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닫힌 문과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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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며칠 전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 쪽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층에 아홉 가구가 살고 있어 다른 입주민들과 배달 기사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복도를 지나다니곤 하니까 누군가 실수로 문을 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는 가스렌지의 불을 끄고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에서 나는 소리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현관문으로 가서 손톱만한 렌즈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어떤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문밖의 누군가도 렌즈를 통해 안을 보고 있을까봐 살짝 소름이 돋았는데, 렌즈의 시야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먼 산과 고층건물들만 작은 동그라미 속에 갇혀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식사 준비를 하려는데 또 문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인터폰 화면을 눌러보았다. 화면 속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경찰관 두 명이 도착했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좀 미안하고 민망했다. 내가 괜히 그 낯선 이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고 의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장소를 잘못 찾아왔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인신뢰도는 매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대인신뢰도란 친밀하지 않은 타인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에 대한 척도인데, 대인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디폴트 값이므로 사회적 유대감은 낮고 갈등은 높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도 의심과 불신의 높은 담에 자주 가로막힌다.

스무 살 때의 일이 생각난다. 울타리와 바깥 대문이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 집에 혼자 있던 오전 시간이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내 걸뱅인데, 부탁 좀 합시다.” 문을 열었더니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라면 두 개를 내게 내밀었다. 배가 고픈데 조리할 곳이 없다며 라면을 좀 끓여달라는 것이었다. “밖에서 먹을 테니 끓여만 주시오.”라고 덧붙이면서. 나는 그에게서 받아든 라면을 정성껏 끓였다. 완성된 라면을 김치와 물과 함께 쟁반에 얹어 내어주자 그는 감사 인사를 하고 가져갔고 나는 안도하며 문을 닫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다시 와서 문을 두드렸다. ‘뭐지? 맛이 없다고 항의하려는 건가?’ 조금 겁을 먹은 채로 문을 열었더니 그가 말했다. “친구가 와서 말인데… 젓가락 하나만 더 얻읍시다.” 그는 내가 내민 젓가락을 받은 후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한참 후 문을 열어보았더니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렇게 사라진 후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때를 떠올려보면 좀 비현실적인 느낌이어서 혹시 신이 잠시 다녀간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때의 나는 지금만큼 남을 의심하지는 않았고, 쉽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래서 홈리스 아저씨에게 라면을 끓여줄 수 있었다. 어쩌면 잠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이었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말이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지금보다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적게 품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많은 문들이 열려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나쁜 뉴스들을 너무도 많이 접해버렸고 낯선 사람의 선의를 쉽사리 믿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이중 삼중의 보안장치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살아간다.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홈리스로 변장한 신을 만날 가능성도 모두. ‘어쩔 수 없잖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변명도 해보지만, 타인에 대한 의심과 선입견을 모두 내려놓고 문을 활짝 열어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었던 그때의 내 마음을 조금쯤은 되가져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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