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영화 도시 부산 ‘천일야화’로 꽃피울 수 있어요”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 양성영 씨
사진작가 꿈꾸다 로케이션 입문
헌팅 포함 225편 부산 촬영 지원
주택가 주차된 차량 500대 빼고
눈 대신 소금 깔고 경계 서기도
감천마을도 영화 등장하며 알려져
‘부산행’ 흥행 동남아서 부산 인기
‘블랙 팬서’ 찍은 도시라면 알아줘
도시 매력도 높아지면 가 보고 싶어
해안도로 제대로 담은 영화 나왔으면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영화 ‘국제시장’을 찍고 있다. 부산영상위원회 제공
부산영상위원회는 1999년 12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됐다. 지금까지 부산영상위가 촬영을 지원한 영화 및 영상물이 1800편에 달한다니 과연 ‘영화 도시’ 부산이라고 부를 만하다. ‘메이드 인 부산’ 영화 만들기 최전선에 선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보상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엔딩크레딧에 오른 자신의 이름 석 자 뿐. 하지만 그게 그렇게 뭉클한 순간이란다. 부산영상위 양성영 차장은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다. 그를 만나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가 부산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봤다.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부산영상위원회 양성영 차장. 부산영상위원회 제공
-로케이션 매니저는 어떤 일을 하는가
▲영화나 영상물을 만들 때 촬영 장소에 관한 모든 업무를 전담한다. 먼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가상의 장소를 현실에서 구현할 가장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후보로 만든다. 그 후보 장소에 대해 감독 등 주요 스태프와 의논해 최종 결정하면 촬영 전후로 이뤄져야 할 현장 상황을 정리하고, 해당 장소 촬영에 대한 인허가 취득, 촬영지 인근 시민의 협조 체계를 구축해 촬영을 진행한다. 촬영이 끝나면 촬영 전과 같은 상태로 원상복구해 향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이 과정에서 도로 통제를 계획하고, 위험한 촬영 시에는 안전대책을 검토한다. 주민들에게 불편을 줄 경우에는 주민 설명회도 연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자격이 있다면
▲로케이션 매니저에게는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을 해서 현장을 카메라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대학 시절 ‘사진은 사상이다’는 최민식 선생의 강의를 듣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거리, 사람, 건물, 자연 등 부산의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부산영상위 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다. 평소 촬영했던 부산의 거리와 자연 등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제출해서 좋게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부산영상위에는 로케이션 매니저가 6명이 있다. 기무라 다쿠야가 나오는 ‘히어로’나 ‘착신아리 파이널’ 같은 일본 영화는 주로 내가 맡았다. 예전에 동국대 불교학과 나온 분은 ‘달마야 놀자’ 촬영이 들어오자 무조건 자신이 맡겠다고 한 뒤 정말 열심히 했다.
-새로운 장소는 어떻게 발굴하는가
▲과거에는 무조건 발품을 팔았다. 새로운 건물이나 공간이 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현장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명함을 건네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지도와 전화번호부에만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사전 조사를 충분히 한다. 구글·네이버·다음의 위성지도 항공사진과 로드뷰를 살펴보고, 방문객들의 리뷰와 사진을 참고한다. 장소가 결정 나면 전화나 이메일로 사전답사 협의를 한 후 일정을 잡아 방문한다. 현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면 괜찮을 공간을 카메라에 담고 스태프들의 업무 동선과 주차공간까지 파악한다. 평소에도 로케이션 매니저는 자신만의 탐험인 ‘헌팅’을 한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공간에서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지 상상한다. 공원을 걷다가도 여기서 데이트나 마약밀매를 하면, 범죄가 벌어지면, 어느 장소가 좋을까 생각한다. 장소를 볼 때마다 계속 상상을 한다.
