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은행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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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는 가을의 상징이다. 곱게 간직한 은행잎 책갈피의 추억도 생각난다. 은행잎은 운치는 물론이고 책에 좀이 슬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우리 집 은행나무/제 가지 휘어지도록 은행알 맺었다/은행나무 수크루 하나 다녀간 적 없는데/나는 안다/그녀의 수태비밀까지는 몰라도/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기도하던 그 자세를/또랑또랑 별의 눈망울을 닮은 은행은/그래서 또한 큰 염주알 같기도 하다는 것을.’ 복효근 시인은 ‘동정녀 은행나무’에서 은행을 이처럼 재밌게 표현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른다. 1억 5000만 년 전부터 나타나 빙하기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라는 이름은 나무가 은빛을 띠고 살구나무의 열매(杏) 빛깔과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졌다. 은행나무는 생장이 느리지만 고온 건조나 공해에 내성이 강하다. 유해 물질을 빨아들이는 공기 정화 효과가 좋다는 뜻이다. 은행의 냄새와 독은 다른 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막기 위한 진화라고 한다. 새는 물론이고 다람쥐나 청설모 등 어떤 동물도 은행을 안 먹는다. 단지 사람을 빼고 그렇다.

요즘 은행은 악취 때문에 공공의 적 신세가 되어 버렸다. 주민들의 민원이 잇따르자 지자체는 ‘은행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거리 청소와 함께 보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가지 주변에 그물망을 설치하거나, 굴착기 등 진동기가 부착된 설비로 조기 채취에 나서는 식이다. 심지어 암나무를 수나무로 바꿔 심는 작업을 벌이는 지자체까지 등장했다. 은행의 고약한 냄새는 겉껍질 속 점액에 있는 ‘비오볼’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암나무에서만 은행이 열려서다. 부산에는 은행나무 가로수 3만 4318주가 있고, 그중 열매가 맺히는 암나무는 28.3%인 9726주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올가을에는 은행을 밟는 일이 줄어든 것 같다. 인간이 이처럼 은행 냄새를 못 견뎌 하니 은행나무가 우리 곁에 가로수로 계속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나무로 교체하거나 약물 주입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너무 인간만 생각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생태학 전문가들은 “은행나무는 가로수로서 여러 이점이 있어 은행이 떨어지는 짧은 시기만 사람이 감수하고 함께 살아가면 좋겠다. 탄소 중립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수컷만 있는 세상은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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