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벤투의 빈자리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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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벤투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4년 4개월여의 한국 생활을 끝내고 13일 자정께 고국인 포르투갈로 떠났다. 대개 한국을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시킨 명장으로 그를 기억하겠지만, 그가 보인 성과는 그게 다가 아니다. 2018년 8월 대표팀을 맡은 뒤 벤투는 공식 A매치 57경기에서 35승 13무 9패를 기록했다. 승률이 61.4%다. 그리고 100골을 넣는 대신 내 준 골은 46골에 그쳤다. 역대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선 가장 좋은 성적이다.

성공 요인으로 벤투의 축구 철학을 드는 이가 많다. 그는 늘 “공격을 하든 수비를 하든 90분 내내 경기를 주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적어도 전술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팀들을 능가하겠다며, 투혼 외엔 달리 내세울 게 없던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꾸려 한 것이다.

벤투는 뚝심도 대단했다. 빌드업 축구가 그랬다. 다수 축구 전문가들은 벤투의 빌드업 축구에 회의적이었다. 아시아는 몰라도 세계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치러진 한·일전에서 연이어 참패하자 비난은 최고에 달했다. 벤투에게 오만, 독선, 무능, 패착 등의 단어가 쏟아졌다. 하지만 벤투는 흔들리지 않고 빌드업 축구를 밀어붙였다.

철학과 뚝심만으로는 벤투를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그의 철학과 뚝심의 원천에는 믿음이 있었다. 축구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스스로 믿음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종교적 믿음이 아니다. 월드컵 16강전을 치르고 벤투가 한 말이 있다. “난 우리가 하는 것과 우리 선수들을 믿으면서 나아갔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다. 벤투의 믿음에 선수들도 무한 신뢰를 보냈다. 벤버지, ‘벤투’와 ‘아버지’를 합친 말로, 선수들은 벤투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라니! 역시 16강 진출 확정 후 이재성 선수가 한 말이 있다. “감독님을 위해 뛴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는 감독님을 위해 한 발 더 뛰게 됐다. 우리를 믿고 보호해 주신 감독님께 보답하고 싶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리더십인가. 세상 흐름에 분명한 철학을 갖고 납득할 만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며 믿음을 구축하는 리더, 그리고 그런 그를 신뢰하며 헌신하는 구성원들. 이 경험은 축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자산이지 싶다. 벤투의 빈자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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