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영속성 전제 조건은 ‘불변’ 아니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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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도널드 서순

미래는 과거·현재와 한몸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해 제대로 걸어가려면 현재의 우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더욱이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이 시대의 키워드로 자리매김한 상황이다.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초변혁의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의 엄청난 복잡성이 미래를 한층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널드 서순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그는 을 통해 인류가 현재의 다양한 병적 징후와 확진된 병증을 방치한다면 미래는 당연히 암울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인류 확진된 병증 방치 땐 미래 암울
낡은 것 죽는데, 새것 안 태어나 위기
물 주고, 퇴비 뿌리고, 분갈이 해야
“병적 징후 예방할 수 있다” 메시지

그의 주장은 어쩌면 그동안 징후들을 포착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분투한 지구촌 다양한 지식인들의 견해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꼽히는 그가 진단하는 현재의 병적 징후와 병증은 훨씬 심각하다. 더욱이 도널드 서순은 유럽의 현재 모습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동안 징후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주로 자본주의 최일선인 미국과 그 언저리에서 이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그는 영국 등 유럽의 사정도 미국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도널드 서순은 병적 징후를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을 ‘변질’로 규정하는 듯하다. 어떤 사회제도의 성질이 다양한 원인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면서 더 이상 당초 목적에 따라 가동되지 않는 현상과 원인에 주목한다. 특히 이미 변질된 것이 사라지지 않고 심각한 부작용만 유발하는 현재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영속성의 전제조건은 ‘불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닫는다. 그는 시대 상황에 맞게 수시로 물을 주고, 퇴비를 뿌리거나, 분갈이를 하는 부단한 돌봄 노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할 때 병적 징후를 예방할 수 있다는 행간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도널드 서순의 화두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출발한다. 그는 변질이라는 단어 대신에 ‘낡은 것’이라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도널드 서순은 책머리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 경구를 인용하면서 낡은 것 중에서도 더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버젓이 존재하는 것들이 유발하는 심각한 부작용에 대한 안타까움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에서 출발한 그의 단상은 미국의 패권 문제를 경유해 외국인 혐오, 복지의 쇠퇴, 기성 정당의 몰락 등 유럽의 아픈 그림자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든다. 무절제한 욕망, 지성의 몰락이 가져온 지구촌의 현재 모습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위기에 빠진 21세기의 세계를 의학적으로 해부한 듯 신랄하다.

도널드 서순은 현대 자본주의가 이제는 죽어가는 낡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 낡은 세계는 예전엔 성장과 안정, 교육 확대의 세계이자 젊은이들이 자기 부모보다 더 잘살고, 더 자유로우며, 도덕 관습의 제약을 덜 받을 것이라고 자랑하는 세계였다. 완전고용과 복지, 사회서비스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세대는 여성과 인종적·성적 소수자 등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싸웠고, 성장과 더불어 자유와 평등을 더 많은 이들에게 확대해 주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이 세계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효용성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더욱이 20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계속 확대되었고, 19세기 후반 첫 번째 세계화 시기부터 모습을 드러낸 외국인 혐오, 인종주의는 나날이 기승을 부린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가 정당성과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경쟁하던 모습도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막말과 혐오로 무장한 극우 포퓰리즘이 판치는 장이 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특히 그는 포퓰리즘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과 인종차별적이고 거친 조롱을 떠올려보라. 죽어가는 낡은 것이 그뿐이랴.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 지구 차원의 팬데믹은 과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생태적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기후 파국을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앙상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그 파국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좀처럼 확신하기 어렵다’고 통탄한다.

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나지만, 어쨌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우리의 삶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리 시대가 병들었어도 계속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 덕분’이라며 그는 반지성으로 유발된 병적 징후를 치유하기 위한 지성의 결집과 연대를 주문하고 있다. 도널드 서순은 런던대학교 퀸메리 칼리지 유럽 비교사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도널드 서순 지음/유강은 옮김/뿌리와이파리/383쪽/2만 원.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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