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인간의 존엄은 진정한 거듭남에서 비롯한다
문학평론가
나눔과 베풂의 정신, 그리고 이타적 사명감
자신을 버리고 다른 존재가 되는 일과 같아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적 가치 찾는 길이기도
세밑 공기가 차갑다. 날씨도 그렇고 경기도 그렇다. 이곳 부산은 2030월드엑스포 유치 실패로 가뜩이나 차갑고 무거운 공기에 더해 실의(失意)가 팽배해진 느낌이다. 부산 서구 부용동에서 소아마비라는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구자운 시인이 있다. ‘한국의 바이런’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그는 대표작 ‘청자수병’에서 ‘오, 수병(水甁)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雨露)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 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라 읊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했던 시인의 서글픈 심사가 시로써 형상화된 것이다. 시인을 지시하는 듯한 어릿광대의 안타까움과 고아한 항아리의 대비로 실존의 비극을 극대화한 이 시에는, 아름다움의 극치와 상반되는 현실의 누추함이 얼핏 새어 나와 읽는 이로 하여금 먹먹함과 숙연함을 전해준다.
시인이 꿈꾼 아름다움의 세계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에 고절(孤節)한 언어의 미학적 세공으로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시로써 승화시켰다. 시인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비루한 현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우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겹쳐 황폐한 들판에 드문드문 뒹구는 가랑잎 같은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추는 과정에서 계획에 어긋나지 않기 위한 온갖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을 찾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더라도 애초에 설정했던 계획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다.
계획이란, 지금보다 나은 삶의 조건과 환경을 이룩하기 위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서 반드시 들어서는 복안의 일종이다. 하루 단위부터 1년이나 10년, 아니 그 이상의 장기간 계획도 포함된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계획은 장래 구상을 위한 소중한 경험이자 거름이 된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힘겨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래의 계획이나 구상은 신기루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성공은 둘째 치고, 당장 갚아야 할 빚을 제때 갚거나 건강하기만 하더라도 행복해진다. 욕망을 줄여서가 아니라 성공의 법칙이나 처세 같은 것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사람의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문사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잠시 사업을 했던 구자운 시인이 천형과도 같았던 소아마비의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정갈하면서도 맑은 시편들을 남김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존엄을 지켰다. 그가 소아마비 장애자나 언론인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삶의 형식에만 주의를 집중시킨 나머지 정작 사람으로서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야 할 마음의 태도가 무엇인지 망각할 때가 많다. 부귀와 명예,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직책이나 인간관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우리에게는 앞날의 성공과 계획의 실현 못지않게 갖춰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교인 부산공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각각 20억 원과 450억 원 이상을 기부하고 자신은 검소한 삶을 실천한 신양(信陽) 정석규(1929~2015) 선생이 있다. 최근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 상영으로 세간에 알려진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기부 실천을 해오신 분이다. 이 두 분에게 삶의 계획이나 소망을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어려운 환경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정석규 선생에게 돈이란 비료와 같은 것이라서 모아두지 않고 밭에 뿌리는 거름이었다. 김장하 선생에게 돈이란 아픈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서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빚과도 같았다. 이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조리 사회에 환원하려는 철저한 나눔과 베풂의 정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혜택과 이득을 온전히 혼자 누리지 않고 우리 사회와 나누겠다는 이타적 사명감이 아닐까. 이런 마음은 진실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데서 발현된다.
성장과 속도에 기반한 성공 사회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찾아오는 병은, 인간으로서 잃어버린 존엄 대신에 자리 잡은 상대적 열등감과 왜소함이다. 그래서 더욱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남들과 비교하면서 잡지 못할 욕망의 노예가 된다. 잃어버린 존엄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참된 인간의 덕목을 놓치지 않고 손에 움켜쥐어야 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사명을 완수하면서 거듭나게 한다. 앞서 말한 두 선생과 구자운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