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행복하십니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7번 국도는,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에 크게 밀린다. 경북과 강원을 연결하는 이 도로를 타고 동남권의 공업지대로 일자리를 찾아 내려왔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다녀 본 길이기에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이 몰리고 또 흩어지는지를 이제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코로나가 끝나고 이례적인 긴 연휴가 이어진 때문인지 올해의 귀성 행렬은 예년보다 많이 붐볐다. 이쯤에는 밀렸던 차들이 풀려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는데도, 올해에는 한참이나 더 정체의 행렬이 이어졌다. 오래전에 고향을 떠났던 고령화된 세대들이, 묻어 두었던 고향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하면서, 정체를 견디고 있는 듯 느껴졌다.

추석 연휴 ‘공정한 보름달’의 의미

우리 사회 과잉 상품화 파편 넘쳐나

일 아닌 가족 중심 행복 생각할 때

느리게 이동하는 차 안에 있다 보니 길가에 걸려 있는 수많은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 올해 유독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부산에서도 보이던 이 플래카드는 고향으로 가는 내내,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얼굴을 내밀었다. ‘공정한 보름달을 기원합니다.’ 어쩌면 많이 보아 왔던 문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잠시라도 조용한 휴식 시간을 보낼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몹시도 무더웠던 지난여름, 본의 아니게 한국을 떠나 스웨덴에서 두 달 살이를 했다. 방학 기간 손자를 보아 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육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의 리듬에 맞추어 지내는 것은 단조로웠지만, 그러한 단조로움 속에서도 생활 속에서 얻게 되는 호기심과 느낌은 있었다.

스웨덴의 1인당 소득수준은 우리보다 훨씬 높다. 잘사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면에서 불편했다. 남의 나라이기 때문에 오는 불편함도 물론 있었지만, 원천적으로 불편하게 설계된 나라였다. 밤늦게 슬리퍼를 끌고 나가도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집안의 작은 일도 사람을 부르면 해결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불편한 상황이 적지 않았다.

생활이 불편하다는 것, 이것은 결국 사람을 부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생활이 편리한 것은 남을 부리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있는 사회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상품화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든 돈을 주면 해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가 누구든 돈으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사람도 나를 돈으로 쉽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웨덴에서의 불편함의 본질은 우리보다 상품화가 덜 되어 있고, 사람에 매겨진 값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에 높은 값을 매기면 물론 물가도 비싸진다. 대신 ‘일과 생활의 균형’이 잘 유지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생활의 목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워라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다. 우리 사회가 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스웨덴은 가족 중심의 생활이 더 우위에 있다.

정체에서 오는 짜증을 참고 장시간의 운전 끝에 도착한 고향의 푸근한 느낌은 언제나처럼 좋았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재회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반가움을 뒤로하고 곧 사람들은 익숙한 상품 사회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성공한 친구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올해에는 오지 못 한 친구들의 실패 얘기도 들려온다.

이러한 이야기에 인문학적 주제나 철학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기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치부된다. 익숙한 것은 돈 이야기이다. 특히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고향 동네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많아지면서 지난 몇 년 사이에 땅값이 몇 배 올랐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였다. 그 덕에 어릴 때 다녔던 초등학교가 폐교 위기를 넘겼다는 밝은 소식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을 고향의 푸근함으로 풀고 싶었던 많은 사람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가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돌아오는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이다. 어릴 때 보았던 푸근하고 편견 없던 보름달에서 큰 위안을 받고 푸근함을 안고 돌아왔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도시 못지않게 과잉 상품화의 파편들로 넘쳐나고 있는 농촌도 이제 더 이상 마음 편한 보름달을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과잉 상품화의 얘기들이 으레 그렇듯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데서 오는 허탈감도 있었을 것이고, 이야기 막바지에는 혐오 정치로 빠지면서 분노의 말들을 뱉어 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둥근 보름달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행복하십니까’.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