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저녁 산책/이문재(1959~ )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마음은 저만치 흘러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 속으로 밤이 들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신발 끈 느슨하게 풀고

저녁 어귀를 푸르게 돌아오던 그날들

노을빛으로 흘러내리던 기쁜 눈물들

그리움으로 힘차하던 그 여름 들길들

그때 나에게는 천천히 걸어가 녹아들

저녁의 풍경이 몇 장씩 있었으나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하략)

-시집 〈산책시편〉(1993) 중에서


몸이 ‘항아리’가 되어 어둡고 추운 상태로 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세계와 소통이 단절된 채 몸 안에 갇혀 있는 마음은 또 얼마나 무서울까? 누구도 ‘견뎌내질 못’할 것이다. 끈적한 고독에 잠겨 뻐끔뻐끔 숨만 쉬는 물고기 같은 처지라면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피로사회’로 불리는 도시적 삶의 풍경이다.

시인 이문재는 이를 영혼에까지 느낀 모양이다. 아, 얼마나 무서운 발견이자 절창의 말인가!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삶의 숨구멍이 되는 산책은 마음과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렇지만 이런 잠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속도와 경쟁에 매몰되어 몸과 마음을 피로 속에 놓아둔다.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悲鳴)을 듣지 못한다.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 저녁의 풍경’에 녹아드는 ‘저녁 산책’은 꺼져 가는 우리 영혼을 붙잡는 등불이 된다. 당장 산책하러 나가자. 김경복 평론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