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호텔방에서 마주 앉아 연 가방엔 권총이 수두룩”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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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인in人] 8. 국산 권총 K5 개발 이끈 엄혁 박사

국산 자동 권총 K5 개발 주역 엄혁 박사. 이재희 기자 jaehee@ 국산 자동 권총 K5 개발 주역 엄혁 박사. 이재희 기자 jaehee@

"최초의 9mm 국산 자동권총 K5가 25m 운용 시험에서 1인치 송판 7장을 뚫었습니다. 국제 기준 송판 1장 이상만 관통하면 합격인데 무려 7장을 뚫어 실험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K5 개발에 참여했던 엄혁(64) 공학박사가 마치 시험 현장에 다시 서 있는 듯 감동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최초의 국산 소총 K1과 K2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K5는 세계 특허도 있습니다. 트라이 액션이라는 격발 장치입니다. 이 세계 특허가 국제 세일즈 기술로 우위를 점했죠." 당시 대부분의 권총은 서부영화에서처럼 노리쇠를 엄지로 당겨 쏘는 단발 액션과 방아쇠를 당기면 노리쇠가 당겨져 발사되는 더블액션이었는데 K5가 정밀 기술을 활용해 트라이액션 발사장치를 완성했다. 이 장치의 장점은 첫 발을 쏠 때 흔들림이 적어 명중률이 높다.

"도미기사 선배들의 기술이 고스란히 전수된 것이죠. K5 국산 권총은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엄 박사는 자주국방의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한 선배들을 떠올렸다. 엄 박사는 국방부 조병창이 1981년 민영화되면서 대우정밀(주)로 이어질 때 입사한 공채 1기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다가 입사했습니다. 대우정밀 공채 1기였는데 당시 동기가 25명이었습니다."

국산 자동 권총 K5. 국산 자동 권총 K5.

민영화 공채 1기로 입사

“대우정밀은 1981년 12월 19일 창립됐는데 우리 동기는 다음 해 1월 공채 1기로 선발됐습니다. 동기 25명 중 병역특례가 20명이었고 5명은 군필자였습니다.” 엄 박사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정밀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지금도 SNT모티브 사내에 있는 영빈관은 김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건물이라고 했다. "기억하기론 김 회장이 GM 등 글로벌 바이어를 초청한 행사를 종종 보았습니다." 엄 박사는 김우중 회장이 국방부 조병창을 인수한 이유는 방위산업의 고정적인 수익성도 있었지만 도미기사들의 탁월한 정밀 기술을 제일 탐냈다고 했다.

"김 회장의 혜안이 적중한 거죠. 사실 정밀기술로는 국방부 조병창 기사와 전문 분야별 도제 수업을 통해 정밀 기술을 전수한 전통 엔지니어들을 따라올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엄 박사 역시 K5 최초 국산 권총 프로젝트를 완성한 뒤 2006년 경남 창원에 있는 SNT중공업에서 수리온 헬기 국산화를 위한 작업에 5년간 매진했다. 이어 2011년 경남테크노파크에 입사해 경남 사천에 있는 항공부품 수출지원단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사천의 한 항공사에서 기술 고문으로 있다.

"사천은 항공 관련사가 많아 50여 곳과 협약을 맺고 기술 자문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옛 대우중공업 협력사업으로 항공훈련기 무장시스템 선행개발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항공 무장체계 관련 연구 보고서를 11권의 책자로 정리한 기억이 납니다."

엄 박사의 정밀기술이 항공산업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도미기사들이 말한 "우리 기술이 대한민국 정밀기술의 시초다"라는 자부심의 실체가 실제로 증명된 것이다. 엄 박사도 대학원에서 자동제어시스템을 전공했다.


