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느티나무, 자연의 선 그대로 조각이 되다 [전시를 듣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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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수 조각전 ‘물질의 서사’
5월 30일까지 데이트갤러리
“나무가 천천히 깎기 가르쳐 줘”
“아이처럼 놀 때 새로움 나와”

부산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리는 최인수 조각전. 버려진 느티나무로 만든 ‘장소가 되다’ 연작이 전시되어 있다. 오금아 기자 부산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리는 최인수 조각전. 버려진 느티나무로 만든 ‘장소가 되다’ 연작이 전시되어 있다. 오금아 기자

‘우면산 딱따구리/딱딱딱딱 따르르르/딱딱딱딱 따르르르/온산이 울린다/그 소리 한데 모여/파놓은/작은 구멍 하나.’

최인수 조각가는 서울 서초구 우면산 인근에 산다. 그는 산 중턱에 올라가면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고 했다. “소리가 울리는 것이 음악 같았어요. 소리는 확산되는데 남는 흔적은 결국 자기 집을 짓는, 작은 구멍이죠.”

최 작가는 서울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독일 칼스루헤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최 작가는 1992년 47세의 나이로 제2회 토탈미술대상을 수상했다. 이우환 작가가 최종 심사를 맡은 수상작의 제목도 ‘먼곳으로부터 오는 소리’이다.

흙덩어리를 굴려 만든 형태를 쇠로 떠낸 작품으로 유명한 최 작가는 서울대 교수를 퇴직하고 난 뒤 나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가졌다.

“근처 공원에 있던 죽은 나무를 우리 집에 실어다 주더군요. 나무 둥치에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원심력에 의해 균열이 간 것이 보이더군요.” 그는 따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결을 따라 나무를 잘라 보기로 했다. 자른 면을 부드럽게 다듬어 자연이 만든 곡선을 살리는 작업. 최 작가는 “내가 자연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길게 잘라낸 나무 조각 옆면에서 나이테가 드러났다. 작가는 다시 이 나이테를 따라 끌로 한 층을 깎아냈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이게 나무다 싶었어요. 조각가는 재료를 바꾸면 생각이 바뀐다고 해요. 충실하게 나무를 따라가며 다듬으니 새로운 생각이 나오더군요.”

최인수 '장소가 되다-11'. 데이트갤러리 제공 최인수 '장소가 되다-11'. 데이트갤러리 제공
최인수의 작품에는 벌레의 서명과 작가의 서명이 같이 새겨져 있다. 오금아 기자 최인수의 작품에는 벌레의 서명과 작가의 서명이 같이 새겨져 있다. 오금아 기자

최 작가가 나무 작업을 시작한 지 8년이 됐다. 그는 중국 장재의 철학을 언급하며 ‘형제 같은 나무’를 톱으로 거칠게 다룰 수는 없기에 작업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나무가 나에게 ‘천천히 까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아요. 세속적 출세가 필요한 나이도 아니고, 몇 작품을 내 인생과 바꾸는 것인데 천천히 까자고 생각해요.” 70대 후반인 최 작가는 끌질이 힘들기는 하지만, 직접 나무를 깎으며 사유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최인수 개인전 ‘물질의 서사’에서는 이 나무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버려진 느티나무를 이용한 ‘장소가 되다’ 연작이 전시장에 드문드문 세워져 있다. 최 작가는 한 작품 아래쪽을 보라고 했다. “벌레 먹은 부분이 보이죠. 자연이 만든 나무에 벌레가 일단 손을 대고, 내가 손을 댔잖아요. 그래서 벌레의 서명과 내 서명이 같이 섞여 있어요.”

최인수 ‘그것으로 부터-바’. 데이트갤러리 제공 최인수 ‘그것으로 부터-바’. 데이트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에서는 최 작가의 드로잉 작품도 같이 볼 수 있다. ‘나오다가 숨다가’는 종이 위에 흑연으로 아주 느리게 선을 그린 것이다. “천천히 그리면 그 진동이 심장으로 연결돼요. 선이 붙어버리면 떡이 되기 때문에 실패작이 많이 나와서 종이에 미안한 작업이죠.” 골판지로 물감을 찍어내는 작업을 소개하며 작가는 “어린아이처럼 놀 때 자기도 모르는 것이 나온다”고 했다.

“제 작업에서는 놀이가 무지 중요해요. 가장 단순한 기법, 재료에 가장 잘 맞는 기법. 최초의 기법이 뭔가를 찾아왔던 것 같아요.” 무위.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최인수 작가의 작품에 있다. ‘물질의 서사’전은 5월 30일까지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린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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