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루미나리에
좀체 연말 분위기를 느끼기 힘든 요즘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긴 터널을 벗어났지만, 경기침체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고물가에 서민 살림살이는 팍팍해졌고 자영업자들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또다시 해를 넘기고 이스라엘-하마스 가자지구 전면전에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국민 시름을 덜어 줘야 할 정치는 또 다른 전쟁터로 변했다. 캐럴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보니 시끌벅적한 연말 거리는 이제 옛 풍경이 됐다. 그나마 캐럴이 사라진 공간을 형형색색 빛으로 채운다. 연말이면 자치단체마다 경쟁적으로 불 밝히는 빛 축제, 이름하여 루미나리에다.
루미나리에(luminarie)의 유래는 이탈리아다. 16세기 나폴리왕국의 왕가 행차를 기념하기 위한 빛 장식이 종교적 성인을 기리는 빛 축제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거리 길목에 목조 구조물을 세우고 그 위에 등유와 촛불로 조명 장식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전구로 교체됐고 오늘날 이탈리아 전통 축제로 자리 잡았다. 독일 도르트문트, 스페인 마드리드 등으로 확산했고 미국 휴스턴에도 루미나리에가 전파됐다.
아시아에서 처음 루미나리에가 시작된 곳은 일본 고베다.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해 12월에 불을 밝혔다. 지진 희생자를 진혼하고 도시 부흥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행사는 이제 해마다 5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며 고베를 빛의 도시로 부흥시키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3년 부천시가 시 승격 30년을 기념해 상동호수공원에서 선보인 ‘2003 부천 루미나리에’가 시초다.
부산 루미나리에 원조는 2008년 광복로 상인들이 스스로 상권을 살려 보자며 시작한 ‘광복로 겨울빛 트리 축제’다. 올해 테마는 ‘샤이닝 헤리티지 345’다. 일본과의 외교 창구 초량왜관이 시작했던 1678년부터 2023년까지 345년간 이어져 온 중구의 역사와 유산을 빛 축제로 구현했다. 해운대 구남로를 중심으로 ‘해운대 빛 축제’와 부산진구 서면1번가를 중심으로 ‘서면 빛 축제’도 시작됐다. 동래구도 올해 처음으로 ‘제1회 온천천 빛 축제’를 15일부터 연다. 그런데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벌이는 빛 축제가 저마다의 지역성과 독창성을 갖춘 겨울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빛의 본질은 위로와 희망이다. 부산 곳곳의 빛 축제가 각자의 독특한 색으로 반짝이며 힘겨운 한 해를 버텨 낸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길 바란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