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탈출-호국 기행] 황현 선생 발자취 따라서(광양~순천~구례)
망국의 아픔 속 순국… 발 닿는 곳마다 매천의 절개 오롯이
조선 말기 학자요, 시인이자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절명시(絶命詩)'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건 처음이었다. 지난 2002년 복원된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매천 생가 앞마당에서였다. 지식인의 책무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던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인간세상 지식인 노릇 너무나 어렵구나)' 구절만이 아닌 절명시 4수 전체와 생가 기둥에 써 붙인 주련에 대한 해석까지 상세하게 해 놓은 입간판이었다. 망국의 아픔 속에서도 글 아는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매천은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일제에 항거하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광양 매천 생가와 묘역
매천 생가 '매천헌'을 찾아간 그날은 평일인 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하지만 '매천헌' 앞마당의 우물이며 장독대, 뒷마당 정자 옆에서 자라고 있는 농작물까지 마치 지금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것처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공교롭게도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 선생 역시 매천 생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백운산 문덕봉 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새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세상 지식인 노릇 너무나 어렵구나'
한일병합에 분개, 절명시 남기고 자결
군자의 혼·정신 깃든 유물·학교·사당…
100년 세월 거슬러 '행동하는 지성' 만나다
매천 생가를 등지고 매천 묘역이 있는 매천역사공원으로 나왔다. 묘역에는 매천 부부는 물론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암현 부부, 그리고 손자까지 5대의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매천의 순국지는 구례이지만 후에 이장돼 왔다고 광양시 문화홍보담당관실 최상종 학예연구사가 설명했다.
문득, 숱한 역사가가 있었고, 문장가가 있었지만 매천이 유독 존경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
'매천 황현을 만나다'(2010, 심미안)의 저자 이은철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매천의 장점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의 필독서라 할 만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기록함에 있어 아주 객관적인 잣대를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매천의 지기였던 이건창도 '(매천)붓 끝의 기백은 반고(후한의 역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매천의 순절이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은철 선생의 평가를 더 들어 보았다.
"매천의 제자들이 꼽은 스승의 가장 위대한 부분은 문장과 절의의 일치였다. 매천의 절의, 곧 순절은 그의 문장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그의 문장은 장렬한 순절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문장이 말[言]이라면 절의는 행(行)이다. 매천은 언행이 일치하였다."
그렇다. 매천은 따뜻한 감성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2천500여 수의 시를 남겼을 뿐 아니라 비판적 입장에서 자신이 사는 시대를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위기의 시대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문(文)·사(史)·절(節)'을 한 몸에 지닌 우국지사라는 평가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었다.
■광양을 떠나 구례로
광양의 매천 생가와 묘역을 돌아보고 난 뒤 은근히 욕심이 생겼다. 이왕 나선 김에 매천 선생의 흔적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해 29세(고종 25년 1883년)에 특설보거과에 급제하였고, 34세(1888년)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과 조정의 부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급제와 동시에 낙향해 구례에 살면서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 양성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매천 황현 생가 안내판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구례로 향했다. 앞서 구례군 문화관광실에 도움을 요청해, 김은영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았다.
김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매천이 광양을 떠나 구례 만수동으로 이사한 것은 1886년 그의 나이 32세 때. 그리고 2년 뒤 생원시에 1등으로 입격(최종 대과가 아니었기에 등수 안에 들어도 합격이라 하지 않고 입격이라 한다)하지만 벼슬길로 나아가는 대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정계를 개탄하며 만수동으로 낙향한다. 구차하지만 마음이 편안한 길을 택한 매천이었던 것이다.
만수동은 매천이 1902년 광의면 수월리 월곡 마을로 이사할 때까지 16년간 살았던 곳이다. 만수동은 현재 구례군 간전면 상만마을이 있는 곳으로, 매천의 서재였던 구안실(논어에 나오는 말로, 그런대로 편안히 지낼 만하다는 의미)과 삿갓 모양의 1칸짜리 정자 '일립정'으로 추정되는 터만 있었으며, 그나마 매천정, 매화나무 흔적은 엿볼 수 있었다. 구안실에 이르는 초여름 숲은 이 계절에도 얼마나 예뻤던지 마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동네 같았다. 매천은 만수동에서 살면서 숱한 책을 읽고 썼으며, 제자를 양성했다. 편년체로 기록된 생생한 야사 '매천야록'을 쓰기 시작한 곳도 만수동이다. 하지만 매천은 천생 유학자였기에 동학농민군이 관리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폭력을 동원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하극상에 대해선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어 찾아간 곳은 월곡 마을, 현재의 매천사가 있는 곳이다. 매천사는 선생이 순국한 집터에 세운 사당으로 매천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들이 앞장서 1962년 건립했다고 한다.
황현 선생이 1910년 일제 강점에 항거하며 자결 순국한 구례 광의면 월곡 마을 '대월헌'. 그를 기리는 사당 매천사가 뒤편에 세워졌다. |
황현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일상 생활 물건들. '대월헌' 옆 매천유물관에 있던 것을 국립순천대 박물관 내 '매천 황현실'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졌다. |
검소하지만 단아한 선비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매천 황현 선생 초상화(1911년). 2006년 사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
한편 매천은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마지막으로 상경해 해강 김규진이 운영하는 천연당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때 매천의 나이 55세로, 경술국치 1년 전이다. 이때쯤 매천은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전 처음 찍은 사진과 그를 바탕으로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는 지난 2006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됐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꽤 여러 곳의 매천 선생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지금 이 시대에 매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했다. 이날 광양 안내를 맡아 준 최상종 학예연구사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매천 선생 역시 선비로서, 한 사람의 백성으로서 살다 가셨지만 무엇보다 자기 소신대로,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한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역사 속의 인물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역사를 배우는 이유일 테니까요."
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선생은 내게도 말하는 듯했다.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지식인의 책무는 나와도 결코 무관한 게 아니었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절명시(絶命詩)-매천 황현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未然 (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분帝星移(요분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九闕沈沈漏遲(구궐침침주루지)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끝맺음이 겨우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요
當時愧不섭(밟을 섭)陳東(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주련(柱聯)
山居三十年(산거삼십년) 산 속에 삼십 년 묻혀 살면서
種德不種木(종덕부종목) 덕을 키웠을 뿐이지 나무를 키우진 않았다네
枾栗自能生(시율자능생) 감나무며 밤나무들은 저절로 자라나서
低低秋晩熟(저저추만숙) 주렁주렁 가을 열매가 가득 열린다네
<제공:광양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