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우리에게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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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무조건적 이웃사랑은 신앙적 윤리 덕목
세속 사회에선 여러 상황에 맞춰 변질
상대 이용하는 논리는 아닌지 의구심도

‘이웃’을 생각한다. 사전에는 이웃을 ‘서로 접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집, 지역을 일컫는 말을 가리키는 사회 용어’로 정의하고 있다. 이 낱말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우리에게 제1의 윤리적 덕목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웃은 아픈 대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혹은 밉거나 떠나보내고 싶은 거추장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무조건 사랑해야만 하는 이웃인데도, 우리는 늘 조건을 다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은 ‘조건’을 전제로 한 수식어인 것이다.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강조되었지만 이를 말 그대로 실행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무조건적 이웃사랑을 얘기하면 우선 이런 생각들이 무조건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이다. 첫째, 저 사람이 내 이웃이 맞나 하는 생각이다. 둘째, 나는 평소에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셋째, 내게 해 준 것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웃의 경계를 따지고 들면 끝이 없다. 같은 아파트에서 이웃하면서 오랫동안 살았어도 인사 한번 나누지 않는 우리들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도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어 유·무형의 이익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마음의 이웃’으로 돌변한다. 사람이니까 얄팍한 감정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00년 전 유대 청년이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무조건적 이웃사랑을 지금 이 시대에도 ‘무조건적으로’ 적용해도 되는 덕목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를 안긴다. 때와 상황에 따라 보편적인 인간 윤리와 도그마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만 하는 말이 이웃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건을 달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을 한번 들춰 보자. 그런 말은 대개 성직자들이 자주 한다. 신자들에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성직자 계층을 뺀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들어 있는 셈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상대에게 받아내야 하는 것들을 다 받고 이제는 자신이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웃사랑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바야흐로 저 자신이 실천할 차례가 다가오자 이웃을 들먹이며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사랑이라는 말에 담긴 변화무쌍한 상황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의 독단이길 바라지만, 그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일수록 무언가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랫동안 서먹했거나 심하게는 증오를 보였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환대’의 포즈를 취할 때가 위험한 법이다. 환대 또한 조건을 달지 않는 환영이다. 그러니 이웃사랑은 자연스럽게 환대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환대하거나 이웃사랑을 펼치는 경우는 거의 보기 드물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특정한 전제 없이 노출해 보여 주거나 가져가게끔 하는 윤리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본을 다녀온 대통령 일행이 일본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며 자찬(自讚)하는 모습을 보았다. 경색된 한·일 관계에 물꼬가 트였다는 논리다. 환대받은 일행들은 나름 자부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한편, 많은 국민(‘대다수’는 아니겠지만)은 대통령의 방일 회담을 두고 ‘굴욕’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환대를 받았다는 논리와 굴욕을 당했다는 논리 중 어느 것이 합당한지 이 자리에서 가릴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상대편에 환대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속한 집단의 환대를 받지 못하는 모양새가 기괴할 뿐이다.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해야 한다는 논리와, 진정한 사죄나 합당한 후속조치는 물론 그럴 의향조차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보인 저자세는 굴욕이라는 극단적 두 양상이 부딪친다.

우리는 이렇게 해법이 묘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일본이라는 ‘이웃’이 그간 우리에게 보였던 태도와 행위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그 나라가 과연 우리 이웃이 맞는지 생각해 본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상당히 밀접하고 가까운 나라임은 틀림없지만, 우리 집단무의식에 자리 잡은 일본은 언제든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는 나라였다. 우리에게는 ‘대타자’(大他者·Autre)로 놓인 ‘일본’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인 개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일본이 이웃은 맞지만 지금까지 보였던 행태로 봐서 결코 환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이웃으로 돌아가자. 이웃은 여러모로 인접한 사람이나 장소지만, 그것이 번번이 내게 훼방을 놓거나 억지 논리로 가진 것을 요구할 때 진정 ‘이웃’의 처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발목을 잡고 딴지를 거는데도 정언명제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만 하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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