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녹차의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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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로 만나는 임권택의 일상

정성일 감독의 영화 ‘녹차의 중력’ 키노 제공 정성일 감독의 영화 ‘녹차의 중력’ 키노 제공

다큐멘터리는 기다리는 작업이라고들 한다. 원하는 장면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일이다 보니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긴 시간 끝에 선택되고 필름에 담기는 건 결국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원하는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차의 중력’은 이상한 영화다. 정성일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2014)의 제작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그리곤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임권택 감독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저 바라보다가 문득 기다림 사이에 놓인 시간, 말하자면 기다림 그 자체를 찍어낸다. 장면과 장면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응시하던 영화는 마치 그게 영화의 전부라는 듯 임권택의 ‘지금’을 담아낸다. 그 지금에는 과거부터 켜켜이 쌓여온 임권택의 시간이 나이테처럼 맺혀 있다.

정성일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녹차의 중력’은 진즉에 찍어둔 영화다. 시간순으로 따지면 ‘녹차의 중력’이 제일 앞서고, ‘천당의 밤과 안개’를 찍고, 다시 돌아와 ‘백두 번째 구름’을 찍었다. 원래 영화 ‘화장’의 촬영과정을 찍고 싶었던 정성일은 영화 시작이 계속 연기되자 임권택 감독의 일상생활을 찍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은 영화 ‘화장’의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으로 정해져 있다. ‘백두 번째 구름’이 임권택의 촬영 현장에서 현재를 발견하는 영화라면 ‘녹차의 중력’은 임권택 감독의 입으로 감독 임권택의 통시적인 기억을 구술하는 영화다. 신기한 건 이 작업이 임권택 감독이 직접 말해주는 자신의 과거보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의 시간을 응시하는데 더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평론가는 모두 자기만의 감독을 갖는다. 정확히는 (미처 감독이 되지 못한) 자신의 영화적 비전을 구현해주는 감독을 발견한다. 평론가 정성일에게 있어 임권택은 필생의 숙제이자 동반자 혹은 이상의 구현이다. 이제 감독이 된 정성일은 임권택에게 깃든 일상의 시간에서조차 영화적 순간들을 발견한다. 영화의 시작, 임권택 감독은 손님이 오면 항상 녹차를 타주신다. 청년 정성일은 28살 때 임권택 감독의 집을 첫 방문한 이래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임권택의 차를 얻어 마셨고, 이제 녹차를 타기 시작하는 모습에서조차 운명을 마주한다. 임권택 감독에게 영화가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감독 정성일에게 임권택은 운명이다. ‘녹차의 중력’은 존경과 헌사의 마음을 담아 (이제는 영화와 분리 불가능한) 임권택이라는 시간을 찍는다. 그렇게 마치 비켜 찍은 것처럼 보였던 빈 컷들과 기다림의 시간이 모여, 마침내 (감독 정성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영화가 된다.


송경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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