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가입자 처형” 한마디에 민간인 수천 명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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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국민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남로당 약화·좌익세력 척결 취지였지만
경찰, 할당량 채우려 일반인 대거 등록
전쟁 터지자 구금… ‘비극적 학살’ 시작
5129명 희생 추정, 경남 1551명 최다
예산 부족 이유 DNA 시료 채취 못 해
희생자 유해 수십 구도 컨테이너 보관

경남 진주시의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를 모신 컨테이너 임시 안치소 내부. 숱한 노력 끝에 유해를 발굴하고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DNA 검사를 통한 신원과 유족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경남 진주시의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해를 모신 컨테이너 임시 안치소 내부. 숱한 노력 끝에 유해를 발굴하고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DNA 검사를 통한 신원과 유족 확인을 하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왜 조사도 안 하고 억울하게 잡아가서 민간인을 학살합니까. 시체를 바다에 빠뜨리니 찾지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74년을 살면서 아버지를 한 번 불러보고 싶어도 못 불렀습니다.”(김점선 씨·경남 통영시·‘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집’ 일부 발췌)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건 군인만이 아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가 시작되고 유족회가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70여 년이 흘러도 유족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이 자식에게도 전달돼 정부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부는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실제 취지는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을 약화시키고, 좌익 성향 인사들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무원과 경찰은 각 경찰서에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까지 무분별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각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 통첩을 보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예비검속돼 경찰서나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본인이 왜 구금됐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다수였다.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들이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했다는 보고가 정부에 들어갔다.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를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고, 6월 하순부터 비극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유해 발굴 현장. 경남신문 제공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유해 발굴 현장. 경남신문 제공

■이유도 모른 채 목숨 잃은 가장들

경남에서는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정부가 행정권을 유지해 보도연맹 학살 피해가 컸다. 진실화해위 1기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 사건의 희생자로 밝혀졌거나 추정되는 수는 전국적으로 총 5129명이다. 이 중 경남이 1551명으로 가장 많다. 진실화해위 2기가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서는 경남 관련 진실 규명 신청은 819건에 달했다.

유족회 등에 따르면, 전쟁 전후 창원에서만 민간인 2300여 명이 재판 없이 불법으로 학살 당했다. 이 가운데 마산형무소에 수감됐던 국민보도연맹원, 정치사범 등 1681명이 희생됐다. 그중 4차례에 걸쳐 717명 이상이 마산 괭이 바다에 수장됐다. 이런 사실은 1960년 6월에 열린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한 희생자 유족이 “당시 마산의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가 1681명”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인됐다. 또 2010년 발표된 진실화해위 1기 결정문에서도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혹은 인민군에게 동조한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예비검속을 당한 민간인이 살해된 사실이 언급됐다.

진주의 피해도 컸다. 진주형무소는 서부경남 일대에서 검속된 많은 국민보도연맹원과 이미 수용돼 있던 수감자로 포화상태였다. 1950년 7월 29일 북한군은 진주 방어선까지 진격했고, 30일 밤부터는 진주 서쪽 4km 지점까지 들어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진주는 그렇게 북한군에 점령 당했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진주가 점령되기 전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 학살했다. 북한군이 진격해 오던 하동과 산청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진주경찰서에서 근무한 김병두 씨는 “전쟁 발발 후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원 처형이 시작됐다. 입수된 명단을 가지고 면 단위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지서에 소집한 뒤 특무대가 내려가서 처형했다”고 진실화해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정 모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보도연맹원 소집 통보를 받고 경찰서로 나갔다가 구금된 후 감옥에 500명 넘게 갇혀 있었다. 감옥에 방이 10여 개 있었는데, 방마다 꽉 차 우리는 감옥 유도실에 갇혔다. 그곳에서 10여 일을 굶고 지내는 바람에 몸에 힘이 없어졌다. 이후 100여 명이 2명씩 포승줄로 묶여 차에다 실렸다. 버스가 꽉 차면 한 차에 순사(경찰관) 7명이 탔다.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는 눕혀 놓고 총을 쐈다.”


지난 3월 진주시 명석면사무소에서 열린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 발굴 개토제. 경남신문 제공 지난 3월 진주시 명석면사무소에서 열린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 발굴 개토제. 경남신문 제공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회원들은 2021년 4월 경남도청 앞에서 보도연맹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경남신문 제공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회원들은 2021년 4월 경남도청 앞에서 보도연맹 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경남신문 제공

■여러 차례 발굴에도 신원 확인 하세월

늦었지만, 진실화해위가 주도하는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진주에서는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 주도로 발굴이 진행됐다. 2014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유해 39구, 2017년에는 38구를 발굴했다. 2021년에는 관지리 화령골에서 유해 16구를 수습했다. 지난해 집현면 봉강리에서도 유해 35구를 발굴했다. 올해 진행한 발굴에서는 29구를 확인했다.

하지만 발굴된 유해 중 유족과 신원이 확인된 사례는 없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DNA 시료 채취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희생자 유해는 보관 시설이 없어 컨테이너에 보관 중이다.

한국전쟁전후진주지역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정연조 회장은 “유해를 보관할 납골당이나 추모관이 없어 컨테이너에 보관하고 있다”며 “정부는 세종시의 추모공원에 보내라고 하는데, 유족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예산 문제로 진주의 희생자 DNA를 채취할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깝다”고 한숨을 쉬었다.

경남에서 유해 발굴이 가능한 지역은 총 8곳이다.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 산 134-6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산 241-1(용산고개2) △용산리 산 425-1(용산고개4) △명석면 우수리 산 84 △진주시 호탄동 산 93-2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산 285-5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372-2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산 154-2·154-3·157다. 모두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관련됐다.

아울러 마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산 24 일대에서는 토지 소유주 거부로 발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이곳은 유해 발굴 가능지이지만, 토지 소유주가 거부해 진행이 힘든 상황이다. 강제할 근거가 없다”라며 “만약 소유주와 협의된다면 언제든 신속하게 발굴을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준혁 경남신문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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