-지금까지 담당한 작품은 얼마나 되는지. 일화가 있다면
▲전담해서 지원했던 작품은 헌팅을 포함하면 총 225편, 그중 94편의 부산 촬영을 지원했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땅과 건물을 보러 다니니 투기꾼으로 곧잘 오해받는다. ‘친절한 금자씨’를 찍을 때는 눈 내리는 주택가가 설정이었다. 주례여고 앞 주택가 골목이 배경이었는데 부산에서는 눈 보기가 힘들다. 도로와 주변 주택 옥상에 눈처럼 보이기 위해 수십 트럭 분량의 천일염을 뿌렸다. 그때 촬영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소금을 살살 퍼가서 그걸 막느라고 고생했다. 금자 씨가 집을 드나드는 장면의 촬영을 위해서는 인근 주택가에 주차된 차량을 모두 다 빼야 했다. 그게 무려 500대에 달했다. 2000가구에 통지문을 돌리고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그 당시 ‘대장금’으로 인기 절정이었던 이영애 씨가 이 동네에 와서 촬영하니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결국 주민들의 협조를 끌어냈고, 인근 초등학교를 임시주차장으로 활용해서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부산에서 영화를 많이 찍으면 부산에 어떤 점이 좋은가
▲도시에 스토리가 많이 만들어진다. 아랍에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재상의 딸이 살기 위해서 하루에 한 번씩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나. 그러면 왕은 너무 재밌어서 죽이기를 날마다 미룬다. 부산이 수천 개의 영화에 나오면 수천 개의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제는 ‘부산행’, 오늘은 ‘블랙 팬서’, 내일은 ‘파친코’라는 식이다. 부산이 악마가 되었다 천사가 되었다 하면, 사람들은 부산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궁금해진다. 아시아의 천일야화를 만들어 내는 곳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게 홍콩이었는데, 표현의 자유가 막히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K팝·K컬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와 보는 게 꿈이 되었다. 영화 ‘부산행’이 나오고 나서 동남아 사람들이 그렇게 한국을 좋아한다. 미국 문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블랙 팬서’ 찍은 도시라고 하면 부산을 다시 본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영화는 부산을 좋아하게 만들 스토리 자원이다. 천 가지 이야기가 있는 부산이 가능하다. 도시 매력도가 높아지면 그 도시에 가 보고 싶어진다.
로케이션 장소에서 관광 명소로 이어진 사례는 꽤 많았다. 감천문화마을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히어로’에 등장하며 조금씩 알려졌다. 이후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었고, 예술가들의 창작소가 들어서며 유명해졌다. 호천마을은 드라마 ‘쌈마이웨이’를 촬영하면서 명소가 되었다. 영도 흰여울 마을은 ‘변호인’ 촬영으로 떴다. 기장 아홉산숲은 ‘군도’와 ‘대호’, 죽성 드림성당은 드라마 ‘드림’을 촬영해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양 차장은 부산은 해안도로가 정말 멋지게 형성되었는데 아직까지 부산의 해안도로를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호천마을→민주공원→구덕터널→엄궁동 부산건축자재 판매단지 앞 강변길→ 을숙도·다대포 해안길→송도해수욕장→남항대교→영도→부산항대교→광안대교→수영강변대로→APEC 나루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추격 장면 촬영에 최고다. 산복도로, 바다, 강, 공단, 원도심과 미래도시의 느낌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 영화사에 남을 멋진 장면이 탄생할 것 같다는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의 예감이다.
<로케이션 매니저가 말하는 부산 여름 여행지>
양 로케이션 매니저에게 여름 여행지를 물었더니 역시나 해수욕장이 먼저 나온다. 해운대, 송정, 광안리, 송도, 일광, 임랑, 다대포, 영도 감지해변, 울주 나사리까지 ‘해수욕장 도장 깨기’를 해 보면 어떨까. 산으로 간다면 아홉산, 금정산, 장산, 황령산을 떠올린다. 전문가답게 뜨거운 한낮을 피해 새벽 해뜨기 전이나 심야에 헤드랜턴을 장착하고 가 보시란다. 북구 만덕동 석불사에 가면 경주 남산에 가야 볼 수 있는 장면을 부산에서 느낄 수 있다. 아미산 전망대에서 노을을 보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시기·질투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여름에는 좀 덥지만 낙동강 생태공원도 언제나 좋은 곳이다. 영화 전문가답게 영화 관련 시설도 추천했다.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는 에어컨이 빵빵해서 시원하고, 책상에 앉아서 보는 수영강 뷰가 일품이다. 이곳에는 총 4만 종에 달하는 자료가 있다. 특히 시네마테크부산의 역대 기획전 관련 자료 및 부산국제영화제 역대 출품작 자료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여기서 영화사에 남는 영화 보거나 영화 음악을 LP로 들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란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