ADD시험장에서 K5 권총 시험을 마친 관계자들. 엄혁 제공 ADD시험장에서 K5 권총 시험을 마친 관계자들. 엄혁 제공


국산 권총 개발 영웅들

엄 박사가 입사한 시기는 국방부 조병창 도미기사 절반 정도가 은퇴한 때였다. 정승구, 강흥림, 이경식 도미기사 등이 여전히 남아 후배들을 가르쳤다. 생산기술부장을 맡은 정승구 도미기사가 운영한 기술 파트는 기술관리과 등 7개 과가 있었는데 엄 박사는 품질보증팀에서 최종 품질관리 업무와 기계공정팀(자동선반)에서 공기식 공구 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흔하게 보이는 에어툴이 당신 없었습니다. 일본에는 우류공구라는 회사가 에어툴을 만들고 있었죠. 일본 제품을 벤치마킹해 한국식 에어툴을 완성했습니다. 대우정밀에서 수행한 민영화 최초 프로젝트였습니다. 담당한 부품 공정은 복잡한 기계 부품을 한 번에 깎는 반자동식 선반(스크류머신)이었는데 NC 자동선반의 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 박사는 1982년 사내 기술연구소가 공식 설립되면서 개발 1팀에 배치받는다.

"1팀이 권총 개발을 담당했고 다른 팀은 자동차 관련 연구를 했습니다. 1팀장에 육사 18기 출신 선배 한 분이 계셨는데 국산 권총의 기본 틀을 잡아준 분입니다." 엄 박사는 권총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브리치면이라고 했다. 권총을 측면에서 봤을 때 탄피의 제일 뒷면에 해당하는데 여기가 권총 설계의 시작이었다. 이후 정승구 부장이 총괄하던 방산개발은 미국 박사 학위 출신 선우현 기술연구소장의 영입으로 활기를 띤다.

"리볼버나 체코 권총 등 현존하는 모든 권총을 다 들여다봤습니다. 분해할 때까지 분해하고, 분해가 안 되는 부품은 엑스레이를 찍어 분석했죠." 그렇게 만든 권총이 사실상 최초의 국산 권총 DP52였다. 5.56mm 탄환(소총용과는 다른 22LR탄)을 쓰는 총기였다. 나중에 경찰 쪽에서 사용했는데 탄피가 너무 작아 공포탄을 쏘면 탄압이 부족해 후속 장전에 문제가 있었다. 미국 등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주로 소형 수렵용 등 스포츠용으로 사용되는 구경이다. dP52가 개발된 1984년 군 내부에서 권총 국산화 움직임이 있었다.


권총 시험 장면. 엄혁 제공. 권총 시험 장면. 엄혁 제공.

국산 권총 DP52. 국산 권총 DP52.


국산 9mm 자동권총의 탄생

한국군도 한국형 권총을 갖고 싶었다. 군 장교들은 당시 콜트사 45인치 권총을 사용했는데 군에서 개발 요구가 있었다. 엄 박사가 속한 기술팀들이 본격 9mm 권총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너무 부족해 막막했다. 엄 박사는 미국 출장을 갔다. "총기 관련 원서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피스톨즈 오브 월드>라는 총기 잡지인데 전 세계 총기를 모두 소개한 책이었습니다. 책에 나온 권총 가운데 7~8개를 샘플로 잡았습니다." 이번엔 실물 총기가 없었다. 이때 능력을 발휘한 것이 그룹이었다.

"군과 경찰의 사전 승인을 받아서 (주)대우 특수물자부를 통해 권총을 수입했습니다. 민간 최초의 권총 수입인 셈이죠." 엄 박사는 그룹의 힘을 그때 느꼈다고 했다. 특히 엄 박사는 미국 한인사격연맹 안기홍 부회장을 은인으로 기억했다. "안 부회장과는 참 인연이 깊습니다. 월남파병용사인데 이민을 했죠. 미국은 세계 총포상이 다 모이는 곳이니 미국에 가서 총을 보려면 총포상이 제일 좋은 장소였습니다." 엄 박사가 미국 출장을 가면 안 부회장이 보스톤백 가득 권총을 담아 호텔 방으로 찾아와 펴 놓고 분해 조립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LA에 있는 민간 사격장도 단골로 찾는 곳이었다. 국방과학기술연구소 문상규 부장과 최영진 팀장과도 깊게 협조했다.

