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 항해에서 확인하는 건 살아야겠다는 생의 의지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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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길 중편소설집 ‘남태평양’
태풍 속 항해 생생하게 그려내
풍파 이는 삶, 사랑 확인 과정
존재 성숙에 대한 갈망 소설화

뱃사람인 해양소설가 이윤길은 “바다가 위대한 것은 그 위대함을 알게 해주는 뱃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망 제공 뱃사람인 해양소설가 이윤길은 “바다가 위대한 것은 그 위대함을 알게 해주는 뱃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망 제공

45년 배를 탔으며 해양시와 해양소설을 함께 쓰는 뱃사람 이윤길(64)이 중편 해양소설집 <남태평양>(전망)을 냈다. 200자 원고지 300장 분량의 중편소설인 ‘남태평양’ ‘북태평양’ ‘남서대서양’, 3편을 한데 묶었다. 2011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그의 다섯 번째 해양소설 책이다.

소설 3편의 공통 핵심 단어는 태풍 속에서 항해하는 ‘황천(荒天) 항해’다. 저승인 ‘황천(黃泉)’ 문턱까지 오가는 것이 황천 항해다. ‘그야말로 바다가 폭발했다는 표현 이외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241쪽), ‘배는 좌우로 30도까지 흔들리면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만들었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다의 악의가 만들어놓은 차가운 함정이었고 인간이라면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에 이르는 길이었다.’(242쪽)

그런 죽음의 문턱에서 확인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삶이고, 살아야겠다는 생의 의지다. 발레리 식으로 말하면 ‘바람이 분다, 죽을 수 있다,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지구에서 원초적 생명력이 꿈틀거리며 넘치는 곳이 바다인데, 그 생명력의 원초성을 가감 없이 경험하는 것이 황천 항해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삶의 바다, 죽음 문턱에서 생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다는 소리다.

또 파도는 어떤가. ‘파도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자빠뜨릴 듯 한껏 치솟아 갯바위를 때리고 바다로 돌아갔다. 파도는 그렇게 바다로 돌아갔다가 못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다시 와 갯바위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쳤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갯바위는 파도의 목을 끌어안고 엎어졌다. (…) 저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223~224쪽) 지구가 살아있는 순간의 표현이 파도인 것처럼 우리 삶의 거친 풍파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살아있음의 깊은 뜻은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이윤길의 중편 해양소설집 <남태평양>. 전망 제공 이윤길의 중편 해양소설집 <남태평양>. 전망 제공

3편 소설은 그 얘기가 모두 부산항에서 시작, 출항한다는 점에서 ‘부산발 해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성식 해양시인과 천금성 해양소설가를 배출한 부산은 한국 현대 해양문학의 성지이기도 하다. 표제작 ‘남태평양’은 “해양문학이 고기잡이 얘기밖에 없냐”라는 물음에 응하며 새롭게 쓴 것으로, 한 여성의 요트 항해기다. 상처를 지닌 그 여성은 타이티섬을 목표로 홀로 항해하는 도중에 황천 항해의 풍파를 치르면서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무얼까?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이것… 이 느낌… 이 새로움’(98쪽), ‘-보고 싶다’(85쪽)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생의 의지다.

중편 ‘북태평양’은 19세에 배를 타기 시작해 온 바다를 체험한 그의 고기잡이 인생을 공 들여 직조한 이야기 구조 속에 아주 농밀하게 녹여낸 것이다. ‘남서대서양’은 포클랜드 인근에서의 원양어선 조업 과정을 생생히 그렸는데 뱃사람을 죽음의 공포로 가두어 버리는 마의 바다 남빙양(남미와 남극대륙 사이)을 가로지른 지옥 체험도 담았다. 소설 중간중간에 한국 원양어업 역사와, 원양어업계의 현실적 판도까지 섞어놓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설을 보면 ‘정산 과정’이라는 것이 나온다. 원양어선의 어로 수익을 배분하는 과정인데 선주가 압도적으로 80%를 가져가고, 선장과 선원들은 나머지 20%를 놓고 배분을 한다는데 이 과정에서 ‘무조건 먹고 보겠다’는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기도 한단다. 선주가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항의하다가 찍히면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원들을 노예처럼 부린 선장이 나머지 20퍼센트를 혼자서 먹고 튀는 경우도 있었다는데, 그야말로 선원들의 피를 빨아먹은 거머리 같은 선장이었다고 한다.

소설에서 배와 뱃사람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바다가 위대한 것은 그 위대함을 알게 해주는 뱃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뱃사람이 바다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배가 있기 때문이다.’(145~146쪽) 그 어법으로 말하면 뱃사람들과 바다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 해양소설이다. 문학평론가 김경복 경남대 교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모험의 행로’라는 해설을 통해 “이윤길 소설에서는 존재 성숙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 썼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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