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82. ‘내딛으면’ 틀린다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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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이제 작은 문을 살포시 열어 그 분투의 첫걸음을 내딛어보려 합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쓴 책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국어교육과 교수마저 틀리게 쓴 글을 보며 ‘우리말이 어렵긴 어렵구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문장에서 무엇이, 왜 틀렸는지 보자. 아래는 표준어 규정 제16항.

‘준말과 본말이 다 같이 널리 쓰이면서 준말의 효용이 뚜렷이 인정되는 것은, 두 가지를 다 표준어로 삼는다.(ㄱ은 본말이며, ㄴ은 준말임.)’

이어 이 ㄱ에는 ‘거짓부리, 노을, 막대기, 망태기, 머무르다, 서두르다, 서투르다’ 따위가 있고, ㄴ에는 ‘거짓불, 놀, 막대, 망태, 머물다, 서둘다, 서툴다’ 따위가 있다고 밝혀 놓았다. 한데, ‘머무르다/머물다, 서두르다/서둘다, 서투르다/서툴다’ 옆에는 ‘모음 어미가 연결될 때에는 준말의 활용형을 인정하지 않음’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즉, 본말 ‘머무르다, 서두르다, 서투르다’는 어미 ‘-게, -지, -고, -ㅂ니다’는 물론 ‘-어, -으면, -은’ 따위와도 결합하지만, 준말 ‘머물다, 서둘다, 서툴다’에는 ‘-어, -으면, -은’처럼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붙을 수 없다는 얘기.

그러니 ‘머물게/머물지/머물고/머뭅니다, 서둘게/서둘지/서둘고/서둡니다, 서툴게/서툴지/서툴고/서툽니다’는 돼도 ‘머물어/머물으면/머물은, 서둘어/서둘으면/서둘은, 서툴어/서툴으면/서툴은’은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엔 ‘머물러/머무르면/머무는, 서둘러/서두르면/서두른, 서툴러/서투르면/서투른’처럼, 본말로 바꿔 활용해야 한다.

이 규정은 ‘가지다’의 준말인 ‘갖다’로 활용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난감 두 개 가운데 하나만 갖어라. 네가 두 개 다 갖으면 다른 사람이 갖을 게 없을 테니까.

여기 나온 ‘갖어라, 갖으면, 갖을’은, 한국말 사용자라면 다들 어색해하실 터. 우리말 말무리(언중)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장난감 두 개 가운데 하나만 가져라. 네가 두 개 다 가지면 다른 사람이 가질 게 없을 테니까.

같은 맥락으로, ‘디디다’와 ‘내디디다’ 역시 준말인 ‘딛다, 내딛다’가 활용에 제약을 받는다. ‘딛어/딛으면/딛은/딛었다/딛으세요, 내딛어/내딛으면/내딛은/내딛었다/내딛으세요’ 꼴은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저 서문에 나온 ‘내딛어보려’는 ‘내디뎌 보려’라야 했던 것.

교수나 기자마저 틀리게 쓰는 표준어 규정이라면, 규칙은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를 생각한다면 이게 과연 제대로 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몰라서 틀리는 일은 없어야 할 터.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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