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책방골목에도 봄이 오는 소리
책 다섯 권 모양 ‘아테네 학당’ 보수동 르네상스 이끌까
‘책의 위기’가 시작된 지는 오래되었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출판사와 독자가 많아 ‘출판 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조차 서점 수가 지난 10년간 30% 감소했다고 한다. 롯데마트는 올해 초 25년 만에 종이 전단지를 전부 없애고 모바일 전단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사소해 보이는 종이 전단지의 종말, 어쩌면 먼저 온 미래일지도 모른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위기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70여 곳에 달하던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은 현재 31곳으로 줄었다. 서점 업주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달라지는 세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70년 전통을 얕잡아 봐선 안 된다. 혹한 속에서도 변화의 새싹을 틔우고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가 보았다.
■우리는 책방골목 서포터즈
“시간이 지나서/다시 나타난다면/나도 잊기 싫어 돌아간다고 넌 전해줘/Hey man 그래도 내 동넨데/Way 없진 않지 버텨 주길 바라/I say 2년 뒤에 나 다시 돌아올게/난 가더라도 여기에 추억은 그대로길 바라.” 보수동 책방골목을 걷다 공사판 가림막 위에 인쇄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만났다.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은 ‘보수동, 그 거리(In 책방골목)’ 노래의 가사 일부를 옮긴 것이다. 혜광고 학생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랩 스타일 노래다. 젊음이 발산하는 그 풋풋한 감성에 반해 플레이리스트에 바로 저장했다. 유튜브에 남겨진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수많은 어른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우리 친구들은 그들의 책방골목을 위해 무언가를 해냈다.” 고맙다 우리 친구들!
커피 향은 책 읽는 운치를 더한다. 아직 스페셜티 커피 ‘보수동 블렌드’를 맛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책방골목을 제대로 둘러본 게 아닐지도 모른다. 부산 중구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보수마루북카페와 건강북카페에서 보수동 블렌드를 한 잔에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동구 초량동에서 마리스텔라 커피를 운영하는 박성우·이정민 부부 바리스타가 지난해 보수동 책방골목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보수동 블렌드를 기꺼이 내놓은 덕분이다. 보수동 블렌드 원두도 100g에 5000원으로 너무 착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보수동 블렌드 개발을 제안한 혜광고 김성일 교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동주여고에 근무할 때 학생들과 함께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와보시집 두 번째 이야기〉를 발간했다. 혜광고로 자리를 옮겨서도 학생들과 〈보수동, 그 거리〉 시집을 출간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한 것이다. 동아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재홍 교수와 학생들은 지난해 12월 굿즈 개발과 QR코드 활용 등 MZ세대를 책방골목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이디어 발표회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아테네 학당, 핫플레이스 예감
“저게 뭐지?” 부산 중구 대청로 63 부근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이면 꼭 하는 말이다. 전에 못 보던 5층 높이(16m)의 거대한 책 다섯 권이 책장에 꽂힌 듯 나란히 세워져 눈길을 끈다. 책의 모양을 한 이 건물이 ‘아테네 학당’.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바로 옆에 위치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교황 개인 서재에 그린 벽화의 이름이다. 벽화에 등장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들고 있던 책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건물주이자 건설회사 대표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다(〈부산일보〉 2022년 10월 18일 자 등 보도). 오래된 서점 3곳이 또다시 사라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오피스텔 설계비까지 포기하고 리모델링으로 급선회한 건설회사 대표의 변심은 큰 화제가 되었다. 김대권 아테네 학당(신양건설) 대표는 “사정을 잘 모르고 건물을 매입했지만 상인들과 시민들이 책방골목 쇠락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목소리를 직접 듣고는 외면할 수 없었다. 수익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책방골목 되살리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지난 3년간 재개발이나 임차료가 올라 폐점한 서점은 12곳에 달한다.
2월 말 개장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 중인 건물 내부를 미리 둘러봤다. 역시나 ‘아테네 학당’ 벽화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1층에서는 우리글방 등 기존 책방 3곳이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카페와 문화공간이다. 서재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은 ‘독서 모임방’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벽화에 등장하는 아폴론·아테나신상,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흉상도 이미 만들어져 곧 설치될 예정이다. 카페에서는 시그니처 메뉴와 커피를 준비 중이었다. 책을 펼친 모양의 ‘보수동 책빵’은 사진만 봐도 인기 폭발을 예감하겠다. 예전 문인들이 좋아했다는 각설탕을 올린 진한 맛의 시그니처 커피 이름을 고민하길래 ‘밀다원’을 추천했다. 밀다원은 피난 시절 광복동에 있었던 다방이다. 밀다원에는 김동리, 황순원, 김말봉, 이중섭, 김환기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헤이온와이, 관광객 오며 살아나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관심이 다소 살아난 게 사실이다. 새롭게 책방골목을 주목하는 프랜차이즈까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 책방골목이 지금은 겨우 연명만 하는 수준을 지나 임종을 기다리는 상태라는 냉혹한 평가도 있다. 책방골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테네 학당 건물이 기괴하게 보인다는 말도 한다. 사업가 김대권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거리가 활성화되는 느낌만 들면 사람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몰려온다. 그것은 돈이 돌기 때문이다. 보수동 책빵이 잘 팔리면 빵 공장도 책방골목에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이 잘 되어서 그 영향을 주변에도 미치고 싶다. 책 모양 건물이 몇 개 더 만들어지면 책방골목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작은 시골이자 세계 최초 책마을인 헤이온와이를 떠올린다. 헤이온와이의 창시자 리처드 부스는 “사람들은 헤이온와이에서 어떻게 책을 팔 수 있겠냐고 묻곤 했다. 헤이온와이의 누구도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오면서 상황이 나아졌고, 책은 이 나라 문화의 완벽한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고 싶은 책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곧 동네책방을 연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머무는 평산마을에 가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화제로 대화하기도 했다. 공간이 사라지면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의 미래유산이다. 책을 세운 건물에 이어 책을 차곡차곡 눕힌 건물이 생기면 어떨까. 한글 디자인 건물도 좋겠다. 책을 테마로 한 게스트하우스나 맥주·와인을 한잔하면서 독서를 즐기는 북카페도 대환영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