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삶의 고갱이와 인연의 무게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경주 남산에 올랐다. 남산을 향해 절을 하면 기도하는 것과 매한가지라 하니 불국토가 예서 멀지 않다. 오죽하면 일연이 서라벌을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했을까.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는 절들과 기러기 떼처럼 줄지은 탑들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삼릉주차장에서 상선암을 거쳐 금오봉에 올랐다가 용장사곡 삼층석탑, 설잠교를 지나 용장마을에 이르렀다. 산정에 이르는 길에서만 예닐곱 번 걸음을 멈추었다. 바위에 새긴 부처와 보살상의 미소가 자주 발목을 잡고, 아직 피지 않은 산수국 향기를 부르는 산새의 울음이 참꽃만큼이나 짙었던 까닭이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돌덩어리에 이미 들어있는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조각가의 임무라 했다. 그는 대리석 덩어리에서 성모와 예수, 다비드, 모세를 보았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금세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작품이다. 성모의 얼굴에 가득한 비탄의 심정마저도 오롯하게 새겼다. 삼릉계곡의 마애관음보살상도 당장 바위를 뚫고 사바세계로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돋을새김으로 얼굴의 입체감을 살리고 아래쪽은 흐릿하게 표현했다. 신라의 석공도 바위 속에 깃든 보살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대리석보다 단단하고 거친 화강암의 결을 찾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보살의 입술에 붉은빛마저 감돌게 할 수 있었을까.
남산에서 만난 부처와 보살상은 온전한 모습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거친 비바람에다 세월의 풍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역사의 격랑을 거친 내력을 어찌 가볍다 하겠는가. 두상이 훼손된 불상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온화한 표정이나 엄숙한 분위기만큼은 오롯하다. 나무며 새들이며 풀꽃, 동해를 거쳐온 바람까지도 품어 마침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실로 장엄한 이 불국의 풍경 속에서 어찌 우리 삶과 인연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사월의 봄날, 그렇게 남산의 심연에 깃들었다.
살아가면서 남산의 불상과 같은 굴곡을 겪지 않은 날들이 어디 있으련만 만남과 이별, 비탄과 고뇌를 마주하면서 끝없이 깎이고 또 닳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석공과 미켈란젤로가 돌덩어리에서 부처와 예수를 발견하고 빚었듯이, 칡줄기처럼 어지럽게 얽힌 세계에서 삶의 고갱이를 캐내야 하지 않을까. 인연도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인드라망이라 한다. 삼라만상이 한없이 넓은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하찮은 인연이란 있을 수 없다. 불상들이 나무와 새를 품듯 인연을 소중하게 지킬 일이다. 그물코마다 맺힌 보배 구슬은 찬란하게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고 하지 않는가. 돌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불심을 새긴 석공의 마음으로 촘촘한 인연의 매듭을 생각했던 그 봄날의 산행,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