했을 경우, 사망했을 경우, 상품을 구입하였을 경우 등, 생활의 온갖 면에서 상호간에 도울 공동조직이 아쉬웠던 것. 상인들은 여러 장애와 위험 때문에 집단적으로 대상을 조직하였다. 마침내 상인들은 결집하여 서로 돕기로 맹세하고 네트워크를 만들어갔다. 상인길드가 만들어졌고 길드는 길드끼리의 긴밀한 연결을 강화했다. 11세기 스웨덴의 시그투나에서는 상인길드가 존재하였다.
이동본능을 상실하다
발트해의 함부르크에서 올덴부르크를 경유하여 볼린과 노브고로드에 이르는 통상로도 바이킹 해적에게나 바이킹 상인에게는 긴요한 루트로 떠올랐다. 라인강과 북해를 연결하던 도레슈타트와 프리슬란트 지역을 거쳐 올라온 무역선은 적지 않은 상인들과 교역품을 스칸디나비아에 실어 날랐다. 덕분에 10~11세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래 없는 번영을 이루었다.
수년전에 스웨덴 고틀란드에서 바이킹 시대에 매장된 3kg가 넘는 은화 및 팔찌 등의 ‘보물’이 발굴되었다. 곧이어 영국 노스요크셔에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아일랜드 그리고 러시아 등의 다양한 지역에서 제조된 620여개의 은화와 호화스런 금은괴가 가득한 바이킹의 보물단지가 발굴되었다. 원래 이곳들은 바이킹들이 무역항으로 이용, 활발한 국제 교역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이들 지역 곳곳에서 대량의 외국 제품이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번영의 증거이다.
그들은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영국의 요크, 독일의 하이타부,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등에도 진출, 상업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들 도시에도 교역망이 구축되고 더불어 바이킹의 시장경제의 원칙이 이 도시들을 징검다리로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한편 무력 정복의 시대가 끝나고 아이슬란드와 우크라이나, 독일 등 현지에서 돈맛을 본 바이킹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거기서 농사를 짓고 부를 누리는 현지의 정착민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지도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큰 권력을 쥐고 있던 교회와 손을 잡았다. 이동이 천직이었던 해양의 노마드가 아닌 점차 정주민화 하는 길을 선택, 상인과 농민으로 남기로 한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동성을 잃은 바이킹과 교역중심지들은 여전히 배고픈 북구의 또다른 바이킹의 침략과 네트워크로 무장한 상인세력들에 의해서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동하지 않는 노마드는 이동하는 노마드에게 침노를 받는 역사가 여기서도 되풀이 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와 봉건주의 체제, 정기적인 시장과 상인네트워크가 이들 바이킹 도시들에 도입되면서 노예무역이 감소하고 바이킹 상업도시는 봉건사회화, 네트워크화 한다. 교역의 주도권은 네트워크와 신상품으로 무장한 차세대 해양상인 세력들에게로 옮겨간다.
‘한자’ 청어와 함께 돈방석
11세기 들면서 발트해에 변화의 물결이 인다. ‘한자’로 대변되는 독일상인들의 발트해 진출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심의 교역의 항로가 서부 유럽의 발트해 연안도시 중심으로 수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자 상인들이 발트해에서 주도권을 잡은 뒤 지배한 무역망은, 같은 곳으로부터 바이킹들이 확장해 나간 무역망에 비하면 규모면에서 상당부분 줄어들었지만 서부유럽 연안도시의 ‘상인’들은 바이킹 시절부터 선재하던 네트워크와 상업망을 인계받아서 재확립하고 조직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상업도시의 발달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1158년의 뤼벡시 건설은 한자 상인들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이 뤼벡을 중심으로 독일 도시 상인들의 발트해 진출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른바 ‘한자 상인’의 등장이다.
뤼벡의 등장에는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왕 청어(King Herring)’와 ‘소금’이다. 갑자기 청어는 무엇이고 소금은 웬말이냐고 하겠지만 중세기엔 육류 자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비쌌다. 평민들이 북구의 추운 날씨와 고기를 금하는 사순절 절식기 등을 견뎌내려면 지방이 풍부한 대체 단백질의 공급이 필수. 그러던 차에 지구의 온난화와 더불어 청어가 북유럽의 바다로 몰려온 것. 중세 유럽에서 청어는 ‘바다의 밀’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의 제2의 주식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춥고 쓸모없던 바다가 노다지를 캐는 돈의 바다가 된 것이다. 고마운 청어.
한편 청어의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소금의 수요가 늘어났다. 그러나 일조량이 부족하고 염도가 낮은 북유럽에서는 천일제염법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없었다. 뤼벡의 상인들은 방부처리에 필요한 암염이 남쪽으로 95km 떨어진 뤼네베르크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뤼네베르크에서 뤼벡으로 얼마나 소금을 실어 날랐던지 그 길을 지금도 ‘옛 소금길’이라고 부른다. ‘북쪽의 금’ 또는 ‘백색의 금’이라던 소금. 13세기에 소금 한 통에 집 반 채 값이었다고 한다.
