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현실판 조커는 없다
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불특정 다수 향한 각종 범죄·테러
시간이 갈수록 만연해지는 세상
악독한 인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외로움 낳는 사회구조적 문제
분노에 무너지는 악의 평범성 주목
감정 다루는 국가적 시스템 필요
영화 ‘조커’는 성공한 영화다.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미치광이를 주목받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비행 청소년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아서’를 지켜봤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내면의 분노가 어떻게 한 인간을 잡아먹는지 그 처절한 과정에 숨을 죽였다. 훌륭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적으로 말이다. 주인공 아서의 행동이 대단하거나 멋져서가 아니다. 인간을 좀먹는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했고, 악의 평범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조커’가 훌륭하다 평가받는 이유였다고 본다.
영화는 허구지만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현실에다 영화를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영화 ‘배트맨’이나 ‘조커’에서 보이는 ‘조커’ 캐릭터는 영화적 인물일 뿐, 현실에 있어 마땅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난 8월 일본에서는 현실판 조커가 되고 싶다고 조커 복장을 한 채 방화를 저지르고 흉기를 휘둘러 10여 명을 다치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가 다른 남성과 결혼한 일로 실의에 빠져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스스로를 영화적 인물로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열심히 살아 보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그랬다’는 식이다.
뉴스가 보도되자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그런 논리라면 나는 사람을 열 명도 더 죽였을 것이다….” 환경이 범죄의 이유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화가 난다고 남을 해치는 건 야만적이다. 다만 이 범죄들을 단순히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치부하고 덮어 둘 수도 없다. 그들이 무섭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게 여러모로 확인되고 있어서다.
관객들이 ‘아서’의 심리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입할 수는 있었던 걸 보면, 분노는 컨트롤하기 어려운 감정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분노는 아무 죄 없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한다. 잔인하게도 분노 앞에 인간성을 내려놓은 이들은 “왜 그러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일이 잘 안 풀려서요”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변명인 셈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총기 난사나 칼부림을 막기 위해 가해 심리를 파악해서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은, 불만 많은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서사를 만들어 주자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때로 분노에 질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자는 관점에서 시작하자는 의미다. 모두가 영화 ‘조커’의 스토리와 연출에 감탄할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조커’ 캐릭터 그 자체에 공감하게 하였는지를 파악해 보아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가해자들의 계층과 경제적 상황, 심리에 대한 연구는 불가피하다.
수많은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테러나 범죄 심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 소외를 받는 사람에 대한 대책과 사회 안전망 강화’다. 프랑스의 대테러 정책을 다룬 한 논문에서는 프랑스가 강경한 테러 대응법에도 2015년 이후 테러를 막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테러의 최근 양상이 그간 지역적인 이유였던 것과는 달리 사회적 계급 갈등과 관련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집중적으로 사회적 소외 계층이나 은둔형 외톨이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미국은 범죄 억제의 일환으로 소외 계층에 대한 교육과 복지 체계를 확대하고,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직을 신설해 각종 범죄와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2021년 일본에도 ‘고독’ 담당 각료가 임명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다. 우리나라도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 소외로 인한 분노 감정을 다루는 국가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형 범죄는 ‘괴물’이 된 누군가의 일탈이 아니라 평범한 얼굴의 주변인 또는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특별하거나 이상한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접근하면 대책을 찾을 수 없다. 그건 특별한 게 아니라 비틀린 것이고, 그 비틀림은 보편적이라는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괴롭거나 소외당하고 분노감을 느낄 때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남들에게도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는 특별하거나 대단히 악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 ‘조커’ 속 아서는 위풍당당하고 대담하며, 일부 세력으로부터 추종을 받는다. 반면 현실판 조커를 꿈꾼 일본의 범죄자는 징역 23년을 선고받았고, 지난 2월 미국에서 총기 난사로 아이들을 죽인 범죄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에는 조커가 없다. 분노에 져서 자신과 타인을 파멸시킨 불쌍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