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저평가된 삶은 없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권상국 경제부 산업팀장

고준위 방폐장부터 우주항공청까지
반지역 정서가 지역을 주눅들게 해
외부에서 바라본 부산은 오히려 저평가
자책하며 도시 저력 낮추진 말아야

고준위 방폐장 문제로 전국이 뜨겁습니다. 고준위 방폐장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쌓아두는 저장시설입니다. 강한 열과 방사능 때문에 10만 년 이상 인간 세상과 접촉을 차단해야 하는 게 사용후 핵연료지요.

원자력 업계가 이 난제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원전 내에 저장시설이 포화됐습니다. 부산과 가까운 고리원전만 해도 사용후 핵연료 포화율이 86%에 육박합니다.


수도권 언론은 연일 ‘한계 임박’, ‘지역 반발’ 등의 논조로 기사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요, 그 심각한 기사들 어디에도 고준위 방폐장을 어디에 둘지 따져보자는 기사가 없습니다. 은근히 원전 지역이 방폐장까지도 떠안아야 하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부산과 울산, 경남은 이미 수십 년간 원자력 발전의 리스크에 시달려 왔습니다. 사용후 핵연료까지 떠안겠다고 한 적도 없고요.

전기요금 폭탄이 떨어진 서울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친원전 정책으로 환원하길 잘했다’며 환영일색입니다. 연간 전력 자급률이 10%도 되지 않는 서울에서야 원전이 가동되든, 되지 않든 전기요금만 내려간다면 반가울 테지요.

그러나 전기요금 차등제 시행에는 입을 닫고, 방폐장은 나몰라라 하는 게 서울과 수도권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부산과 기타 등등’의 심정은 어떨까요. 상경한 형님 대신 정성껏 부모 봉양했더니 제사까지 떠안게 된 동생이 이런 심정일까요.

그 와중에 우주항공청을 둘러싼 또 다른 촌극은 더욱 입맛을 쓰게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정부는 연내에 경남 사천에 우주항공청을 개청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대뜸 업계에서 공약에 반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해 여론의 뭇매를 자초합니다.

국가우주정책센터가 전문가 100인을 상대로 우주항공청 입지 설문 조사를 해서 ‘행정부처와 정부연구기관이 모여 있는 대전·세종권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67%로 나왔다고 발표한 겁니다. 사실상 산업은행 갈등 ‘시즌2’입니다.

주무 부처인 과기부가 공약에 맞춰 우주항공청 입지를 사천으로 못 박고 특별법까지 입법예고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산하 기관이 입지를 되묻는 설문 결과가 진행했다는 건 항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슬 퍼런 정권 초기에 일개 과기부 산하 기관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용산에 보란 듯이 항명 했으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응, 그래도 나는 못 내려간다’는 공무원 조직 전반에 깔린 반(反)지역 정서가 그 뒷배라면 뒷배겠지요.

난데없이 산업팀장이 원전이니 대통령 공약이니 입에 올리는 건 한 자산운용사 대표를 만난 일이 떠올라서 입니다.

여의도에서 근무하던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굳이 투자처도 많고 자금 조달도 쉬운 서울을 두고 고향에 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부산이 우량업체가 많은데 저평가 되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여의도에서 전화만 돌려 뻔한 리포트를 올리기보다 부산에서 발품 판 기업평가를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산이 구닥다리 제조업 위주라 빠르게 바뀌는 산업 트렌드를 못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부산은 외려 알짜 기업이 충분한 도시였던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따져 보니 어쩌면 ‘노인과 바다’라는 부산의 현실이 여러 가지 리스크와 부정적인 평가가 뒤범벅 되어 태어난 허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리스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로 인한 저평가로 필요 이상의 자책을 해 온 건 아닐까요.

부산이 대외적인 평가에 좀더 당당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배짱도 생겨났습니다.

당장 고준위 방폐장 논란에서도 부산은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입니다. 양보하고 물러설 이유가 없습니다. 수익자 부담 원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 아니었습니까.

방폐장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면 응당 서울과 수도권을 포함해 전국의 모든 지역이 예비 대상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항공청을 비롯해 산업은행까지 공공기관 이전 이슈에서도 지역은 어깨를 펴야 합니다. ‘촌동네 욕심’이 아니라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대승적 판단입니다. 이전 기관 임직원에게는 따뜻한 포용력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나 지역을 폄하하며 이전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은 단호히 응징해야 합니다.

부산 사람이고, 부산 기업이고 저평가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