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21세기정치학회와 니미츠항공모함 승선
'그라울러' 실은 미 핵항모 6개월 만에 다시 부산 온 이유
북한이 전술핵탄두 ‘화산-31’을 전격 공개하고 핵 선제공격 시사 등 고강도 위협을 강화하던 지난달 28일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함(USS Nimitz·CVN-68)이 부산 해군 작전기지로 입항했다. 니미츠함은 약 10년 만이지만, 미 해군 항모의 방한은 6개월 만이다. 미국 항모가 이처럼 짧은 간격으로 국내 입항한 전례는 찾기 어렵다. 니미츠함을 기함으로 하는 미 해군 제11항모강습단도 한반도에 전개됐다. 해군 작전기지 안벽에 정박 중인 니미츠함에 입항 다음날인 29일 21세기정치학회 소속 정치학자 10여명과 함께 승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선을 승리로 이끈 체스터 니미츠 제독 얼굴이 그려진 복도와 계단을 이리저리 올라가 선내 갑판에 도착했다. 행사장으로 주로 사용하던 선내 갑판에는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조종한 F/A-18 슈퍼호넷 전투기와 EA-18G 그라울러(Growler) 전자전기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그라울러’
2014년 미국 핵추진 항모 조지워싱턴호 취재 등 미군 항모에 2~3차례 올랐던 기자로서도 EA-18G 그라울러 전자전기를 눈앞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슈퍼호넷 전투기 조종사로 취재진 안내 당직을 서고 있던 미 해군 조종사에게 “그라울러를 전시한 목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이틀 전까지 작전에 투입했는데, 도색 상태가 양호한 전투기를 골라서 배치했다”고 답변을 비껴갔다. ‘으르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라울러는 슈퍼호넷을 개조한 미 해군의 유인 전술용 전파방해무기체계이다.
실전 투입은 2011년 3월. 이탈리아의 아비아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5대의 그라울러가 리비아군 방공망을 무력화했다. ‘하늘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라울러는 전쟁 초기에 날개 끝에 광대역 수신기로 적의 전파를 수집, 날개와 동체 하부에 장착된 5개의 AN/ALQ-99 재밍 포드로 고출력 방해전파를 송신해 적의 방공망과 지휘통신망을 먹통으로 만들고 암람 미사일을 쏘아 길을 튼다. 그라울러 전자전기 편대 배치만으로도 상당한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도 2013년 12대의 그라울러 도입을 추진했지만, 미국이 수출승인을 거부한 기종이기도 하다. 국방 전문가들은 “5~6대의 그라울러가 선도하는 공격 편대는 북한 평양의 4중 방공망과 미사일 기지를 연결하는 지휘통신망을 순식간에 파괴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에 대한 미군의 ‘무언의 경고’로 해석되는 장면이었다.
■어떤 영역에서도 대응 가능
축구장 3개 넓이인 비행갑판에는 함재기 이착륙 과정에서 길게 긁힌 자국들이 있었다. 비행갑판에는 F/A-18 슈퍼호넷 전투기와 E-2 호크아이 조기경보통제기, EA-18G 그라울러, 대잠수함작전용 MH-60R 시호크 해상작전헬기 및 MH-53 페이브로 특수전헬기 등 수십 대가 날개를 접어 올린 채 앉아 있었다. 미국이 ‘떠다니는 군사기지’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 하나의 전력을 갖춘 니미츠함을 통해 ‘확장억제(핵우산) 실행력’을 강조하는 듯했다.
갑판에서 만난 미 해군 장교에게 “F-35 스텔스 전투기는 왜 보여주지 않느냐. 군사 기밀이냐”고 묻자 “비밀인지 잘 모르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대신 “동급 기종의 전투기라도 정비 정도에 따라 전투력이 확실히 달라진다”면서 항공기 정비 노하우에 대해 자랑했다. 제11항모강습단장 크리스토퍼 스위니 제독은 전날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다양한 무기체계에 대응할 다양한 수단이 있고, 어떤 영역에서도 공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니미츠 군함 기호인 CVN-68이 새겨진 함교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 21세기정치학회 소속 정치학과 교수들과 언론사 기자들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니미츠함과 함께 전개된 미 해군 이지스 구축함과 상륙함 등에 실려 있을 무인무장헬기와 무인함 등 비밀 자산에 대한 궁금증마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한·미·일, 중국 코 앞에서 연합 훈련
니미츠함은 부산항을 출항해 3~4일 남쪽 공해상에서 한국·미국·일본 3국 연합 대잠수함전 훈련과 수색구조훈련에 돌입했다. 미국 주도의 3국 연합 대잠수함전 훈련은 작년 9월 이후 6개월, 수색구조훈련은 2016년 이후 7년 만이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해 핵무인수중공격정 ‘해일’ 등 북한 수중 위협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애초에 설명됐다. 하지만, 대잠전 훈련 구역이 북위 30도 36분 밑으로 내려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로부터 약 300해리(555㎞) 안까지 근접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이 상당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센카쿠 열도는 일본과 중국 간 영유권 분쟁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미군이 대중국 견제성 메시지를 보냈다는 해석마저 제기된다.
■격랑의 한반도 어디로 가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미연합훈련 기간 중 동선을 감춘 채 도발을 자제했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달리 숱한 미사일 발사와 실물 핵탄두 공개 등 핵전술 고도화를 과시하면서 강 대 강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또한, 북한을 두둔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을 견제하려는 중국이 한·미·일과 갈등하는 양상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미·중 패권경쟁과 북핵 위협이 거세지면서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이 빨라질 전망이다. 일본은 정보수집위성 8기를 운용 중이며, 글로벌호크 고고도 정찰기는 물론 다양한 ISR(정보·감시·정찰) 기체를 통해 동북아시아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국은 북한 잠수함의 SLBM 등 수중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미국의 ISR 자산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이다.
또한, 북핵 위협 대응이라는 한국의 이해, 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해 일본 오키나와섬 인근 난세이제도에 군사 거점과 동맹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 과제를 이루려는 일본의 입장이 묘하게 한반도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가 한·미·일 해양 세력 대 북·중·러 대륙 세력의 전선으로 복귀한 모양새다.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공언한 윤석열 정부는 그 범위를 북한 이슈에서 지역 및 글로벌 문제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오는 26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니미츠함을 함께 승선했던 21세기정치학회 조경근 고문(정치학 박사)은 “미국이 섬세한 공공외교를 세밀하게 펼치면서 미국에 대한 (군사안보적) 신뢰를 심어주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면서 “다만 한국이 한·미·일 안보협력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국·러시아와 멀어지는 외교적 손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으로서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가 북한의 핵 도발에 대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중국에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격랑 속으로 서서히 접어드는 한반도,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한 듯하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