뤼벡은 청어에 소금이란 부가가치를 더해 떼돈을 벌었다. 뤼네부르크에서 수입한 소금을 막 잡아올린 청어에 뿌려 방부처리해서 유럽 각지역에 내다 판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독일 전역의 돈이 뤼벡으로 몰렸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은 뭐든지 청어와 바꿀 수 있었기에 청어를 처분하기 위한 원거리 항해용으로 코그선을 짓는다. 상인들은 이배에 청어와 목재, 모피, 철 따위와 대구 같은 수산물, 곡식과 맥주 등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동양의 향료 및 영국의 양모나 기타 가공품을 북방으로 운반했다.
뤼벡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해에서 청어가 무한대로 잡히고 방부제용 소금을 싹쓸이했으니 상인들은 북유럽과 서유럽 전역에서 수요가 막대한 상품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음을 알게 되다. 돈방석 이권은 무슨 수를 쓰던 보호하려는 게 인간의 본능. 외지에서의 상업권익을 지키기 위해 상인들은 단결한다. 오직 단결만이 살길이다.
런던에 진출한 쾰른 상인들은 자체 조합의 집회소를 운영했다. 12세기 중엽에는 함부르크, 뤼벡의 상인들이 조합 결성을 인정받았다. 이들 여러 도시에 있는 조합이 합체해서 런던에서의 독일인 상인 한자가 형성되었으며 이런 종류의 상인한자의 거점은 런던만 아니라 발트해 곳곳의 도시로 퍼져간다.
'노스 페이스' 그들만의 리그 결성하다
13세기를 경과하며 이 교역의 네트워크가 훨씬 더 촘촘하게 발전하였다. 더불어 발트해 남쪽과 동쪽 지역에 대한 동방식민운동과 도시건설이 활기를 띠었고 이런 요인들은 교역의 확대에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점차로 도시에 눌러 앉는 상인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들이 축적한 재화는 자연스레 상업 도시들이 부를 축적하는 효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를 축적한 도시가 힘을 가진 도시로 도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침내 14세기 들면서 대상조합의 힘보다 도시들의 힘이 커지면서 상인한자에서 도시한자로 변신이 이루어진다. 한자의 중심도시 뤼벡을 가운데 두고, 서쪽 런던과 브뤼헤, 동쪽 노브고로드, 북쪽 베르겐으로 대표되는 네 개의 상관(Kontor)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들의 리그결성은 불 보듯 뻔한 일. 본격적인 한자도시의 리그시대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 온 것이다.
돈을 따라서 바다로 몰려나왔던 ‘노스 페이스’들은 뜻하지 않게 발틱해에서 황금알을 낳는 청어 덕분에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선주와 상인으로 변신했고 나중엔 이동의 본능보다 정주상인세력으로, 더 나아가 도시세력으로 정주하는 길을 택했다. 참, 몰려왔던 청어들은 어찌되었냐고? 청어가 딴 데로 이동하면서 돈의 바다로 몰려나왔던 청어 쫓던 한자의 세력도 쇠퇴했다나 뭐라나....
SEA&강승철기자 ds5bsn@busan.com
도움말= 한국해양대학교 유럽학과 정진성교수
TIP/ 독일말로 한자적인(hanseatisch)라는 말은 한자도시 사람들의 특징을 일컫는 용어라고 한다. 한자라는 말은 원래 ‘집단’을 뜻하며, 외지에서의 상업권익을 지키기 위해 단결한 무역상인의 조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자 상인들의 자율성 보장, 제후에 대한 공동방어, 시장 및 통상로 확보와 유지에 대한 공동대처, 상업상의 특권 획득 및 상관 설치 등에 관한 일관된 목표는 사실상 바이킹의 사회적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중에 한자동맹의 기본이 된다.
정식명칭이 ‘자유 한자도시 함부르크’에는 500년 전통의 존경받는 상인클럽이란 모임이 있다. 회원 1천명의 이 클럽 정관은 신의, 개방, 약속준수, 사회봉사, 사회적 및 경제적 질서유지 책임 등의 덕목을 핵심 가치관으로 내세운다. 이곳 사람들은 외향적이기 보다 내향적이며 내실을 더 중시한다. “뮌헨 사람들이 밍크목도리를 밖에다가 두르고 다닌다면 함부르크 사람들은 안에다 두르고 다닌다”는 말도 한자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한자 후예들인 함부르크 상인들이 자기가 한 말과 약속에는 책임을 지는 전통과 상담 후 굳게 악수 한 번 하는 것은 이심전심의 결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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