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깨지는 믿음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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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진 편집국 부국장

전 국민 혼란 빠뜨린 카톡 불통
집적화·효율 맹신 허점 드러내
먹는 물·핵폐기물은 안전 위협
금리 급등에 ‘빚투’ 호된 뒷감당
불확실성의 시대… 귀찮더라도
믿음의 근거 냉정한 성찰부터

지난 15일 오후 지인이 요청한 정보를 공유하려고 카카오톡을 열었던 기자는 서버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전송이 되지 않는 상황이 잠시 당황스러웠다. 두세 번 시도해도 불통이 계속됐다. ‘통신사 네트워크 문제인가’하며 문자 메시지로 보내봤더니 전송이 원활했다. 잠시 후 뉴스에서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 관련 서비스가 먹통 사태를 일으켰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카카오톡뿐 아니라 포털 다음과 카페, 블로그 등 전체 서비스의 접속이 막힌 것이었다. 네이버도 이 화재로 일부 서비스 장애를 겪었다.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과 네이버 일부 불통 사태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왔다. 메신저와 뉴스, SNS, 쇼핑, 결제, 교통 등 거의 모든 일상을 포털이라는 플랫폼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됐다. 데이터센터 한 곳 화재로 엄청난 불통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전 국민 삶에 깊이 들어온 포털의 안전 관리는 생각보다 치밀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드러났다. 집적화해 편리와 효율을 추구한다는 것이 때로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통신 서비스가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무한정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이라 믿고 살지 않는가. 턱없는 믿음의 근거는 너무 허술했다.


메신저는 문자 메시지로 대체할 수 있고, 급하지 않은 소식은 좀 천천히 봐도 괜찮다. 훨씬 더 중요한, 시민 건강과 안전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사례가 최근 잇달아 발생했다.

부산시민 절대다수가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낙동강에서 지난여름 공업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의 물을 취수했다는 사실이 국정감사 자료로 확인됐다. 6월 17일부터 8월 18일까지 63일 가운데 총유기탄소량(TOC) 1~3등급 물이 물금·매리 취수장에 공급된 날은 불과 닷새뿐이었고, 폐수 수준인 6등급은 열흘, 나머지는 4~5등급이었다고 한다. 정수하면 괜찮다지만, 수질 나쁜 물을 고도정수처리 하느라 사용하는 약품 때문에 총트리할로메탄 같은 소독 부산물이 수돗물에 남는 문제로 이어진다.

게다가 반경 30km에 380만 부울경 지역민이 사는 고리·신고리 핵발전소에서는 고준위 핵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시설을 발전소 내에 짓겠다는 움직임이 확인돼 시민을 불안하게 했다. 유럽연합(EU)은 핵발전을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에 포함하면서 2050년까지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운영하겠다는 확실한 국가계획이 수립돼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핵폐기장을 경주에 짓는 데에만 꼬박 20년 걸렸다. 핀란드는 1983년 고준위 핵폐기물 영구처분 방침 수립 후 41년 뒤인 2024년에야 운영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영구 핵폐기장이 들어설 때까지만 모든 핵폐기물을 핵발전소 내에 보관하겠다’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설명은 지역민에게 ‘핵발전소가 곧 영구 방폐장’이라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경주 월성원전에선 사용후핵연료 보관 수조 바닥에 균열이 생겨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국정감사 지적에 ‘방사성 물질은 유출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한수원 해명을 듣다 보면 도대체 ‘원전 안전 신화’의 끝은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부동산과 주식에 빚을 끌어넣은 사람들은 요즘 급등하는 금리에 당장 생활비 긴축을 강요당한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불안한 세계정세로 물가마저 고공행진 중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이 2008년 이후 자국 경기 부양을 위해 시작했던 양적 완화의 후과는 이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 ‘스텝’을 타고 세계로 수출된다. 달러와 미국을 제외한 세계 경제가 무참히 밟히고 있다. 공급망에서 중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은 더 노골적이고, 동맹이나 개발도상국에 대한 고려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세계 평화와 자유·번영의 거점’이던 유일 패권국 미국이 각자도생의 선봉에 설 줄 누가 알았을까.

뭉치는 것은 흩어지고, 믿음은 깨지기 마련인가. 당황스럽더라도 턱없는 믿음의 근거가 부실했던 것 아닌지 찬찬히 돌아볼 때다. 무턱대고 믿어버리면 배신당하기 전까진 차라리 편하다. 반면 사실과 주장을 분리하고, 사실 여부를 철저히 검증해 그에 근거해 판단하는 일은 수고스럽다.

세계 경제나 국내외 정세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불확실성이 극으로 치닫는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불편하고 귀찮더라도 회의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 특히 정부가 관리할 수 있는 시민 안전과 건강 관련 정책에 대해서만큼은 헌법적 권리를 내세워서라도 정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마침 어제 16일은 부마항쟁 43주년이었다. 박정희 정권 붕괴를 촉발한 시민혁명이다. 영원할 것 같던 정권도 총칼 없는 시민혁명에 무너졌다.

내 주변 환경을 바꾸는 일부터 크고 작은 변화는, 그렇게 믿음에 대한 재점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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