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진부하지 않은 인간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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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소설가

내가 사는 곳에는 알프스 시네마라는 영화관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영화를 상영한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아이들에게 외출하겠다고 알리니 좋아한다. 내가 없으면 우리 집은 피시방이 된다. 큰아이가 관심도 없으면서 무슨 영화를 보러 가냐고 묻는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그게 뭐예요? 아이가 짜증을 낸다. 내가 독립 영화 제목이라고 알려주자 아이는 그건 너무 당연한 말 아니냐고 어이없어한다. 그리고 진짜 재미없겠어요, 라고 덧붙인다. 아이와 달리 나는 제목 때문에 오랜만에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뻔한 말이 너무 와닿아서였다.

영화는 실직 상태의 부부, 영태와 정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밀린 대출금 이자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쉽지 않다. 대리운전, 대타 강사, 배달 일을 해보지만 그들 앞의 구멍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주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불화하지 않는다. 함께 밥을 먹고 새우깡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신들이 마주한 현실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아이의 말처럼 재미없는데 그건 영화가 재미없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재미가 없어서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

소설을 쓰면 종종 진부한 표현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있다. 진부라는 단어는 생각이나 표현, 행동이 낡아서 새롭지 못한 것을 말한다. 과장해서 들으면 소설가 자질을 의심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소설은 새로운 인간성을 개척하고 우리가 익히 아는 것들을 낯설게 하고 다르게 보는 일이어야 하고 그것은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반대로 우리는 뻔한 것을 보는 것에는 지루함을 넘어 피곤을 느낀다.

영화는 현실의 지루함을 묘하게 끌고 간다. 이상하게 이 지루함은 상당한 긴장을 일으킨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관객에게 주입시킨다. 그것이 이 평범한 영화의 진부하지 않은 첫 번째 지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태도다. 뻔한 상황에 대해 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영태는 돈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 자주 중요한 게 아니라는 태도를 보인다. 사채를 쓴 정희에게 나한테 말은 하지, 라고 말하고 친정엄마가 갚아주셨다는 말에 놀라기보다는 덤덤하게 반응한다. 정희도 이 사태의 책임을 남편인 영태에게 떠넘기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학습된 무기력과 체념으로 보이지만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과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빌려준 카메라 대신 받은 돈이 그들의 카메라 값보다 많다는 것에 괴로워하던 영태는 다시 돈을 돌려준다. 자신에게 사기를 친 사람에게 영태는 똑같이 돈으로 벌하지 않는다. 그것은 돈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 되기이다. 하지만 다시 부모님 용돈을 그들 부부만 드리지 못해 형제들과 비교되는 상황에서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인간 되기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어찌할 수 없는 계절처럼 우리의 선택도 늘 그 어디에 있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영태는 우리의 질문에 답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인간적이어야 할까.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찍은 사진들 자체도 일종의 수사학적 장치다. 이 사진들은 그녀의 주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주고, 평이하게 설명해 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반대로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의 반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어떤 장치도 없이 보여줌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 되기의 진부함을 가장 특별하고 고귀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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