그렇게 1985년 K5 시제품이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자동차로도 7시간이나 걸리는 ADD시험장에 가서 극한 환경시험 등을 했다. 국가 시험장이라 민간에서 신청한 시험 수요는 주로 연말에 진행됐는데 강추위 속 야외 시험에서 꽁꽁 언 몸은 저녁 숙소에서 소주 한 잔으로 달랬다. 12발 기본 탄창이지만 15발까지 가능한 K5 권총은 유효사거리가 50m나 돼 강력했다.


미국 호텔방에서 권총 분해 조립을 하는 엄혁 박사와 안기홍(맨 왼쪽) 부회장. 엄혁 제공 미국 호텔방에서 권총 분해 조립을 하는 엄혁 박사와 안기홍(맨 왼쪽) 부회장. 엄혁 제공

시련을 쓰지만 열매는 달다

국산 9mm 권총 개발이 진행될 무렵 오스트리아에서 글록 권총이 탄생했다. 군용 권총집 등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총몸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획기적으로 가벼운 권총을 내놓은 것이다. 총기에 관한 자존심이 강한 미국도 글록 권총을 수입해 쓸 정도였다. 엄 박사는 글록 권총도 수입해 분석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수출하려면 장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발사구조를 트라이액션 기술로 접목해 세계 특허를 냈다"고 알려주었다.

"아쉽게도 그해 겨울 최초 기술 시험에서 실패 판정을 받았습니다. 충격이었죠. 덕분에 자동차 부품 담당 동기들은 다 과장으로 진급했는데 저는 미끄러졌습니다. 쓰라렸습니다." 한 해 재수를 한 K5 권총은 1986년 말 사용부대 특전사에서 운용시험 거쳐 당당히 합격점을 받았다. 1987년 드디어 양산 승인이 내려졌다.

"국가에서 권총 개발에 수고했다고 1000만 원의 보상금을 저희 팀에 지급했습니다. 당시 월급이 50만 원 정도였고, 아파트 한 채 값이 2000만 원이었는데 어마어마한 상금이라 깜짝 놀랐죠." 엄 박사는 그동안의 노고와 설움이 봄눈 녹듯 단박에 녹아내렸다고 했다.


개발 직원들과 동고동락한 지프차. 엄혁 제공 개발 직원들과 동고동락한 지프차. 엄혁 제공

미국 출장 때 권총 사격을 체험하는 엄혁 고문. 미국 출장 때 권총 사격을 체험하는 엄혁 고문.

부대 운용시험을 갔을 때 새벽 4시면 특전사 구보 소리에 놀라 잠이 깨곤 했다는 엄 박사는 1997년과 1998년 국방과학기술연구소 김인우 박사와 미국 애리조나주를 방문해 소화기 설계 기술 강습회 참여 등을 통해 차세대 소총에 관한 연구도 이어갔다. 후배에게 차세대 소총 개발의 바통을 넘기며 이직한 엄 박사는 과거를 회고하며 K5 권총 현장 시험 당시 후배 조무호 씨와 야외사격장에서 눈비를 맞아가며 하루 2000발의 권총을 쏘았고, 한겨울 K3, K4 개발팀과 같이 ADD시험장을 오가는 지프 안에서 오돌오돌 떨던 기억이 새롭다며 국방부 품질관리소 최중환 박사, 심철보 씨와 동고동락했던 추억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엄 박사는 권총 개발에 매진한 덕분에 권총 전문가가 되었다. "세계 각국의 권총을 연구하다 보니 지역에서 권총에 관한 한 저만큼 아는 분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경남경찰청에서 불법 권총을 수거하면 저에게 자문을 자주 했습니다." 엄 박사는 이런 공로로 1992년 경남경찰청장의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회사를 방문한 미국 총기 관련 연구소 관계자와 함께 선 엄혁(맨 오른쪽) 박사. 회사를 방문한 미국 총기 관련 연구소 관계자와 함께 선 엄혁(맨 오른쪽) 박사.

"동기 이병완 전무가 자동차 충격시험 촬영용 고속사진기를 빌려주어 자동 권총 발사 때 슬라이드의 고속운동 분석 시험에 유용하게 썼습니다. 앞으로도 엔지니어가 우대받고, 기술 인력이 귀하게 쓰이는 대한민국이 되어 SNT모티브가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도 한몫하는 좋은 회사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소망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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