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2002년 월드컵으로 돌아가고 싶다

서준녕 기자 jumpjum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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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녕 편집국 부국장

월드컵으로 뭉친 2002년 기억 생생
카타르월드컵 개막 침체 분위기 여전
참사 추모 속 최선 다하는 모습 기대
국민 분열 노린 참사 악용에 분노
저급한 정치 진영 논리 극에 달해
월드컵으로 국민 저력 재연 기원

지난해 개봉해 평단의 호평을 받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란 독립영화가 있다. 영화 속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일하는 카드사 고객상담실에 소위 ‘진상’ 고객이 늘 전화를 한다. 타임머신을 개발했는데 과거로 돌아가서도 카드를 쓸 수 있냐고 매번 묻는다. 그가 가고 싶은 시기는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이다. 고객상담실 측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분류해놓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험난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습사원 ‘수진’은 그 ‘정신이상자’ 고객에게 왜 2002년으로 가고 싶냐고 진지하게 묻는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어깨동무하고 얼싸안고 춤추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다시 한 번 진짜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답한다. 그 대답에 ‘수진’은 “자기도 함께 데려가주면 안 되겠냐”고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한다.

분명히 2002년 여름은 국민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얼싸안고 춤췄던’ 그야말로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판타지 같은 날들이었다.


그 해 6월 18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거리응원을 마치고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걸어서 귀가한 기억이 생생하다. 길을 걷기 힘들 정도로 지나는 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며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붉은 옷만 입고 있으면 서로 손을 흔들고 인사하고 기뻐했다. 이탈리아전뿐 아니라 매 경기마다 붉은 대한민국 국민은 다함께 얼싸안고 춤추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붉은 옷을 입고 거리를 메운 인파가 너무 많아 믿기지 않았던 한 해외 언론사에서 파견 취재 기자에게 ‘합성 사진을 쓰면 어떻게 하냐’고 질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대한민국 국민의 저력을 보여준 것 같아 한껏 뿌듯했다. 2002년을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두 가지 벅찬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맞았다. 우리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선전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한 번 4강의 성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인 16강 달성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 최선을 다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 국민이 다함께 얼싸안고 춤추면서 하나된 2002년의 벅찬 기운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카타르 월드컵을 맞는 분위기가 여전히 무겁다. 다시 거론하기조차 힘든 이태원 참사 때문에 월드컵을 축제 분위기 속에 치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참사 후 거리응원을 취소했던 붉은악마는 토론 끝에 광화문 광장 응원은 하겠다고 밝혔지만 전국의 국민이 함께 열광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하나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달리 국민을 분열시키려는 정치권의 시도가 극에 달해 안타까움을 넘어 울화가 치민다. 겉으로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 말과 행동에서는 이미 추모가 사라진 지 오래다.

특히 희생자 명단 공개를 두고 정쟁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명단 공개 여부가 도대체 정치권이 왈가왈부할 사안인가? 장례식 조문객들이 힘든 유족 앞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예법 운운하면서 장례절차를 좌지우지하려는 ‘패악질’과 무엇이 다른가?

최근 수년 간 대한민국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 극렬한 대립을 해오고 있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과정에서 보았지만 양 진영간 주요 쟁점은 국가적 거사나 정책이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말이나 행동의 실수를 끄집어 올려 최대한 ‘싸가지 없는’ 말로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급기야 성직자들이 대통령이 탄 전용기를 추락시켜 사람들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지경에 이르니 저급한 진영 대결이 갈데까지 간 모양새다.

2002년에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그 해 4월 중국국제항공 129편의 김해 돗대산 추락과 6월의 효순·미선양 미군 장갑차 사고, 제2연평해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12월에는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대선이 있었던 해인 만큼 특정 사안이 선거과정에서 집중 거론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안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월드컵으로 단결된 국민적 기운이 훼손될 만큼 양 진영이 서로에게 ‘패악질’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2002년의 하나된 우리 모습은 이후 국가적 어려움을 이겨내는 단군 이래 최대의 에너지로 기억되고 있다.

20년이 흘렀다. 다시 한 번 우리 국민의 저력이 재연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정치권이 갈라놓으려는 국민 사이의 간극을 월드컵의 힘으로 단단하게 묶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하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모습에 국민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얼싸안고 춤추면서 다시 한 번 커다란 에너지를 모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준녕 기자 jumpjump@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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