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원조 한류 통일벼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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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열대형인 인디카와 온대형인 자포니카로 나뉜다. 1920년대 일본 학자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인디카는 수확량이 월등하지만 자포니카에 비해 점성이 낮아 식감이 떨어진다. 둘의 장점을 고루 갖춘 품종을 얻으려는 시도는 일본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잡종이 불임이어서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육종 기술은 일본의 그늘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인구 증가로 쌀이 부족해지고 미국의 원조 곡물이 유상으로 바뀌자 박정희 정부는 쌀 증산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 그 결과 1969년 세계 최초로 두 품종을 교잡한 신품종 IR667이 빛을 보게 된다. 훗날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통일벼의 탄생이다.

육종 선진국도 포기한 교배 성공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요원을 이집트에 보내 열대성 자포니카 품종을 밀반출해 왔다. 하지만 이 품종은 우리 땅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고 만다. 방사선 노출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원자쌀’ 방식도 무위로 끝났다. 돌파구는 600여 차례 교배 끝에 불임이 아니면서도 인디카의 좋은 형질을 유지한 종자를 얻으면서 열렸다. ‘벼 곱절 거둘 수 있다. 기적의 쌀 재배 성공.’ 1969년 9월 언론은 보릿고개 극복과 육종 독립에 환호했다.

통일벼 명칭에는 ‘우리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인디카·자포니카 하이브리드’ 또는 ‘한국형 인디카’ 대신 쌀 품종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생태형인 점을 강조해 통일계(tongil type) 품종으로 명명됐다. 실제 통일벼는 다수확에 목말랐던 저개발 국가에 복음이었고 개량을 거듭하며 통일계 변이로 퍼져 나갔다. 새 품종이 발표되기 무섭게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베트남, 부탄으로 전파됐다. 일본도 통일벼를 개량한 ‘구사호나미’ ‘구사노호시’를 사용했다. 통일벼가 한류의 원조였던 셈이다.

1990년대 들어 쌀 소비 감소, 재고 증가로 정부가 장려 품종에서 빼고 추곡수매까지 폐지하자 통일벼는 잊혀져 갔다. 고시히카리, 아키바레는 익숙해도 통일벼는 낯선 게 요즘 세태다. 하지만 통일벼는 역사적 유산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지난 5일 한-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한 4개국이 ‘K라이스(쌀)벨트’ 참여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통일벼 증산 경험을 공적 원조로 제공받는 아프리카 참가국이 모두 14개국으로 늘었다. 통일벼는 아프리카 현지에 맞게 진화를 거듭하면서 생명의 씨앗이 되고 있다. 한국이 인류에 공헌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대목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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