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깟 공놀이에 열광하는가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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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나라 / 이종성

국내 야구 대한 100년 간의 통사
일제의 동화 정책으로 전파됐지만
되레 '극일' 수단으로써 민중 열광

<야구의 나라> 표지. <야구의 나라> 표지.

야구와 축구 중 어떤 공놀이의 인기가 더 많을까. ‘엄마랑 아빠 중 누가 더 좋아?’ 식의 이런 질문은 세상 쓸모 없지만, 여전히 많이들 따져 묻는다. 심지어 객관적인 기준이라며 스포츠 중계권료를 통해 인기를 비교하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의 출판사 서평이 그랬다. 지난해 기준, 방송사·포털 등이 낸 프로야구 중계권료는 연간 760억 원 정도. 축구·농구·배구 등 다른 프로스포츠의 한 시즌 중계권료를 모두 합쳐도 프로야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다만 이 접근법은 각 종목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았다. 야구는 월요일을 제하고 매일 경기를 치른다. 그만큼 중계 시간이나 횟수도 많다. 반면 축구는 리그 경기만 따져 일주일에 단 한 번이다. 게다가 야구는 한 경기 9번씩의 공수 교대 때마다 광고를 내보낸다. 9회말을 생략하더라도 16번이다. 더해 투수 교체 때에도 내보낸다. 축구는?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 내보내는 것이 전부다.

사실 세계적으로 볼 때 야구보다 축구가 더 대중적이다. 프로축구 리그는 많지만 프로야구 리그가 존재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그런 면에선 한국은 ‘야구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왜 축구가 더 대중적인가. 축구는 공 하나와 공터만 있으면 얼추 가능하다. 야구는 상대적으로 많은 장비를 갖추지 않고선 불가능한 공놀이다. 그렇다 보니 초창기 야구는 주로 ‘가진 자’의 전유물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야구의 나라>는 한국의 가진 자들이 어떻게 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들었는지,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순으로 추적해 설명한 한국야구의 통사(通史)다.

이 땅에 야구를 전파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이었다. 처음 야구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일본 유학을 경험한 조선 엘리트의 스포츠였다. 그런 ‘엘리트만의 야구’가 ‘국민의 야구’(물론 대부분 ‘관전’을 즐기는 것이긴 하지만)로 바뀐 것은 일제과 조선인의 서로 다른 의중이 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야구를 통해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했다. 많은 학교에 야구부를 만들어 조선 학생들에게 야구를 전파했다. 고시엔에서 일본의 젊은이들과 함께 땀흘리게 함으로써 조선과 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려 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야구 시합에서만이라도 일본을 이기고자 했다.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휘문고보 야구부가 고시엔 조선 예선전에서 우승해 일본 본선에 진출했을 때 모든 조선인이 그해의 고시엔 야구에 관심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러 학교에 야구부를 둔 것이 해방 이후의 고교야구 전성기로 이어진다.

책은 프로야구의 탄생에도 야구 명문고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전두환의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은 누구나 알지만. 당시 전두환이 야구가 아닌 축구광이었다는 건 낯설다. 그럼에도 축구가 아닌 야구가 스포츠 활성화 정책의 중심이 된 데에는 당시 야구 명문고 출신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이학봉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경남고 출신이다.

저자는 지난 100년 야구의 역사를 ‘엘리트들의 동맹’이라는 키워드로 압축한다. 그리고 그 동맹을 움직인 원동력은 ‘학연’과 ‘위정자들의 지배논리’로 요약할 수 있다.

영화 ‘머니볼’에서 미국 프로야구 오클랜드 애틀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야구를 보면서 낭만에 젖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은 잠시나마 뜨거운 낭만에서 벗어나 사회학적으로 차갑게 야구를 고찰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뭐, 일주일 후 KBO리그가 개막하면 어차피 다시 뜨거워질 테다. 이종성 지음/틈새책방/328쪽/1만 8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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