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부모라는 극한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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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극한 직업’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노동의 강도가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을 일컫는다. 만약 부모라는 타이틀의 직업이 있다면 그 일은 조금 특수할 것이다. 자녀가 어린 시절에는 육아라는 육체노동이, 자녀가 커갈수록 정신노동이 함께 요구되지만 노동에 따른 보수가 주어지기는커녕 부모는 돈도 쓰고 고생도 직접 한다. 심지어 근로계약은 충격적이게도 종신계약이며 퇴사하고 싶어도 퇴사할 수 없다. 정년도 없고 은퇴도 없다.

최근 부모와 함께 살며 경제적,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캥거루족은 청년세대를 넘어 중년세대로 확대 중이라고 한다. 자녀가 스무 살 성인이 되면 다 키웠다는 말은 오래전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가 이제는 결혼해서 집을 구하고 아이를 낳아서도 부모의 지원이 계속된다. 해마다 역대 최저 출생률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 세계가 인구소멸을 우려하는 한국 사회에서 부모라는 역할의 무게와 그 의미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독립 못 하는 성인층 갈수록 늘어

젊은 세대 효 인식 옅어지는 반면

자녀에 대한 책임·희생 요구 여전

부모 역시 완전한 존재일 수 없어

현실적 역할 변화 모색 절실한 때

보다 유연한 관계로 자녀 대해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세대를 불문하고 국경을 초월한다. 또한 부성애와 모성애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공유하는 강력한 사랑의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방식은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은 전통사회와 점점 멀어지면서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효(孝)의 문화가 빠르게 희석되었다. 반면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책임감과 희생정신은 과거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부모는 양육자를 떠나서 자녀보다 30년 정도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인생 선배이지만 사실 자라고 나서 보면 부모 역시 나만큼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고 부족한 사람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건 그들이 매번 현명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나와 똑같이 실수하고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고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게 고단한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녀에게 항상 강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하고 자녀를 위해 부모의 삶을 희생하는 게 당연시되거나 개인이 가족 안에서 지워지는 경험들은 늘 옳은 것일까.

예컨대 이혼 소식이 자주 들렸던 요즈음, 자녀가 있는 부부의 이혼 기사에는 이혼 부부의 자식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빠짐없이 들렸다. 물론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한편으론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녀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불행을 택해야 하거나 혹은 그렇게 자녀 때문에(자녀의 입장에서는 본인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행복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혼가정의 자녀가 반드시 불우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편견 또한 작용한 것은 아닌가 싶다.

국적도 성별도 파트너도 얼굴도 이름도 거의 모든 걸 내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일 것이다. 그 때문일까 과거 천륜이라고 불린 절대성이 오늘날까지도 부모와 자녀 사이를 절대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로 고착시킨다. 이로 인해 부모를 같은 인간이자 일생의 동료이자 또는 하늘이 맺어준 첫 번째 친구로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너무 많은 책임감과 부담감이 예비 부모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새 생명이 가져올 기쁨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미래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감히 아이를 갖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하고 출산을 포기한다.

부모의 지나친 책임감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라면 끊이지 않고 전해지는 가족 동반 자살 소식이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살하는 이 사건들은 부모가 자녀를 곧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어릴 적 누군가의 보살핌에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설령 부모가 부재하더라도 그와 무관하게 아이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

미국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엄마가 쓴 에세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다 보면 부모가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부모 스스로의 대단한 착각인지 알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아들이 총기 난사를 한 사실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 채로 아들의 범죄를 마주하고 자신과 아들의 자아를 분리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며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나간다.

부모와 자녀는 운명공동체도 아니고 지금 시대는 연좌제를 집행하던 전통사회도 아니다. 장기적으로 부모라는 극한 직업에도 현실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로써 부모와 자녀는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건강한 사랑 위에서 각자의 삶에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보다 유연한 관계로 다가설 수 있다. 부끄럽게도 내 부모님 역시 극한 직업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새해에는 조금이라도 해방시켜 드릴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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